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안동김씨 詩·書·畵찾기♠ 발표자료 ⑩ (향후추진 및 건의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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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1-26 05:37 조회1,991회 댓글0건본문
내일 모레 발표할 [고려시대 선조 필적과 묘지명을 찾아서] 발표자료를 어렵게 마무리하였습니다. 특히 영환 종친님의 도움이 컸습니다. 조금 전에 게시판을 보니까 항용 종친께서 월남사지 진각국사비를 보고 오시고, 송광사 박물관장 되시는 분도 오신다고 하는데, 이정도 자료로 충분할까 걱정이 됩니다.
아무튼 여러 종친님들의 도움과 우리 게시판에 자꾸 올리면서 정리가 되었습니다. 끝으로 향후 추진할 사항 및 건의사항을 정리하였습니다. 10회에 걸쳐 정리한 자료를 다시 편집하여 20부 준비하여 일요일 아침 7시 기차로 상경하겠습니다.
탁본은 복사하느라고 하긴 했는데 한국금석문대계1권과 금석청완, 그리고 한국금석전문 중세하편에 게재되어 있는 탁본은 준비를 못했습니다. 아무튼 준비된 탁본도 20부 복사하여 지참하겠습니다.
♠先안동김씨 詩·書·畵찾기♠ 발표자료 ⑩ (향후추진 및 건의사항)
Ⅳ. 향후추진 및 건의사항
1. 안동김씨 대종보회 題號를 상사공 필체로
○ 안동김씨 대종회보 題號를 상서공 휘효인 필체를 集子? 하여 인쇄하면 무엇보다도 의미가 클 것임. 기타 다른 문중 인쇄물 발간시 겉표지 書名에 활용하여 주기를 건의함
2.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설명문 정정 요청
○ 전남 강진군청 홈페이지, 문화재청 홈페이지, 월남사지 석비 안내판, 국립광주박물관 등에 있는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설명문을 보면 한결같이 "이규보 撰, 書者 미상"으로 되어 있는데, 이번에 수집된 자료 일체를 위 기관에 보내서 정정하여 주기를 요청함이 바람직
- "월남사지 석비"를 "월남사 진각국사비"로 정정
- "이규보 撰에 추정, 書者 미상"을 "이규보 撰, 김효인 書" 로 정정
3. 고려국대장이안기 찾아 금강산과 중국, 일본에
1306년 민지 撰, 김순 書로 세워진 고려국 대장이안기의 현 소재는 불명이나 江原道 淮(회)陽府 金剛山에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비를 찬한 閔漬라는 분이 금강산 유점사와 장안사에 관련된 기록을 많이 남겼으므로 이곳중 한 곳에 있지 않았나 추측할 수 있으므로, 향후 금강산 답사 기회가 있으면 확인해야 할 것임
참고로 고려국대장이안기는 현재 일본의 정가당문고에 소장되어 있고, 국사편찬위원회에 필사본이 소장되어 있다고 함
또한
문영공 휘순께서 1306년 書하신 <高麗國大藏移安記>는 중국인 주남서 편 <天下同文> 전갑집7에 실려있고
1314년 書하신 <고려국 첨의찬성사 원공 사대장경기>도 중국인 이? 편 <옥금산혜인고려화엄교사지6>에 실려 있다고 하는데 이의 확인작업도 필요하다.
4. 묘지명 번역본 추가 확보
○ 김승용 모지명 실물과 원문, 그리고 김영돈 묘지명 원문은 있는데, 번역본을 확보하지 못했음.
5. 고려묘지 심층분석을 통한 족보내용 수정
1) 족보에는 기록이 없고 묘지명에 새로운 기록이 경우
고려시대의 묘지석들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역사를 들려주기도 하고, 때론 잘못 기록된 역사를 바로잡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정간공 휘영후의 1자 휘천의 아들 4형제인 사겸, 사렴, 사안, 사형의 경우, 사겸과 사렴은 사서나 문집에서 족보에서 행적을 찾아 볼 수 없는데
○ 김사겸은 족보에는 判事를 지내고 배는 한공의의 딸이고 자 瑀는 府使를 지낸 것으로 되어 있다
그의 장인인 [한공의 묘지명]을 보면 <고려묘지명집성 p569-18, 277. 한공의 묘지명>
이 묘지명은 공민왕 14년 (을사, 1365)에 만들어진 것이고, 내용은 목은문고 16에 실려 있는데
여3인 皆先沒 종부령김사겸 삼사우윤이창로 군부판서 염흥방 其壻也
孫남 4인-----
外孫남 金禑權務 여 2인 라는 내용이 있다.
