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렴사공파 ⑨ (괴산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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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1-10-25 17:13 조회2,180회 댓글0건본문
안렴사공파 ⑨ (괴산군,증평)
충북 괴산군에서 발간한 [괴산군지]에 게재되어 있는 안렴사공 김사렴의 후손과 관련된 자료를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괴산군지, 1990>
김세달(金世達) (1625-1674) ⇒ 안렴사공파 (문과, 김언) 참조
▣ 김구석(金龜錫) (1684-1774) ★청안사마소
▣ 경모재(敬慕齋)
▣ 김의로(金義路) (1764-1848) 士廉의 14세손이며 煥極의 아버지
▣ 김만협(金萬協) 士廉의 후손이며 天海의 아들
▣ 김만협(金萬協) 효자각
▣ 김욱, 김직, 김?, 김? (金稶·金稙·金 禾+ ?·金 禾+遂) 萬協의 아들들
▣ 김일(金溢) (1719∼ ?) 萬協의 5세손
▣ 김환극(金煥極) 士廉의 14대손
▣ 김환극(金煥極)부부 효비각
▣ 김락춘(金洛春) 士廉의 후손이며 琦의 손자
▣ 김락신(金洛新) 洛春의 아우
▣ 김호구(金好九) 士廉의 17대손
▣ 김태룡(金泰龍) (1905-1972) 士廉의 후손이며 龍會의 아들
▣ 김재철(金在喆) (1907-1933)
▣ 김사달(金思達) (1924-1984)
?안렴) ▣ 김태희(金泰熙) (1816-1898) 方慶의 후손
?안렴) ▣ 김호묵(金浩默) 在璇의 아들
?선안동) ▣ 김의경(金義卿) (1936- )
▣ 김구석(金龜錫) (1684-1774)
<괴산군지, 1990>
자는 聖應, 호는 樂樂窩(낙낙와), 본관은 안동으로 괴산군 증평읍 남하리에서 출생했다.
1725년 (영조1)에 진사가 되었으며, 1728년 양치도가 난을 일으키자 창의하여 토적하였는데 오히려 적신의 무고를 입어 어전에서 국문을 받게 되었으나, 그의 이치가 정연하고 언사가 명백하므로 왕이 잘못이 없음을 특?하고 恩顧(은고)를 내렸다.
이조판서가 그를 가리켜 이 사람이 진실로 鄕曲의 사대부라 하고 찬찬하여 기용코자 하였으나 연로함으로 사양하고 고향으로 退休하였다.
죽은 후에 통훈대부 군자감정에 증직되었다.
문헌 괴산군지
<사마방목>
김구석(金龜錫) / 英祖 01 增廣 生員
【시험년도】 영조(英祖) 01 (1725) 증광(增廣) 생원(生員)
【합격등위】 3등 0034
【본인성명】 김구석(金龜錫)
【본인 자】 성응(聖應)
【본인생년】 갑자(甲子) 1684
【본인본관】 안동(安東) 김(金)
【본인거주】 청안(淸安)
【본인구존】 영감하(永感下)
【본인전력】 유학(幼學)
【부친성명】 김인(金寅)
【부친관직】 /학생(學生)
【생부성명】 김보(金寶)
【생부과거】 생원(生員)
【생부구존】 구경하(具慶下)
【안항(제)】 김인석(金麟錫), 김기석(金麒錫)
<괴산 증평 남하리 금반부락 내력비>
---(전 략)---
이 부락의 인물을 열거하면
청안사마소 (생원 진사가 모여서 공부하던 곳)에 배향된 학자로서는 생원 김명용씨, 김주씨, 김보씨, 김구석씨가 계셨고,
진사로서는 고명하신 학자 김기필씨와 금부도사(경찰청 관리) 김오씨, 사복시정(군마를 관장한 관리) 김희석씨, 좌승지(청와대 비서관) 김여구씨, 호조참판(재무부차관) 이며 효자이신 김의로씨, 돈영부사(임금님의 종친들을 관장하던 부서의 관리)이며 효자이신 김환계씨와 열녀 김학수의 처 나주김씨가 계셨고,
▣ 경모재(敬慕齋)
<괴산군지, 1990>
경모재는 1700년대에 증평읍 남하리 서당마을에 세운 안동김씨 문중의 재실로 지었다고 하며 한때는 서
당으로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건물은 정면7칸 측면1칸반 맛배지붕 목조기와집이다.
