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先안동김씨 詩·書·畵찾기♠ 발표자료 ⑦ (김순처 허씨 묘지명)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2-01-26 00:31 조회2,188회 댓글0건

본문



묘지명-4 김순처 허씨 묘지명



○ 김문영공부인허씨묘지명 병서

○ 연대 : 충숙왕복위년 (원 지순3년 1332)

○ 찬자 : 이제현 撰 (이제현의 부 이진은 1300년에 충렬공 휘방경 묘지명 撰)

○ 소재 : 확인 못함

<참고문헌>

- 익재난고7

- 동문선124 김문영공부인허씨묘지명병서

- 조선금석총람 상 부록 608-609

- 고려묘지명집성 (1993, 김용선, 한림대)







▣ 안동김씨 파보 (안렴, 익원)



齊平君夫人 양천허씨 묘지명 병서 (경기도 안양시 관양동)



부인의 성은 허씨니 중찬 문경공 휘 珙(공)의 둘째 딸이다.

조부는 추밀원부사 휘 遂(수)요

증조는 예빈소경 휘 京이며

어머니(=허공 처)는 윤씨니 정당문학 문평공 克敏의 딸이다.



부인이 나서 부지런하고 침착하니 문경공(=허공)이 가장 사랑하였다.



윤씨의 장일이 곧 乙丑일이라 누구인가 부인의 생년과 맞추어 다시 占을 첨하고 문경공(=허공)이 말하기를 "우리 딸(=허씨)은 뒤에 반드시 복을 누림에 혐의됨이 없으리라" 하고 좋은 사위를 가리되



처가(=윤씨)와 연고가 있는 재상 상락공 문영공 휘 恂을 삼으니 김씨와 허씨는 모두 대성벌족이고 侈富(치부)가 서로 높았다.



부인은 예법을 스스로 지키니 사람들의 間言이 없었고 문영공(=휘순)이 만년에 노래와 기생녀를 즐겼으나 일찍이 질투하는 기색이 없었다.



문영공(=휘순)이 별세한 20년 후인 至順 壬申 7월 辛卯에 병으로 세상을 마치니 무룻 4남 3녀를 낳았다.





<참고로 게재함> 1321년 김순 묘지명

장남 永暾(영돈)은 현재 도관직랑 지합주사로 있고

2남 永暉(영휘)는 현재 흥위위 보승별장으로 있고

3남 斯順(사순)은 삭발하고 중이 되어 慈惠宗 大德이 되었고

4남 永煦(영후)는 사헌부 지평으로 있었다.



장녀는 입내시 중정대부 친어군대호군 鄭(마음심+)責(정책)에게로 출가하고 *안동시 청주정씨

2녀는 대광 상당군 白 正(백이정)에게로 출가하고

3녀는 원나라 좌승상 아홀반의 아들인 사인 별리가불화에게로 출가하였다.





1332년 김순처 허씨 묘지명

장자는 永暾(영돈)인데 봉상대부 전법총랑이요

차자는 永暉(영휘)인에 흥위위 낭장이요

다음은 출가 (속세를 버리고 불승이 됨)하니 이름이 思順이며 慈恩宗 大德이고

다음은 永煦(영후)니 봉선대부 자섬사사이다.



장녀는 대광 청하군 鄭 에게 시집갔는데 먼저 죽었고

다음은 대광 상당군 백이정에게 시집갔고,

막내 딸은 王人 별리가불화에게 출가하였으니 절강성 참지정사라





銘시하여 이르기를



柔順하고 바른 성품 부덕을 갖췄도다



너그럽게 베푼 사랑 慈母의 미덕이다.



오호라 문경공(=허공)은 공명을 본받으니



하물며 그의 자녀 더욱 精明 가상하다



군자로 짝을 지어 仁厚 長壽 하셨으니



내 銘 지은 옛 터전이 영원함을 告합니다.



익재 이제현 찬









▣ 익재난고 제7권 비명 p233



김문영공 부인 허씨의 묘지명 병서

金文英公夫人 許氏의 묘지명 병서



부인의 성은 허씨니 중찬 文敬珙 공(珙)의 둘째 딸이다. 大夫는 추밀원부사 수(遂)요, 曾大父는 예빈소경 경(京)이며, 어머니 윤씨는 정당문학 文平珙의 딸인데 나면서부터 근실하였으므로 문경공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윤씨(=허씨 모)를 사랑하는 날이 곧 乙丑日이었는데, 어떤 사람이 부인(=허씨)이 탄생한 해라 하여 장사 날짜를 개정하자고 청하니, 문경공(=허공)이 이르기를



"나의 이 딸(=허씨)은 뒤에 반드시 복을 누릴 것이니, 혐의(嫌疑)할 것 없다." 하였다.



훌륭한 사위인 故 정승 상락군 文英公 김공 순(恂)을 택하여 시집보냈다. 김씨와 허씨는 모두 大族이라서 사치와 부유함을 과시하는 가문이었으나, 부인은 예법으로 자지(自持)하였으므로 헐뜯는 사람이 없었다.



문영공(=휘손)이 늦게 노래 부르는 기생을 즐겨하였으나 일찍이 질투하는 빛이 없었으며, 문영공보다 12년 뒤인 至順(원 문종의 연호) 3년 (1332) 7월 辛卯日에 병으로 졸하였다.



모두 4남 3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永暾은 봉상시부 전법총랑이요,

둘째아들 永暉는 홍위위 낭장이요,

셋째아들은 出家하여 자은종 대덕이 된 思順이요,

넷째아들 永煦는 봉선대부 자섬사사이며,



첫째딸은 대광 청하군 정책(鄭 )에게 시집갔는데 먼저 죽었고

둘째딸은 대광 상당군 백이정(白 正)에게 시집갔고

막내딸은 王人 별리가불화(別里哥不花)에게 시집갔는데 강절성 참지정사라 한다.





명은 다음과 같다.



유순하고 올바른 부덕을 갖추었고 너그럽고 온화한 모칙(母則)이 아름답도다. 문경공(=허공)에 대하여도 감재(鑑裁)가 매우 분명하였으니, 그 아들을 보살핌에도 더욱 정밀하였으리라. 군자의 배필이 되어 어질기도 했거니와 천수를 누렸으니, 내가 유허(幽墟)에 명을 지어 悠久한 내세에 알리노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