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육우당터 찾기 단서(재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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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4-11-20 07:35 조회1,190회 댓글1건본문
▣ 가보(家譜) 부기(附記) ▣
이 가보(家譜)는 오래 전부터 전하여 내려왔다. 내가 알기엔 몇 권의 책과 시문(詩文) 몇 점이 있었는데 가세(家勢)가 어려워서 관리(管理)에 소홀함이 많아 다 소실되고 단지 가보(家譜) 1권(卷)과 시문(詩文) 1점(點)만 남아있을 뿐이다. 남아있는 가보(家譜)의 내용(內容)이 순한문(純漢文)으로 되어 있어 후손들이 선조의 행장을 알기란 매우 어려워서 1995년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에 번역을 의뢰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신라(新羅) 태보공(太輔公)부터 20대(代)까지는 내용이 너무 방대하여 번역을 생략하고 상락공(上洛公)이신 묘(昴) 20대조 이하만 1년여에 걸쳐 번역을 완성하게 되었다. 이에 늦은 감은 있지만 선조(先祖)들의 발자취를 알게되어 자손(子孫)된 도리로 마음 흐믓하게 생각한다. 1996년 시제(時祭) 때에는 종친(宗親)들에게 배포(配布)되도록 노력(努力)하고 있으니 선조(先祖)들의 행적(行迹)을 잘 숙지하기 바란다.
1996年 8月 30日
鼎字仁字 五代孫 在熙(주1) 삼가씀
(주1) 재희(在熙 ; 1927~ ) : 충렬공(방경) 24세손. 문온공(구용) 20세손으로 현재 문온공파 직제학공계 한 지파인 충북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 상촌의 음성공종회 회장이시며, 문성문화정보(주) 회장이시다.
▣ 육우당구기기(六友堂舊基記) 고조고(高祖考) 추술(追述) ▣
-- 선지(先志)를 기술하여 기록하다 --
대체로 세속(世俗)에서 말하는 후손에게 전할 보배는, 반드시 도덕(道德)을 먼저로 하고 문장(文章)을 다음으로 하고 기업(基業)을 그 다음으로 한다. 도덕·문장은 사람마다 능한 것이 아니요, 믿고 전수(傳守)할 바는 기업인 것이다. 선조 약재(若齋) 선생의 유풍(遺風)과 공훈(功勳)은 려사(麗史)에 드러나, 사람의 이목(耳目)에 환하게 나타나 빛이 나므로 사람으로 하여금 모선생(某先生)의 후예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기업에 있어서는 이에 미치지 못하니, 그 세상에 높다란 것이 무겁고 큰 것이 아니요, 미치지 못하는 것이 가볍고 작은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부터 선조(先祖) 때까지는 3백여년이 지났으므로 사실 계술(繼述)을 잘 하고 선대의 업(業)을 이었다고 말 할 수는 없으나 어느 시골의 어느 언덕이 편히 누워 쉬시던 곳이란 것을 홀로이 모르고 있으니 어찌 한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선생은 려조(麗朝)의 말기를 맞아 곧은 도(道)로 하여 세상에 용납이 어려워 처음에 죽주(竹州)에 유배되었다가 뒤에 천령(川寧)으로 이배(移配)되었다. 천령은 곧 황려(黃驪)의 속현(屬縣)으로서 그곳에 집을 짓고 살면서 ‘六友’라는 액자(額子)를 거니 대체로 그 강산에서 얻는 즐거움과 눈과 달의 희고 깨끗한 뜻을 풍월(風月)을 읊조리는 데에 흥(興)을 붙이고, 꽃을 감상하는데 가슴을 시원하게 하기 곧 소요부(邵堯夫 : 이름은 옹(雍))의 ‘달은 가슴으로 향하고 바람은 얼굴로 부네’라고 한 뜻과 같다. 지금 여러 대(代)를 내려 오면서 그 풍미를 상상하고 그 유편(遺篇)을 외우노라면 존경과 사모하는 마음이 생겨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 같기도 하다. 