▣ 김의로(金義路) (1764-1848)
<괴산군지, 1990>
자는 正甫(정보), 본관은 안동으로 고려 안렴사 오은 김사렴의 14세손이며 효자 김환극의 아버지이다.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계모를 섬김에 있어 친모나 조금도 다름없이 효성으로 받드니 계모 또한 자기가 낳은 자식과 다름없이 사랑하였다.
부모상을 당하여 애통함이 극진하였으며 예를 벗어남이 없었고 자녀들을 거느림에 있어서도 항상 자기 스스로가 먼저 모범을 보여 성실하고 법도있는 가풍을 이룩하였다.
향토 사림이 여러번 그의 특행을 증천하였고, 1887년 (고종29)에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로 증직되었다.
그의 사당과 묘소는 괴산군 증평읍 남하리에 있고, 묘 옆에는 신도비가 있다.
문헌 : 괴산군지
▣ 김만협(金萬協)
<괴산군지, 1990>
字는 世珍, 安東金氏 按廉使公 金士廉의 후손이며 金天海의 아들이다. 벼슬은 朝奉大夫 童蒙敎官으로 부모에게 효행을 다하여 칭송이 자자했다.
부친이 나이가 들어 병석에 눕게 되었다. 평소에도 효성이 지극한 그는 효성이 다하여 동분서주하며 온갖 약을 구하여 써보았으나 백약이 무효로 임종이 가까워졌을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부친의 입에 넣어드렸다. 천우신조하여 효성이 지극한 탓인지 5일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부친상을 당하여 20리 떨어진 괴산읍 질골에 묘를 정하고 예법에 따라 3년간의 복상동안은 한서풍우를 불문하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묘하였으며, 3년 죽을 먹으며 지냈다 한다.
3년간 성묘 다니는 동안 하루는 묘소근방의 산에 불이 일어나 부친의 묘소가지 번져왔다. 너무나 놀란 그는 옷을 벗어 물을 적셔서 있는 힘을 다하여 불을 껐다. 그후 화상과 화기를 마셔 병을 얻게되어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숙종조에 괴산군 문광면 신기리에 정려문이 세워졌다.
문헌 : 괴산군지
▣ 김만협(金萬協) 효자각
<괴산군지, 1990>
김만협 효자각은 숙종18년 (1692)에 문광면 신기리에 부친이 위독할 때 손가락을 짤라 피를 먹여 연명케 하고 돌아가시자 20리 떨어진 묘소로 3년간 성묘를 다니어 군수가 정려를 여러번 상신한 효자 김만협 (1640-1693)의 정려로 세웠는데 이 효자각 안에는
김공만협지려
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건물은 정면2칸, 측면1칸의 맛배지붕 기와집이며 보호철책을 둘렀다.
▣ 김욱, 김직, 김?, 김? (金稶·金稙·金 禾+ ?·金 禾+遂)
<괴산군지, 1990>
본관은 安東, 金萬協의 아들들로서, 모두 부모를 위하여 誠孝가 독실하여 旌閭했다.
문헌 : 괴산군지
<사마방목>
김직(金稙) / 英祖 17 式年 生員
【시험년도】 영조(英祖) 17 (1741) 식년(式年) 생원(生員)
【본인생년】 을유(乙酉) 1705
【본인거주】 경(京)
【부친성명】 김성함(金聖涵)
【안항(형)】 김욱(金稶), 김추(金秋), 김거(金)
【안항(제)】 김정(金程)
▣ 김일(金溢) 1719∼ ?
<괴산군지, 1990>
字는 益三, 본관은 安東 金萬協의 5세손이다. 효자 가문에 태어나 효성이 지극하였다.
늘 부모곁에서 부모님을 지켰고 조석으로는 잠자리를 살피어 문안드렸으며, 부모가 병환이 있으면 지성으로 약을 달여드렸다.