이를 통해서 김사겸이 1365년에 종부령( ) 이라는 벼슬(?품계)을 지내고 있고, 그의 아들 金禑가 권무라는 벼슬을 지내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아들 이름이 족보에는 瑀로, 묘지명에는 禑로 차이가 있다..
○ 김사렴은
족보에는 문하시랑 안렴사를 지내신 것으로 되어 있다
그의 장인인 안원숭의 외조부인, 즉 처의 외증조부인 [김태현 처 왕씨 묘지명]을 보면 <고려묘지명집성 p559-14, 김태현처 왕씨 묘지명>, 이 묘지명은 공민왕7년 (元 지정18년, 1358)에 만들어진 것이고, 광산김씨족보 (전남보성, 1934)에 실려 있는데
長女 適정당문학예문관대제학安牧
孫남 3인-----3次회조 중성시 충용위 호분별장
外孫 남6인 안원숭 군부판서 진현관 -----
外曾孫 남15인----- 여 17인-----적 비서감 김사렴----- 라고 기록되어 있어
김사렴이 1358년 (*28세쯤) 에 秘書監( )이라는 벼슬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김사렴의 1자인 김간은
족보에는 안렴사를 지내고 배는 김회조의 딸로 되어 있다.
그의 장인 김회조의 장인인, 즉 처의 외조부인 [윤해 묘지명]을 보면 <고려묘지명집성 p608-32, 윤해 묘지명>, 이 묘지명은 우왕6년 (경신, 1380)에 만들어진 것이고, 그 내용이 목은문고 18에 실려 있는데,
생 4남2녀-----여 장적 판내부사 김회조 차적 지여흥군사 류원무 손남녀 약간인
내부생 3남4녀 장남왈첨 문하주서 차왈우 차왈분 幼 여적 호군김간 餘皆幼 라고 기록되어 있어
1380년에 김간은 護軍( )을 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족보와 묘지명의 기록이 다른 경우
○ 충렬공 휘방경의 증조 諱의화와 조부 諱민성의 관직을 보면
<안동김씨 족보에>
義和는 위위부 주부 (예부시랑)에 추봉
敏成은 문과, 한림직사관 겸 장치서령을 지내고, 상서 우복야에 추봉 라고 기록되어 있고
<김방경 묘지명 (1300년, 이진 찬)>
曾祖는 사호 벼슬을 지내신 義和요 贈검교 군기감이시고
祖는 장야서승 겸 직사관 敏成이시며 贈은청광록대부 상서우복야이시고
모두 公으로 인하여 추봉된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정리가 필요하고
○ 김승용의 어머니, 즉 충렬공 諱방경의 장자 諱선의 배위는
<안동김씨 족보> 설안의 따님으로
<김승용 묘지명> 설인검의 따님으로 되어 있어,
같은 사람으로 이름이 바뀐 경우인지, 다른 사람인지 정리가 필요하다
3) 족보와 묘지명 중 한 쪽 기록이 누락된 경우
충렬공 諱방경의 사위 기록을 보면
<안동김씨 족보>
1)조변 2)경수 3)권윤명 4)채홍철로 되어 있고 채의는 묘지명을 참고하여 부기하여 놓았고
<김방경 묘지명 (1300년, 이진 찬)>
공의 배위는 기거랑 지제고 朴益旌(박익정)의 따님으로서 3남 3녀를 나셨으니
딸 한분은 참지정사 趙季恂(조계순)의 2자 趙 (조변)에게로 출가하였는데 조변은 봉익대부 부지밀직사사 상장군 전리판서를 지냈다.
둘째 따님은 지첨의부사 金光遠(김광원)의 장남인 조현대부 신호위 보승장군 金元 (김원충)에게로 출가하였고
셋째따님은 통례문사 權允明(권윤명)에게로 출가하였다.
전취 박씨는 공보다 먼저 돌아가시어 또다시 손씨를 再娶하여 딸 한분를 나셨는데
그 따님은 통례문기후 蔡宜(채의)에게로 출가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족보의 경수와 묘지명의 김원충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규명이 필요하다.
6.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주변 출토 墓誌銘에 관심을
아래 열거하는 자료들을 보면 고려시대 墓誌들은 대부분 개성 주변에서 발견되고 있다.
개성주변 연천에 능이 있는 경순왕을 비롯하여 그의 아들인 김은열, 김황 등의 묘지가 개성에서 발견된 바 있고, 충렬공 휘방경의 아들이신 문영공 휘순의 묘도 1942년(임오)에 경기도 개풍군 임계면 가정리 마산의 동쪽 기슭에서 발견된 바도 있습니다.
