문영공(김순) 할아버지 연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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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3-11 18:46 조회1,408회 댓글0건본문
9) (34세)1291년 장인(허공)이 별세하다.
장인 허공이 1291년(충렬 17, 34세)에 집에서 별세하니 향년 59세였다. 처음 정당문학(政堂文學) 윤극민(尹克敏)의 큰딸과 결혼하여 3남 2녀를 낳았고, 2녀는 김순(金恂)에게 시집갔는데, 승사랑 비서소윤 지제고(升仕郞 秘書少尹 知制誥)이다. 뒤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최징(崔澄)의 여섯째 딸과 결혼하여 2남 2녀를 낳았다.
<1291년 허공 묘지명>
공은 처음 정당문학(政堂文學) 윤극민(尹克敏)공의 큰딸과 결혼하여 3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근시낭장(近侍郎將) 정(정)으로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한 기(奇)□□공의 딸과 결혼하였고, 2남은 조현대부 장군 감찰시사(朝顯大夫 將軍 監察侍史) 평(評)으로 찬성사 상장군(贊成事 上將軍)인 염(廉)□□공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3남은 대창서승(大倉署丞) 관(冠)이다. 장녀는 정승대부 판비서시사 문한시강학사 지제고(正丞大夫 判秘書寺事 文翰侍講學士 知制誥) 김변(金?)에게 시집갔고, 2녀는 승사랑 비서소윤 지제고(升仕郞 秘書少尹 知制誥) 김순(金恂)에게 시집갔다.
(공은) 뒤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최징(崔澄)공의 여섯째 딸과 결혼하여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산정도감판관(刪定都監判官) 총(寵)이고, 2남은 동면도감판관(東面都監判官) 부(富)이며, 장녀는 수태위 상주국 평양후(守太尉 上柱國 平陽侯) 현(?)에게 시집갔으며, 2녀는 흥위위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 조연(趙璉)에게 시집갔다.
10) (35세) 전법총랑, 군부총랑, 전리총랑, 삼사우윤 등
임진년(충렬왕 18, 1292, 35세)에 조현대부 전법총랑 지제고(朝顯大夫 典法摠郞 知制誥)로 승진하고, 여러 차례 옮기면서 소부윤 □□□학 군부총랑 전리총랑 조봉대부 비서윤 삼사우윤(少府尹 □□□學 軍簿摠郞 典理摠郞 朝奉大夫 秘書尹 三司右尹)을 지냈는데 모두 지제고(知制誥)[三字]를 겸하였다.
11) (38세)1295년 동지공거로 과거 주관
원정(元貞) 을미년(충렬왕 21, 1295, 38세) 겨울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자, 뽑힌 사람들이 모두 당시의 이름난 선비들이었다. 크게 잔치를 열자 □□□□ 선비와 조야(朝野)에서 훌륭하다고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것은 선공을 지극히 영화롭게 한 효도이다.
12) (39-41세) 국학전주, 밀직사, 우승지, 성균좨주, 집현전학사 등
그 해에 조의대부(朝議大夫)로 승진하고, 병신년(충렬왕 22, 1296, 39세)에 세자사인(世子舍人)을 겸하였다. 대덕(大德) 정유년(충렬왕 23, 1297, 40세)에는 국학전주(國學典酒)로 옮기고, 다시 봉렬대부 밀직사 우부승지(奉烈大夫 密直使 右副承旨)에 임명되었다가 곧 좌부승지 보문각직학사(左副承旨 寶文閣直學士)로 옮겼다. 이듬해(41세) 우승지 지판도사사(右承旨 知版圖司事)에 올랐으며, 옮길 때마다 모두 지제고[三字]를 겸하였다. 그 해 봄에 남녘지방으로 사명(使命)을 받들고 내려갔다. 돌아오게 되자 통의대부 광정부사 승지 성균제주(通議大夫 光政副使 承旨 成均祭酒)로 고쳐 임명되었고, 또 정의대부 집현전학사 좌산기상시(正議大夫 集賢殿學士 左散騎常侍)로 바뀌었다. 그 해 7월에 다시 밀직사 우승지 국학제주 보문각학사 지민조사(密直使 右承旨 國學祭酒 寶文閣學士 知民曹事)가 되었는데 전과 같이 지제고[三字]를 겸하였다. 8월에 봉익대부 삼사좌사 숭문관학사(奉翊大夫 三司左使 崇文館學士)에 오르고, 9월에 다시 정헌대부 밀직사좌승지 판비서시사 충사관수찬관 지제고 지군부사사(正獻大夫 密直司左承旨 判秘書寺事 充史館修撰官 知制誥 知軍簿司事)로 바뀌었으며, 12월에 봉익대부 밀직사부사 문한학사(奉翊大夫 密直司副使 文翰學士)에 임명되었다.
13) (41세)1298년, 대구 동화사 홍진국존비 書
충렬왕24 戊戌 (1298, 41세)에 세운 동화사 홍진국존비는 金暄(김훤)이 짓고 밀직승지 김순이 썼으니 대구 팔공산에 있다. <해동금석총목>
弘眞國尊碑銘(篆 題)」
高麗國大瑜伽桐華寺住持五敎都僧統普慈國尊贈諡弘眞碑銘幷序」
奉翊大夫副知密直司事國學大司成文翰學士臣金?奉敎撰」
正議大夫密直司左承旨判秘書寺事文翰學士充史館修撰官知
制誥臣金恂奉敎書」
門人桐華寺住持深智洞解五明大師孝楨立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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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德二年十月 日」
우리 문중의 비조이신 대보공(휘 알지)의 탄강설화 <금궤도(金櫃圖)>를 그린
조속(1595-1668)은 진적(眞蹟)과 금석문(金石文)을 수집하여 <금석청완>을 엮는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금궤도와 금석청완이 소장되어 있고
금석청완에 홍진국사비 탁본이 실려 있다.
비명제목 6자(弘眞國尊碑銘)를 1행에 3자 2행에 3자, 두칸으로 나누어 제작하고
비문 중앙의 일부분을 6행 11열로 총 60자로 제작한 것이다.
http://iandongkim.com/munyoung11.jpg
<국립박물관 소장 '금석청완' 내의 홍진국사비 탁본>(2002. 1. 항용(제) 비디오 촬영후 재촬영)
이우(1637-1693)가 1668년 엮은 탑본첩.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
이 책에도 비교적 선명한 홍진국사비 탁본 1점이 실려 있다.
비석 말미에 적는 銘 부분으로 탁본 右上 4-5글자는
장서각 소장 탁본의 左下 조각과 같은 부분이다.
http://iandongkim.com/munyeng3.jpg
<대동금석서 내의 문영공 홍진국사비 탁본 일부>
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에는 “탁본 實物”1점이 소장되어 있다.
서울 柳正秀(작고)藏 舊탁본(154.5×84.8)이다.
비편 6조각을 비문 내용에 맞추어 배열하여 탁본한 것이다.
현존하는 유일한 탁본이라 귀중한 유물이다.
http://iandongkim.com/munyeng10.jpg
<정신문화원 소장 홍진국사비 탁본 일부>
추사 김정희 42세, 1827년 1월 26일,
(청나라)장심이 (추사 동생)김명희에게 장찰을 보낸다.
‘桐華 2비’등 여러 탁본을 보내준 것에 대해 사의를 표하고 있는데
이 중 하나 정도는 동화사 홍진국사비 탁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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