나이 13세에 모친이 오랜 병환으로 신음하며 백약이 효험이 없자 마지막으로 산제를 베풀어 3개월 동안 하루같이 험한 산길을 왕래하며 산신에게 기도를 드렸더니 지성이 감천하여 모친의 병환이 나았다고 한다.
가세가 청빈하여 어머니 봉양이 어려워서 마을의 제사집을 다니며 음식을 얻어다가 공양하는 등 효성이 지극했다.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에서 수일간 머무르게 되었는데 하루는 어머니가 병환이 들어 자기를 부르고 있는 꿈을 꾸어 심상치 않아 과거를 포기하고 황급히 돌아와 보니 과연 노모가 병석에 누어 있었다. 지성으로 간호하여 치유케 하고, 천수를 다하여 죽으니 10리 밖에 장사하고 궤연에서 잠을 자며 풍우한서를 무릅쓰고 3년동안을 하루같이 시묘하였다.
문헌 : 괴산군지
▣ 김환극(金煥極)
<괴산군지, 1990>
본관은 安東, 按簾使 金士廉의 14대손으로 증평읍 남하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의 마음을 항상 기쁘게 해드리며 겨울에는 저녁에 이부자리를 펴놓고, 들어가 따뜻하게 하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부모님의 의복을 입어 체온으로 따뜻하게 하는 일을 하루도 빼놓지 않았다.
부모님께서 병환으로 눕게 되자 변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아 병증세를 파악하고 백방으로 약을 구해 썼다. 비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휘몰아쳐도 하루도 빠짐없이 얼음물로 목욕하고 하늘에 기도 드렸으나 급기야 상을 당하니 지극히 애통해하였다. 3년간 시묘하였는데 죽은 후에 嘉善大夫 戶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의 증직을 받았다.
문헌 : 괴산군지
▣ 김환극(金煥極)부부 효비각
<괴산군지, 1990>
김환극효비각은 1972년 증평읍 남하리 솔모루 마을에 효심이 지극한 김환극과 그의 처 광산김씨를 기리어 효비각을 세웠는데, 건물은 정면1칸 측면1칸 맛배지붕 목조기와집이며 효비각 안에 있는 효비의 비문은 1958년에 성균관장 최찬익이 짓고 글씨는 괴산군수 이길원이 썼다.
안동김공휘환극 유인광산김씨효비
---(생략)---
▣ 김락춘(金洛春)
<괴산군지, 1990>
字는 聖團, 본관은 安東 按廉使 金士廉의 후손이며 募梧齋 金琦의 손자이다.
▣ 김락신(金洛新)
<괴산군지, 1990>
字는 命汝, 洛春의 아우이다. 가세가 극빈하여 근검 노력으로 노부의 구미에 맞는 음식과 몸을 편하게 할 의복을 마련하기에 힘쓰더니 연로한 부친이 병이 위중하자 자신도 육순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수개월동안 잠시도 병석을 떠나지 않고 시탕하며 병간호에 정성을 기울였다.
부친상을 당하여 여러 동생들을 거느리고 상례를 다하며 4년을 하루같이 성묘했다.
문헌 : 괴산군지
▣ 김호묵(金浩默)
<괴산군지, 1990>
자는 孟起, 본관은 안동 金在璇의 아들이다.
어릴때부터 효성이 根天하였으나 가세가 청빈하여 끼니를 이을 수 없어 남의 집 머슴살이로 겨우 지체를 함께 봉양하였으며 아버지가 항상 술을 즐기므로 하루 한차례 꼭 진공하니 진흥회에서 포상하였다.
문헌 괴산군지
▣ 김호구(金好九)
<괴산군지, 1990>
본관은 安東, 按簾使 金士廉의 17대손으로 부모를 봉양함에 지성이 극진하였다.
일찍이 서울에 과거시험을 보러가던중 아버지의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집으로 돌아오는데 잡초속 팻말에 「藥劑」라 써 붙여 있으므로 행여나 하고 뜯어가지고 돌아와 시탕하여 드리니 차도가 있었다.
