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원공 신도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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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2-02-14 22:20 조회1,833회 댓글0건본문
순충분의 좌명동덕 개국공신 추충협찬 정난정사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 삼훈관영
경연사감춘추관사 세자부 상락백 부원군 시익원 김공 신도비명병서
대자연의 추이와 운수의 변천은 세상에서 능히 오래 평화를 지속치 못하고 반듯이 혼란하고 망하는 때가
있다 그러나 하늘은 난을 평정할 사람을 낳게하사 억조의 군주가 되게 하시고 이분을 보필할 인제를 낳
아 성공케 하나니 옛날의 재상 익원 김공이 어른이로다 공의 휘는 사형 자는 평보 호는 낙포 이시니라
신라 경순왕의 후손인 안동인이시며 고조의 휘는 방경이시고 관은 첨의중찬 상낙공이시고 시는 충렬이시
다 출장입상하셨으며 국가의 큰 공훈을 세우셨다 증조 순은 판삼사사 상낙백 시 문영이시며 조 영후는
첨의정승 상낙후 시 정간이시고 고 천은 영상사사 상락군이시다 어머님은 삼한국대부인 현풍곽씨이며
포산군 원 진의 따님이시다 공께서는 고려 충혜왕 신사년에 출생하셨다 젊어서부터 요직을 맡아 책임성
있게 국사를 처리하셨다 임신칠월에 여러 장상과 더불어 이태조를 추대하션후 나아가 문하시랑 찬성사
겸 판상서사사가 되시고 또 병조전서 응양위 상호군을 겸하시고 개국일등공훈에 추록되었다 십이월에
문하우시중을 배수 하시고 작위는 상락백에 봉하졌다 식읍 일천호 식실봉 삼백호를 받으시고 병자십이월
에 문하우정승으로 오도병마 도처치사가 되시어 오도의 병선을 모아 일기와 대마도를 공약하려 떠나실
때 태조가 남문까지 나오시며 전송하는 자리에서 철월을 주고 안마, 모관, 감, 궁시, 약상을 내리시고 교
서를 내려 가로대 [경의 의관고 주족은 낭묘의 굉재라 시품이 엄속하며 뜻을 세우고 넓고 굳세여 서정을
살핌에 이치에 맞게하며 인재를 추천함에 적제적소에 맞게 하니 그 밝은 것은 허실을 알며 지혜는 족히
도적의 난을 제어할지라 이에 절월을 주며 왕과 동열에 보좌하여 그 위세를 당당케하니 제장은 엎드려 명
을 드르라 도적들은 이 위풍을 들은후 담이 떨어져 파하게 될것이니 경은 앉아서 주책을 운영하여 장수
를 지시하되 금후는 이런 난이 다시 없도록 만전을 도모하라] 하시니라 이에 장졸이 군율과 법규를 위반
하였을 때는 대소를 불문하고 즉시처리케 하시고 익년 정월에 개선하셨다 정축년에 판사헌부사를 가겸하
시고 무인의 변란에 조준과 함께 입궐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적자를 세워 왕위를 계승할 것을 청하니 이
가 곧 정종이시다 정종께서 선위를 받으신후 정사공신일등으로 녹선하였다
기묘년에 우정승으로서 건문황제의 등극함을 축하하시러 떠나실 때 왕께서 홍제원까지 출행하시어 전송
하였다 동년 십이월에 공이 스스로 성만하심을 진술하시고 퇴위를 원하셨는데 오랜 시일이 지난 후에 허
락되었다 재상이 되시고 팔년간 관과 간으로써 지내시고 묘당을 진좌하시어 물의가 귀중하니라 태종 신
사년 삼월에 다시 좌정승에 복직하시고 임오년십월에 퇴임하시여 영사평부사가 되시고 그후 상락부원군
에 이르시다 정해년 칠월 삼십일에 졸하시니 향년67세이시니라 부음이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삼일간을 철
조하고 좌부대언 윤 수를 빈소에 보내어 제사케하고 시를 익원이라 증하였다 덕을 높이고 공을 보답하는
길이 마땅히 이와 같은지라 사기에 이르되 공께서는 침심유지하고 매사에 정중히 하고 과묵하였으며 안
으로는 사람들과 혐의를두고 지낸 일이 없고 밖으로는 사람들에게 모나게한 일이 없으며 재산을 탐내지
않았고 명예와 여색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벼슬을 마칠 때까지 한변도 탄핵을 받지 않았으며 대사헌이 되
신 이듬해에 조정이 숙연하고 매양 벼슬을 배수할 때마다 좋은 인재를 얻었다고 일컬었으니 시종 착한것
