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백범선생님은 익원공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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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1-11-29 18:06 조회2,862회 댓글0건본문
먼저 본 홈을 방문하신데 대하여 환영합니다.
질문하신 백범 김구선생님은 우리 안동김씨 15개 파중에서
익원공파 후손이십니다.
충렬공(김방경)-문영공(김순)=상락후공(김영후)-영삼사공(김천)-익원공(김사형)
자세한 겻은 본 홈 안동김씨 소개중 역사적 중요인물을 참조하세요
김 구(金 九) 1876(고종13)∼1949.
독립운동가, 정치가. 아명(兒名)은 창암(昌巖), 초명은 구(龜)·창수(昌洙), 호는 백범(白凡), 초호는 연하(蓮下), 순영(淳永)의 아들. 황해도 해주(海州)출신. 15세에 학자 정문재(鄭文哉)에게 한학을 배웠다.
1893년(고종30) 동학(東學)에 입교, 접주(接主)가 되고, 이듬해 팔봉도소 접주(八峰都所接主)에 임명되어 해주에서 동학혁명(東學革命)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1895년 만주로 피신,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입단했다. 이듬해 귀국하여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는다 하고 일본 육군 중위 쓰찌다를 살해,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령으로 감형되었다.
복역중 1898년(광무2) 탈옥, 충남 마곡사(麻谷寺)의 중이 되었다가 이듬해 환속(還俗)하고 1903년(광무7) 기독교에 입교했다. 1909년(융회3) 안악(安岳) 양산학교(楊山學校) 교사로 있다가 이듬해 신민회(新民會)에 참가했으나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피체, 종신형(終身刑)을 선고받고 복역중에 감형(減刑)으로 1914년 출옥,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 농장 농감(農監)이 되어 농촌을 계몽했다.
3·1운동 후 상해로 망명, 상해 임시정부 경무국장·내무총장·국무령(國務領)을 역임하면서 1928년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과 한국 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 당수가 되어 항일 무력 활동을 지휘했다.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 등의 의거(義擧)를 지휘하여 60만원의 현상이 붙은 채 일본의 감시망을 뚫고 상해를 탈출, 가흥(嘉興)으로 갔다. 1933년 남경(南京)에서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와 대일 전후 방책을 협의, 1935년 한국 국민당(韓國國民黨)을 조직했으며, 1940년 임시정부를 중경(重慶)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했고,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조직하여 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을 임명하였다. 1944년 임시정부 주석(主席)에 선임되었고, 1945년에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는 한편 광복군 낙하산 부대를 편성하여 훈련을 실시하다가 8·15 해방으로 귀국하였다. 모스크바 삼상회의(三相會議) 성명을 반대하여 반탁운동(反託運動)을 전개했다. 대한독립촉성 중앙협의회 부회장·민주의원(民主議院) 부의장·민족통일 총본부 부총재 등을 지내며 극우파(極右派)로서 활약했다.
1948년 남한에서만의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UN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 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南北協商)을 제창, 북한에 가서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정부 수립에 참가하지 않고 중간파(中間派)의 거두로 있다가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했다. 국민장으로 효창 공원에 안장,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김희윤 wrote:
: 학교 과제로
:
: 김구선생님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있어서
:
: 여기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
: 홈페이지에 있는 많은 자료들을 보다가
:
: 궁금한 것이 생겼는데요,
:
: 김구 선생님은 어느파 이신가요..
:
질문하신 백범 김구선생님은 우리 안동김씨 15개 파중에서
익원공파 후손이십니다.
충렬공(김방경)-문영공(김순)=상락후공(김영후)-영삼사공(김천)-익원공(김사형)
자세한 겻은 본 홈 안동김씨 소개중 역사적 중요인물을 참조하세요
김 구(金 九) 1876(고종13)∼1949.
독립운동가, 정치가. 아명(兒名)은 창암(昌巖), 초명은 구(龜)·창수(昌洙), 호는 백범(白凡), 초호는 연하(蓮下), 순영(淳永)의 아들. 황해도 해주(海州)출신. 15세에 학자 정문재(鄭文哉)에게 한학을 배웠다.
1893년(고종30) 동학(東學)에 입교, 접주(接主)가 되고, 이듬해 팔봉도소 접주(八峰都所接主)에 임명되어 해주에서 동학혁명(東學革命)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1895년 만주로 피신,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입단했다. 이듬해 귀국하여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는다 하고 일본 육군 중위 쓰찌다를 살해,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령으로 감형되었다.
복역중 1898년(광무2) 탈옥, 충남 마곡사(麻谷寺)의 중이 되었다가 이듬해 환속(還俗)하고 1903년(광무7) 기독교에 입교했다. 1909년(융회3) 안악(安岳) 양산학교(楊山學校) 교사로 있다가 이듬해 신민회(新民會)에 참가했으나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피체, 종신형(終身刑)을 선고받고 복역중에 감형(減刑)으로 1914년 출옥,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 농장 농감(農監)이 되어 농촌을 계몽했다.
3·1운동 후 상해로 망명, 상해 임시정부 경무국장·내무총장·국무령(國務領)을 역임하면서 1928년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과 한국 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 당수가 되어 항일 무력 활동을 지휘했다.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 등의 의거(義擧)를 지휘하여 60만원의 현상이 붙은 채 일본의 감시망을 뚫고 상해를 탈출, 가흥(嘉興)으로 갔다. 1933년 남경(南京)에서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와 대일 전후 방책을 협의, 1935년 한국 국민당(韓國國民黨)을 조직했으며, 1940년 임시정부를 중경(重慶)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했고,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조직하여 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을 임명하였다. 1944년 임시정부 주석(主席)에 선임되었고, 1945년에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는 한편 광복군 낙하산 부대를 편성하여 훈련을 실시하다가 8·15 해방으로 귀국하였다. 모스크바 삼상회의(三相會議) 성명을 반대하여 반탁운동(反託運動)을 전개했다. 대한독립촉성 중앙협의회 부회장·민주의원(民主議院) 부의장·민족통일 총본부 부총재 등을 지내며 극우파(極右派)로서 활약했다.
1948년 남한에서만의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UN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 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南北協商)을 제창, 북한에 가서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정부 수립에 참가하지 않고 중간파(中間派)의 거두로 있다가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했다. 국민장으로 효창 공원에 안장,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김희윤 wrote:
: 학교 과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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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선생님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있어서
:
: 여기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
: 홈페이지에 있는 많은 자료들을 보다가
:
: 궁금한 것이 생겼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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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 선생님은 어느파 이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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