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여주군지 제출자료 04---김공량(金公亮, 1472∼1544) 참고자료2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4-10-30 12:55 조회1,411회 댓글0건본문
----------------------------------------
허종(許琮) 김성 처남, 김공량 외삼촌
1434(세종 16)∼1494(성종 25).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종경(宗卿)·종지(宗之), 호는 상우당(尙友堂). 군수 손(蓀)의 아들이며, 좌의정 침(琛)의 형이다.
1456년(세조 2)에 생원시를 거쳐, 1457년 별시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여 의영고직장 겸 세자우정자(義盈庫直長兼世子右正字)가 되고, 1458년에 군기시직장 겸 세자우정자가 되었다.
1459년 언로를 개방하고, 이단을 물리치고, 경연을 열 것 등을 상소하여 세조의 신임을 얻으면서 선전관을 겸하였으며, 그해 지평 이영은(李永垠), 승문원부교리 정효상(鄭孝常) 등과 함께 사가독서의 혜택을 받았고, 이어 통례문봉례랑 지제교 세자좌정자(通禮門奉禮郎知製敎世子左正字)가 되었다.
1460년 여진족의 침입 때 평안도병마절제사도사로 출정하였고, 돌아와서 성균관주부·예문관봉교를 거쳐 이듬해에 형조도관좌랑이 되었다.
그뒤 함길도도사·사간원정언·함길도경차관·훈련원판관을 거쳐 1465년에 성균관사예에 오르면서 평안·황해·강원·함길도체찰사 한명회(韓明澮)의 종사관이 되어 북변경영에 공헌하고,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1466년 함길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나 아버지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가, 이듬해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계기로 기복(起復)되어 조석문(曺錫文)·강순(康純)·어유소(魚有沼)·남이(南怡) 등과 함께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헌하여 적개공신 1등에 책록되고 양천군(陽川君)에 봉하여졌다.
1469년(예종 1)에 평안도관찰사·전라도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대사헌에 오르고, 그 이듬해 병조판서가 되었다.
1471년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1472년 생질 김공량 생
그뒤 지중추부사·판중추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을 거쳐 1477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이해 10월 건주위(建州衛)여진족이 침입하자 평안도순찰사로 파견되어 이에 대비하였고, 이듬해 의정부좌참찬이 되었다가 할머니상으로 사직하였다.
1481년 환조(還朝)하여 북변방어를 위한 〈평안도연변제읍적로요해산천험이도 平安道沿邊諸邑賊路要害山川險易圖〉를 제작하여 올리고 호조판서가 되었으며, 이듬해 임원준(任元濬) 등과함께 《소문충공집 蘇文忠公集》을 주해(註解)하고 우찬성이 되었다.
1483년에는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하였고, 세조비 윤씨의 국상 때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가 되었으며, 서거정(徐居正)·노사신(盧思愼)·어세겸(魚世謙)·유순(柳洵)·유윤겸(柳允謙) 등과 함께 《연주시격 聯珠詩格》·《황산곡시집 黃山谷詩集》을 언해하였다.
1485년에 어머니상으로 사직하였고, 1487년에 기복되어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이듬해에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과 부사 왕창(王敞)의 원접사·반송사로 활약하고 병조판서가 되었다.
1489년 강원도축성사로 파견되어 축성·병기를 고험하고 곧 영안도관찰사가 되었다.
1491년 여진족 우디거(兀狄哈)가 함길도방면으로 침입하자, 북정도원수(北征都元帥)가 되어 이를 격파하고, 그 이듬해에 우의정에 올랐다. 문무를 겸전하여 국방과 문예에 큰 공을 남겼고, 의학에도 조예가 깊어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를 겸대하면서 중종 때의 명의인 김순몽(金順蒙)·하종해(河宗海) 등을 교회(敎誨)하였다.
그리고 서거정·노사신 등과 함께 《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을 언해하였으며, 윤호(尹壕) 등과 《신찬구급간이방 新撰救急簡易方》을 편찬하였다. 성종조의 청백리로 녹선되었다.