은 그 비할데가 드물도다 이 몇마디 말은 모두 사실을 근거로하여 직서한 것이니 가히 마땅히 밝고 분명
한 일이로다 지금세대가 연면하게 멀리 내려온 후에 그 사실을 어찌 더 첨부해서 만들 수 있으리요
경연사감춘추관사 세자부 상락백 부원군 시익원 김공 신도비명병서
대자연의 추이와 운수의 변천은 세상에서 능히 오래 평화를 지속치 못하고 반듯이 혼란하고 망하는 때가
있다 그러나 하늘은 난을 평정할 사람을 낳게하사 억조의 군주가 되게 하시고 이분을 보필할 인제를 낳
아 성공케 하나니 옛날의 재상 익원 김공이 어른이로다 공의 휘는 사형 자는 평보 호는 낙포 이시니라
신라 경순왕의 후손인 안동인이시며 고조의 휘는 방경이시고 관은 첨의중찬 상낙공이시고 시는 충렬이시
다 출장입상하셨으며 국가의 큰 공훈을 세우셨다 증조 순은 판삼사사 상낙백 시 문영이시며 조 영후는
첨의정승 상낙후 시 정간이시고 고 천은 영상사사 상락군이시다 어머님은 삼한국대부인 현풍곽씨이며
포산군 원 진의 따님이시다 공께서는 고려 충혜왕 신사년에 출생하셨다 젊어서부터 요직을 맡아 책임성
있게 국사를 처리하셨다 임신칠월에 여러 장상과 더불어 이태조를 추대하션후 나아가 문하시랑 찬성사
겸 판상서사사가 되시고 또 병조전서 응양위 상호군을 겸하시고 개국일등공훈에 추록되었다 십이월에
문하우시중을 배수 하시고 작위는 상락백에 봉하졌다 식읍 일천호 식실봉 삼백호를 받으시고 병자십이월
에 문하우정승으로 오도병마 도처치사가 되시어 오도의 병선을 모아 일기와 대마도를 공약하려 떠나실
때 태조가 남문까지 나오시며 전송하는 자리에서 철월을 주고 안마, 모관, 감, 궁시, 약상을 내리시고 교
서를 내려 가로대 [경의 의관고 주족은 낭묘의 굉재라 시품이 엄속하며 뜻을 세우고 넓고 굳세여 서정을
살핌에 이치에 맞게하며 인재를 추천함에 적제적소에 맞게 하니 그 밝은 것은 허실을 알며 지혜는 족히
도적의 난을 제어할지라 이에 절월을 주며 왕과 동열에 보좌하여 그 위세를 당당케하니 제장은 엎드려 명
을 드르라 도적들은 이 위풍을 들은후 담이 떨어져 파하게 될것이니 경은 앉아서 주책을 운영하여 장수
를 지시하되 금후는 이런 난이 다시 없도록 만전을 도모하라] 하시니라 이에 장졸이 군율과 법규를 위반
하였을 때는 대소를 불문하고 즉시처리케 하시고 익년 정월에 개선하셨다 정축년에 판사헌부사를 가겸하
시고 무인의 변란에 조준과 함께 입궐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적자를 세워 왕위를 계승할 것을 청하니 이
가 곧 정종이시다 정종께서 선위를 받으신후 정사공신일등으로 녹선하였다
기묘년에 우정승으로서 건문황제의 등극함을 축하하시러 떠나실 때 왕께서 홍제원까지 출행하시어 전송
하였다 동년 십이월에 공이 스스로 성만하심을 진술하시고 퇴위를 원하셨는데 오랜 시일이 지난 후에 허
락되었다 재상이 되시고 팔년간 관과 간으로써 지내시고 묘당을 진좌하시어 물의가 귀중하니라 태종 신
사년 삼월에 다시 좌정승에 복직하시고 임오년십월에 퇴임하시여 영사평부사가 되시고 그후 상락부원군
에 이르시다 정해년 칠월 삼십일에 졸하시니 향년67세이시니라 부음이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삼일간을 철
조하고 좌부대언 윤 수를 빈소에 보내어 제사케하고 시를 익원이라 증하였다 덕을 높이고 공을 보답하는
길이 마땅히 이와 같은지라 사기에 이르되 공께서는 침심유지하고 매사에 정중히 하고 과묵하였으며 안
으로는 사람들과 혐의를두고 지낸 일이 없고 밖으로는 사람들에게 모나게한 일이 없으며 재산을 탐내지
않았고 명예와 여색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벼슬을 마칠 때까지 한변도 탄핵을 받지 않았으며 대사헌이 되
신 이듬해에 조정이 숙연하고 매양 벼슬을 배수할 때마다 좋은 인재를 얻었다고 일컬었으니 시종 착한것
은 그 비할데가 드물도다 이 몇마디 말은 모두 사실을 근거로하여 직서한 것이니 가히 마땅히 밝고 분명
한 일이로다 지금세대가 연면하게 멀리 내려온 후에 그 사실을 어찌 더 첨부해서 만들 수 있으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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