따라서 경순왕에서 안동으로 이주하기전까지의 선조들(시조 휘숙승과 누락된 대수의 선조 등)의 묘와 충렬공이후 실전된 선조들(김선, 김흔, 김영후 등등등) 의 묘도 개성 주변에 있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충렬공의 부친때부터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고려가 망하는 충렬공의 현손대까지 중앙무대인 개성에서 활동하시고 묻히신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경순왕에서 충렬공까지의 代數문제나 墓위치 문제를 해결할 마지막 남은 방법은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주변에서 출토되는 墓地銘을 발견해서 기록을 얻어내는 방법이 아닐까 한다.
안타깝게도 북한에서 개성주변의 墓 등 고려유적이 도굴꾼들에 의해 초토화되고 있다는 일간지 기사를 보고 마음이 급해졌다.
▣ 허흥식의 [한국금석학의 연구현황과 방향]
국립중앙박물관에는 탁본보다 墓誌의 실물이 현존하고 있다. 墓誌는 일제시에 개성 부근의 고려고분에서 청자가 도굴당하는 과정에서 수습되었으며, 조사과정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본래 장서각에 誌石이 보존되었으니 誌石은 국립박물관으로 서책과 고문서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으로 분리하여 이전되었다.
장서각에 誌石이 보존되었을 시기에 학예관으로 있던 이난영 선생을 중심으로 이를 탁본하여 판독하고 그 결과가 한국금석문추보 (이난영, 한국금석문추보, 중앙대출판부, 1968) 로 간행되었다.
판독을 위하여 제작된 두 질의 탁본에서 한 질은 서울대도서관으로, 다른 한 질은 이화여대박물관에서 수장하였다.
▣ KBS 역사스페셜
○ 마의태자 편
"고려의 귀족들은 대부분 개성을 중심으로 살고 또 죽은 다음에도 예외없이 개성 주변에 묻힌다..경순왕 고려 건국당시라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후대에 볼대 경순왕도 수도 개경을 중심으로 생활하다 묻혀 그래서 무덤도 연천에 묻힌 걸로 생각한다."
○ [고려부인, 염경애] (방송 1999. 6. 19.)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고려시대 묘지석 대부분이 개성과 경기지방에서 출토됐다는 점이다.
무덤의 소재를 파악할 수 있는, 무신정권기 이전의 묘지석 100여개를 조사한 결과, 이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묘지석이 수도인 개경 근처에서 발견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고려의 지배계층은 중앙에 거주함으로써 귀족적 특권을 누릴수 있었다. 중앙을 떠나 지방으로 가는 것은 고려시대 형벌로써 간주되었다 이런 사회적 요인으로 말미암아 고려 귀족들은 살아서도 개성에 살았고, 죽어서도 개경주변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생각되고 있습니다.
▣ 도굴꾼‘우굴’개성(開城)유적 초토화 (2002.01.22, 조선일보)
인구 15만의 도시 개성은 고려의 500년 역사가 숨쉬는 고도이자 북한에서 유물유적이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개성은 곳곳이 벌집 쑤시듯 파헤쳐지는 수난을 당해야 했다.
식량난이 심화되자 전문 도굴꾼은 물론 일반 주민들까지 무덤파기에 나섰다고 한다. 주인 없는 오래된 묘는 물론 개성주변의 묘가 있을 만한 곳은 대부분 파헤쳐지게 된 것이다. 일반인들이 무덤에서 파낸 물건들은 현장에서 100∼500달러를 받고 넘길 수가 있었다.
전문 골동품 장사를 했던 이숙희(38·가명)씨에 따르면 도굴꾼들은 상당한 노하우를 축적하고 있다. 옛날 사대부의 묘는 관을 묻을 때 흙을 채에 걸러 보드라운 흙만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관은 석비레(암석이 풍화돼 생긴 흙)와 생석회를 반죽해 콘크리트 치듯 밀봉하게 된다.
시멘트는 100년 정도 지나면 강도가 약해지지만 석비레는 100년이 지나도 더 굳어지는 특성이 있어 묘지에 안치된 물건들은 거의 원상 그대로 보존돼 있다. 도굴꾼들은 긴 쇠꼬챙이로 땅을 찍어 부드럽게 들어가면 일단 좋은 묘로 판정하며 갑자기 굳은 곳에 쇠꼬챙이가 부딪히면 관이 있는 곳으로 짐작하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무덤이 파헤쳐지는데 주로 수집되는 골동품 가운데는 「고려청자」도 포함돼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 때 만들어진 「백자」는 이에 비하면 값이 떨어진다. 청자 외에도 노리개·부채·병풍·그림 등 옛날 것이라면 모두 거간꾼의 표적이 된다.
이렇게 수집된 골동품들은 신의주를 거쳐 중국으로 빠져나가게 된다. 일부는 평양의 고려호텔 등에서 비밀리에 외국인에게 넘겨진다고 한다. 이렇게 밀반출된 유물들은 주로 일본인들이 수거해 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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