곧 그 유지(遺址)를 돌아보고 감상(感賞)하면서 갱장(羹墻 : 깊이 사모함)하는 정성을 붙이는 것이 곧 지난 날의 소원으로서 기러기의 발자욱(鴻迹 : 선대(先代)의 자취를 후손이 그대로 밟는다는 의미)이 눈과 진흙에 나타남과 같이 되었으면 하겠으나, 까마득이 바람에 날려 그 만분의 일 만큼 조금이라도 펼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지금 종형(從兄) 시경(始慶, 주2, 주3)씨가 황려(黃驪)에 가서 살면서 우연히 마을 사람과 시사(時事)를 말하게 되었고, 이호(梨湖)에서 한 유지(遺址)를 얻게 되었는데 곧 선조(先祖)께서 선정하여 집을 지었던 곳이다. 지금은 달관(達官) 김모(金某)의 점유가 되었으니 추심(推尋)하여 얻을 수 가 없다. 비록 그러하나 지금 선조께서 노닐던 곳을 분명히 알았으니 그 땅은 마음에서 떠니지 않고 가슴에 차 있을 것이다. 더구나 종형(從兄)이 거주하는 곳과 선조의 고기(古基)가 불과 하루 아침에 다다를 가까운 곳이니, 그 우러르고 탄식하고 또 기뻐하고 느끼는 것이 다른 고을에 견줄 바가 아니다. 아, 지난날 나의 소유(所有)였던 것이 지금은 타인의 소유가 되었으니 오늘 타인의 소유가 후세에 우리집 물건이 되지 않을지 어찌 알겠는가. 무릇 우리 동종(同宗)은 나의 말을 잊지말고 후일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주2) 김시경(金始慶) : 자는 선여(善餘), 호는 만은(晩隱), 1659년(효종11)~1735년(영조11년) 수 77세, 1682년(숙종8)증광시 을과로 급제하고, 정자(正字)·박사(博士)·전적(典籍)·호조정랑(戶曹正郞)을 역임, 1693년(숙종16년) 32세에 보령현감·평안도도사·황해도도사를 거쳐 1712년(숙종38) 54세에 통정대부(通政大夫) 行 종성도호부사, 1716년(숙종42) 58세에 밀양도호부사, 1722년(경종2) 64세에 좌승지(左承旨) 지제교겸경연관(知製敎兼經筵官) 참찬관(參贊官) 춘추관 수찬관(春秋館 修撰官), 1724년(경종4) 형조참의 지제교(刑曹參議 知製敎), 1727년(영조3) 영월도호부사, 1734년(영조10) 우승지(右承旨)를 역임하시다. 문온공파 소개중 경매로 구입한 간찰의 주인공이시다.
(주3) 종형(從兄) : 육우당구기기(六友堂舊基記)는 김시경(金始慶)을 종형이라 부를 수 있는 분이 쓰셨다. 따라서 가보(家譜)를 쓰신 가계를 고려할 때 김시정(金始楨)이 상당하다고 본다. 김시정(金始楨)에 대한 기술은 이어서 소개할 제문(祭文)에서 기술한다. 그리고 당시 달관(達官) 김모(金某)의 소유지가 곧 육우당 터라하니 실오라기 같을지라도 그 단서가 될 것 같다.
《출전 : 가보(家譜)번역판/편집인 김재희(金在熙)/1996. 8.30》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부디 귀한 단서가 되길 빕니다.
▣ 김주회 - 척약재 선조님의 육우당 터 찾기! 곧 결실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이호(梨湖)에서 한 유지(遺址)를 얻게 되었는데 곧 선조(先祖)께서 선정하여 집을 지었던 곳이다.--- 이호는 여주군 금사면 이포 부근 어디인가요? 엊그제 이포 거쳐 흥천을 갔었습니다.
▣ 솔내영환 - 눈이 번쩍 합니다. 가보(번역본)구할 수 있나요?
▣ 김발용 - 좋은 결실 기대해 봅니다.
▣ 김윤만 - 솔내 대부님! 가보 번역본을 구하는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구하지 못하면 저의 형님 보관본을 복사해 드리겠습니다. 기리고 원본은 재희 아저씨께 복사를 부탁드렸습니다.
▣ 김태영 - 귀중한 글 잘 보았습니다. 윤만 대부님 노력, 결실있기를 바랍니다.
▣ 김태서 - 부디 결실있기를 바랍니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달관(達官) 김모(金某)"가 누구인지...그때는 꽤 알만한 인물이었겠죠.
▣ 김정중 - !!!!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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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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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 또 한번 읽으니 새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