또 다시 병이 위증하여 생선을 해드리고자 연못가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 있었는데 홀연히 한 마리의 뱀이 무엇을 물고 물속에서 나와 그가 앉은 자리 위에 놓고 가므로 괴이히 여겨 그 물건을 시탕해 드렸더니 효험이 있었다. 노환으로, 병이 위중하게 되자 변을 맛보고 단지 주혈하였으나 천수를 다하여 상을 당함에 3년동안 여막살이를 하고 소식하며 머리를 빗지 않았다.
문헌 : 괴산군지
▣ 김태룡(金泰龍) (1905-1972)
<괴산군지, 1990>
자는 韓雄, 호는 龍+耳 世이며 본관은 안동으로 안렴사 김사렴의 후손이며 金龍會의 아들이다.
천성이 너그럽고 기개가 강직하여 士友들의 경모를 받았으며 일찍이 개화에 눈을 떠 지역내에 후학들이 교육할 학교가 없어 자라나는 학동들이 배우지 못하고 있는 점을 묵과할 수 없어
사리면 梨谷里에 사는 이태호씨를 찾아 논의하고 사재 1백석지기를 희사하여 이태호씨가 희사한 대지 1,220평 위에 3개의 교실을 신축하여 학교를 세웠다.
육영사업에도 공헌했으며, 그는 종사랑전위참봉으로 괴산향교 전교를 지냈다.
그의 덕행과 인망은 유림인들의 추앙을 받았다.
후에 禾谷초등학교 동창생 일동과 지방유지들이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송덕비를 학교앞에 세웠다.
문헌 송덕비문
▣ 김재철(金在喆) (1907-1933)
<괴산군지, 1990>
김재철은 본관은 안동, 호는 蘆汀(노정)으로 1907년에 괴산군 청안면에 출생하여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1931년 경성제국대학 문학과를 졸업하고 평양사범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1933년에 사망했다.
그의 학문적 업적으로는 국어학 분야로 "palatalization에 대하여"와 "조선어化의 조선어"라는 논문과 국문학분야로 "조선연극사"와 "노정잡고"라는 저서가 있는데, 이중 "조선연극사"는 이 방면의 고전으로 꼽히고 있다.
문헌 : 김태준, "노정 김재철선생소전"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 국어국문학사전
▣ 김사달(金思達) (1924-1984)
<괴산군지, 1990>
수필가, 청천 태생, 호는 西峰, 독학으로 전문의 시험에 합격하고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수도의과대학 교수를 거쳐 박애의원 원장을 지냈다.
1952년부터 수필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김사달수필집(1954), 소의사 낙?(1964), 졸장부와 대장부(1979), 인생과 건강(1982), 멋의 의미(1982) 등 많은 수필집을 발간했고
한국문인협회원, 백인문학회 간사, 수석회 수필동인으로 제1회 한국수필문학상을 수상했다.
▣ 김태희(金泰熙) (1816-1898)
<괴산군지, 1990>
자는 聖友. 본관은 안동으로 충렬공 김방경의 후손이다.
1852년(쳘종3)에 무과에 급제하여 첨사, 공주營將을 역임하였다.
그의 네아들 모두 무신이었으니,
장남 龍源은 1880년(고종17) 증광무과에 급제하여 사천현감이 되었고
이남 弼源은 1882년(고종19) 무과에 급제하여 오위장이 되었으며
삼남 應源은 1881년(고종18)에
사남 宗源은 1882년(고종19)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옛날 어느 도승이 서면(사리면) 普坪(보평)은 김영장의 세거지가 되리라 예언하였다는 전설이 그대로 부합하였다.
묘는 괴산군 청안면 장암리에 있다.
문헌 괴산군지
▣ 김의경(金義卿) (1936- )
<괴산군지, 1990>
희곡작가, 문광면 태생, 서울대학교를 거쳐 미국 블랜다이스 대학원에서 수학하고 극단 현대극장 대표로 활약했다.
1964년 문학춘추에 장막극 갈대의 노래, 단막극 신병후보생으로 문단에 진출하였으며
저서로 1976년 세계신경향희곡선(1976), 희곡집 남한산성(1976), 역편서 연극론 12장(1979)등이 있으며
한국연극협회 이사, ITI 한국본부 부회장, 국제아동청소년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고, 한국일보가 제정한 한국영화 TV예술상(희곡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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