문집으로는 《상우당집》이 있고, 편서에는 《의방유취 醫方類聚》를 요약한 《의문정요 醫門精要》가 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허종의 문하생 김순몽(金順蒙)은
생몰년 미상. 조선 중종 때의 의원.
허종(許琮)의 문하생으로 1516년(중종 11)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가 되었으며, 1517년에는 대비이어소(大妃移御所)의 시약의원(侍藥醫員)이 되고, 당상벼슬에 올랐다.
명의로 알려지고 종기치료에 정통하였으므로 1519년 3월에는 진주까지 파송되어 진주군 강혼(姜渾)의 대퇴부에 생긴 종기를 치료한 공으로 판관(判官)에서 당상의관(堂上醫官)의 서품을 받았다.
1525년에는 행부호군직(行副護軍職)에 있으면서 유영정(劉永貞)·박세거(朴世擧) 등과 함께 《간이벽온방 簡易#벽20瘟方》을 편찬하였다.
※《간이벽온방 簡易#벽20瘟方》은 김희수가 서하였다.
허손-허종의 아들 허광(許?) 김공량 외종4촌
연산군(燕山君)12년(1506년) 별시(別試) 정과13(丁科13), 부윤&(府尹&), 양청,정국공신/제양군(襄淸,靖國功臣/齊陽君)
허손-허종-허확의 아들 허항(許沆)
1513(계유) 진사시, 중종(中宗)19년(1524년) 별시(別試) 병과15(丙科15), 호당&(湖堂&), 이조/참판&(吏曹/參判&)
허손-허종-허확의 아들 허흡(許洽)
1507(정묘) 진사시, 중종(中宗)8년(1513년) 식년시(式年試) 병과20(丙科20), 찬성&(贊成&)
허손의 아들, 허종(許琮)의 동생 허침(許琛) 김공량 외삼촌
1444년 생, 1462(임오) 진사시, 성종(成宗)6년(1475년) 친시(親試) 을과2(乙科2), 좌의정%(左議政%), 호당&(湖堂&), 문정,청백리(文貞,淸白吏)
허손-허침의 아들 허굉(許?) 김공량 외종4촌
1471년 생, 1492(임자) 진사시, 연산군(燕山君)9년(1503년) 별시(別試) 3(3), 찬성&(贊成&), 한림&(翰林&)
허손-허침-회굉의 아들 허경(許坰)
중종(中宗)31년(1536년) 친시(親試) 갑과1(甲科1), 수찬&(修撰&)
허손의 외손자 홍경주(洪景舟) 김공량 이종4촌
연산군(燕山君)7년(1501년) 식년시(式年試) 병과6(丙科6), 찬성&(贊成&), 도열,정국공신/남양군(度烈,靖國功臣/南陽君)
허손의 외손자, 홍경주(洪景舟)의 동생 홍경림(洪景霖) 김공량 이종4촌
중종(中宗)5년(1510년) 식년시(式年試) 병과2(丙科2), 공조/판서&(工曹/判書&), 정국공신/익원군(靖國功臣/益原君)
허손의 외손자 박억년(朴億年) 김공량 이종4촌
박억년(朴億年)
1455(세조 1)∼1496(연산군 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기옹(耆翁). 첨지중추부사 임종(林宗)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증영의정 허손(許蓀)의 딸이다.
1474년(성종 5) 사마시에 합격하고, 1489년 동생 조년(兆年)과 함께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이어 예조좌랑·수찬·교리 등을 거쳐 예조정랑이 되었는데, 이때 소릉(昭陵)의 부묘(#부44廟)에 대한 이론이 일어나 의견이 구구할 때 홀로 부사(#부44祀)가 합당함을 역설하였다.
성격은 기국이 넓어 모가 나지 않았으며, 일에 임하여서는 매우 강직하여 한번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끝까지 밀고 나갔다.
허손의 외손자, 박언년의 동생 박조년(朴兆年) 김공량 이종4촌
1459년 생, 1486(병오) 생원시, 성종(成宗)20년(1489년) 식년시(式年試) 병과13(丙科13), 이조/좌랑&(吏曹/佐郞&)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