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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화산군 친필에 대한 논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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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 작성일04-11-29 23:04 조회1,327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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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일전에 올렸던글 다시올립니다

동사강목 부록 상권 상

 고이(考異)사마광(司馬光)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지을 때에 뭇 책을 참고하여 그 같고 다른 점을 평하고 취사에 뜻을 두어 《고이(考異)》 30권을 지었으니, 전실(典實)하여 법다운 것만 뽑았다. 이것이 역사를 쓰는 자의 절실한 법이 되기에 이제 그를 모방하여 《동사고이(東史考異)》를 짓는다.

 김주(金澍)의 사실 공양왕(恭讓王) 4년

(1392) 월정(月汀)윤근수(尹根壽)의 문집(文集)에, “주(澍)는 선산인(善山人)이며 호는 농암(籠巖)이다. 공양조(恭讓朝)에 예의판서(禮儀判書)로서 하절사(賀節使)가 되어 황조(皇朝 명(明) 나라를 가리킨다)에 갔다 돌아오다가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러 아조(我朝 조선(朝鮮)을 가리킨다)가 개국(開國)하였다는 말을 듣고 부인에게 편지를 부쳐 이르기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니 내가 압록강을 건너가도 몸을 용납할 곳이 없소. 강에 이르렀다가 다시 중국으로 향한 그 날로 나의 기일(忌日)을 삼을 것이며, 장례한 뒤에는 지문(誌文)과 묘갈(墓碣)을 쓰지 말라.’ 하므로, 자손들은 대대로 전하여 12월 22일을 기일로 삼았으니, 이날은 곧 압록강에서 편지를 발송한 날이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정유년(선조 30 1597) 가을에 일본(日本)을 책봉하는 행차 중 막관(幕官)에 허유성(許惟誠)이란 자가 있어 자칭 선생의 후예라 하면서 선생의 집이 형초(荊楚)인데 딸 셋을 낳았다고 말하니, 허(許)는 곧 그의 사위 중 한 사람이다. 이제 선생의 7대손 유엽(有曄)의 말을 채택하여 유사(遺事)를 찬한다.” 하였고, 또 죽계(竹溪)오운(吳澐)의 《동사찬요(東史纂要)》에도 그를 위해 전(傳)을 썼으니, 대략 윤설(尹說)과 같다.

【안】 명(明) 태조(太祖)의 성절(聖節)이 9월 18일이기 때문에 본국에서 하절사(賀節使)를 보내는 것은 언제나 6월이었다. 《고려사(高麗史)》를 상고해 보아도 다 그러하다. 공양왕(恭讓王) 4년 임신(1392) 6월에 평리(評理) 경의(慶義)과 개성윤(開城尹) 조인경(趙仁瓊) 등을 하절사로 보냈는데, 예의판서 김주의 사실이 없고 또 예의판서는 공양왕 때의 관명(官名)이 아니니 더욱 의심이 간다. 또 김주의 명예와 지위가 이미 나타났고 큰 절의가 이와 같은데, 우리 나라 사람이 하나도 아는 이가 없고 심지어 《여지승람(輿地勝覽)》 등의 책에도 하나같이 볼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개 우리 나라 사람들은 그 선조의 사실에 있어 지나치게 과장하여 그 사실과 어긋나는 것이 있으니, 사가(史家)가 사실을 기록함에 있어 본가 자손들의 사언(私言)만 믿고 기록해서는 안 된다. 하담(荷潭)김시양(金時讓)의 일기(日記)에 변설한 것이 옳기 때문에 지금은 취하지 않고 싶으나, 우리 나라 사람들의 전설이 이미 오랬고 《동사찬요》ㆍ《여사제강》ㆍ《동사회강》 등의 책에 다 기록되었기로 할 수 없이 옛것에 의해 쓴다.

《하담일록(荷潭日錄)》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우리 태조(太祖)가 임신년(1392) 7월 16일에 개국하고 한 상질(韓相質)을 명(明) 나라에 보냈는데, 그 주문(奏文)에, “배신(陪臣)조림(趙琳)이 예부(禮部)에서 보낸 자문(咨文)을 가지고 왔는데 거기에 이른 황제의 말씀이 나라 이름을 무엇으로 고쳤는지 빨리 아뢰어라 …… ” 하였으니, 한상질이 명 나라에 이르기 전에 중국에서는 벌써 우리 나라의 개국을 안 것이다. 한상질의 귀국이 또한 이해였으니, 김주가 중국으로부터 돌아왔다면 어찌 세모(歲暮)에 압록강에 이르러 비로소 아조(我朝)가 개국하였다는 말을 들었을 이치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가 실로 우주에 뻐치는 대절(大節)이라면 또한 어찌하여 수백년이 지나도록 알려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문대(支戴) 등 제공(諸公)은 비록 유명(遺命)을 따라 지갈(誌碣)을 쓰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것이 숨겨 공개하지 못할 일이 아니라면 필시 서로 아는 이를 통해 언급되었을 것인데, 어찌하여 유엽(有曄)에게 와서야 남들이 비로소 알게 되었겠는가? 일본의 책봉이 을미년(선조 28 1595) 겨울에 있었는데, 정사(正使)이종성(李宗誠)은 동래(東萊)왜진(倭陣)에 있다가 이듬해[丙申] 봄에 도망쳐 오고, 부사(副使)양방형(楊邦亨)을 정사로 승격시켰는데 수길(秀吉)은 그 책봉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방형은 병신년(선조 29 1596) 겨울에 돌아왔는데, 유엽은 정유년(선조 30 1597) 가을이라 한다. 10여 년 동안의 일도 호란(胡亂)으로 그 사실이 유실(遺失)되는데, 이와 같은 수백년 전의 일로 어떻게 그 사실을 얻어낼 수 있으랴. 유엽이 어떠한 자인지 알 수 없다. 월정(月汀) 등 제공(諸公)이 그에게 속임을 당한 것이 괴이할 뿐이다. 김응기(金應箕) 시호가 문대(文戴)이다.

 

▶▶상기 간찰은 둘째 딸을 시집보내면서 쓴 간찰임. 선산김씨 농암파 후손(    ) 문의결과,  농암 김주는 딸이 없고 28세에 명나라로 되돌아가서 그곳에서 몰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함.

 

#일찍이 하담 김시양 선조의 하담일록에서 지적한바와같이 논란이 있어왔고순암 안정복 선생께서도 동사강목의 동사고이를 빌어 그 의문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위 내용을 통해보면 선산인 김주는 1392년 압록강에서 발길을 돌려 명나라에 망명(?)하여 3명의 딸을 두고 있는것으로 200여년 뒤에 자손들의 사언에 근거한 내용을 듣고 월정 윤근수가 기록하여 전해옴을 알수있슴니다

여기서는 농암 김주의 역사적 평가에 관한 진 위 여부는 차치하고 딸셋 둔것을 인정한다면 간찰의 작자임을 배제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좀더 시간을두고 명확한 근거를 모아 간찰의 작자를 규명하는 노력이 숙제가될것입니다






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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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머리 속이 점점 복잡해지고 쥐가 날듯.....

김용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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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영윤 대부님 감사함니다.
내가 지난 여름 선산김씨 농암 선생 종회 회장과 직접통화
을 하여 보았는데 편지에 내용을 설명하니 자기네 할아버지
의 글이 아니라 단언 하였고. 군사공파 재갑대부님께 글을 보여 드려던이 글씨체가 고려말 이아니고 이조중엽 것이라
함니다.

김영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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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주회씨 말대로 정말 갈수록 복잡하고 알송 달송 해지는군요
양쪽에서 서로 아니라고하니......이것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