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의 우리 선조님 03---김흔 3 (1279년, 1282-1285년 독로화(禿魯花-볼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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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1-10 13:14 조회1,501회 댓글1건본문
김흔 장군은 1279년, 1282-1285년 원나라에 인질(뚤루게, 독로화)로 갔는데,
1279년 김흔장군과 함께 원나라에 인질(뚤루게, 독로화)로 간 사람중에
원관은 (김선-)김승용의 처부 : 원부---★원관---원정
허공은 김순의 처부 : ★허공---허평
한공의는 (김순-김영후-김천-)김사겸의 처부 : 한강---한사기---한악---★한공의
뚤루게 禿魯花(독로화)
고려 후기에 몽골 숙위를 위해 인질로 보낸 왕족 ·귀족의 자제.
몽골이 이민족을 지배하는 방식의 하나였으며, 1241년(고종 28)에 왕족인 영녕공 준(永寧公嗾)과 귀족 자제 10명을 보낸 것을 시작으로, 1271년(원종 12)에는 세자 심(諶:충렬왕)과 송빈(宋훅) ·설공검(薛公儉) 등 귀족 자제 20명을 보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를 꺼리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1275년(충렬왕 1)에는 선발된 사람에게 3등급을 초월하여 관직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원(元)나라와의 관계가 점점 깊어지면서, 1279년에는 대방공 징(帶方公砒)이 김방경(金方慶) ·원부(元傅) ·박항(朴恒) ·허공(許珙) ·홍자번(洪子藩) ·한강(韓康) ·설공검 ·이존비(李尊庇) ·김주정(金周鼎) 등의 자제를 선발하여 보내기도 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일정 기간을 보낸 뒤에 귀국하였으나, 한사기(韓謝奇)처럼 가족을 이끌고 원나라에 가서 관직에 진출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뒤에도 몇 차례 선발하여 보냈으나, 1313년(충선왕 5)에 왕족인 고(暠)를 보낸 것을 마지막으로 기록에 나타나지 않으며, 다만 고려 국왕이 세자시절에 원나라에서 생활하는 관례는 지속되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고려사
《고려사》제29권 - 세가 제29 > 충렬왕 2 >
충렬왕 기묘 5년(1279)
3월
정사일에 대방공 왕증이 독로화를 데리고 원나라로 출발하였는데 김방경의 아들 김흔, 원부의 아들 원정, 박항의 아들 박원굉, 허공의 아들 허평, 홍자번의 아들 홍순(洪順), 한강의 아들 한사기, 설공검의 아들 설지충, 이존비의 아들 이우(李瑀), 김주정의 아들 김심(金深) 등 양반 자제 25명을 보냈는바 모두 현직에서 3등급씩 올려 임명하여 보냈다.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충렬왕 5년에 독로화(禿魯花-볼모)로 원나라에 들어갔는데 당시에 우리 나라 사람들이었던 유주가 황제에게 말하기를 “외국인으로서 외국인을 공격케 하는 것은 중국의 형편상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니 고려와 만자(蠻子-중국 남방의 이민족들)로 하여금 일본을 정벌케 하고 몽고 군대는 파견하지 말도록 하며 또 고려로 하여금 군량 20만 석을 준비하도록 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더니 황제가 그렇게 하자고 허락하였다.
여기서 김흔은 유주더러 말하기를 “너는 유검필(黔弼), 유자량(資諒)의 후손이 아닌가? 그런데 자기의 고국을 이다지도 못쓰게 만들려고 하는가?”라고 한 즉
유주가 대답하기를 “너의 왕은 진흙으로 만든 부처와 같다. 윤수(尹秀), 이정(李貞), 원경(元卿), 박의(朴義), 양선대(梁善大) 등이 백성들을 착취해 내는 것만을 가지고도 군량을 마련하기 충분하다. 그러니 나는 나쁜 신하들을 없애고 삼한(고려)을 다시 바로잡으려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고려사절요
임오 8년(1282), 원 지원 19년
○ 겨울 10월 -----
○ 독로화(禿魯花) 상장군 김흔(金?)을 원 나라에 보냈다.
계미 9년(1283), 원 지원 20년
○ 원 나라에서 속간(束干) 이양무(李良茂)를 보내어 저강(楮?) 3천 정(錠)을 가지고 와서 전함을 건조하는 경비에 쓰게 하였다. 본국 사람 유주(庾?)가 황제에게 아뢰기를, "오랑캐를 시켜서 오랑캐를 치는 것이 중국의 방법이니 고려와 만자(蠻子)로 일본을 정벌하게 하고 몽고군은 보내지 마십시오. 그리고 고려에서 군량 20만 석을 준비하게 하십시오." 하니,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독로화(禿魯花) 김흔(金?) 등이 주에게 말하기를, "너는 검필(黔弼)과 자량(資諒)의 후손이 아니냐. 이렇게도 국가를 무너뜨리고 싶으냐." 하니,
주가 말하기를, "너의 국왕은 흙으로 빚어 만든 부처와 같으니, 윤수ㆍ이정ㆍ원경ㆍ박의ㆍ양선대(梁善大) 등이 백성의 재산을 긁어 모은 것만으로도 군량을 대기에 충분하다. 나는 좌우의 간신들을 제거하고 다시 삼한(三韓)을 바로 잡으려는 것이다." 하였다.
을유 11년(1285), 원 지원 22년
○ 가을 7월에 김흔(金?)이 원 나라에서 돌아왔다. 황제가 소무대장군(昭武大將軍)으로 제수하고 삼주호두패(三珠虎頭牌)를 차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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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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