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地순례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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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1-10-06 03:43 조회2,278회 댓글0건본문
姓地순례 ②
추석연휴 기간이 길다보니 너무 무료하여 연휴가 끝나는 10월 3일 무작정 집을 나섰습니다.
▣ 충남 천안시 병천면 송정2리 (복다회리)
아침일찍 청주시내를 빠져나와 청주공항에서 오창과학산업단지를 관통하는 시원스런 6차선 도로를 따라 가다가 청주-병천간 도로에서 좌회전해서 병천으로 향했다. 오창과 병천 경계를 막 지나 송정리 (복다회리)를 지나쳤다.
복다회리는 우리 홈페이지 관리자이신 항용 종친께서 지난번에 소개한 바와 같이 (제학공파) 김상철 종친께서 사시는 곳이고 안동김씨가 많이 살고 계신 세거지이다.
⊙ 항용종친 소개자료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충남 천원군 병천면으로 향했습니다. 송정2리(일명 복다회리)에 살고 계신 한학자요, 한시인으로서 지난 1988년 韓中日 3국의 한시 백일장에서 장원하여 우리나라와 우리 安金을 빛내신 상철(相喆. 84세. 제학공파 통덕랑 후손) 어르신을 문병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동네 입구에는 장원하신 자랑스런 시비(시 제목:晩秋)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댁을 방문해 보니 뇌졸중으로 인해 말씀이 어눌하시고 수족이 불편하신 상태이셨으며, 아드님(호응씨)께서 정성어린 간병을 하고 계셨습니다. 이어 이미 출간하신 시집(松堂集) 외에 그 후에 집필하신 시들을 보고 복사 요청을 한 뒤 쾌유를 빌고 떠나 왔습니다.
▣ 경기 이천시 율면 본죽리
병천을 지나 독립기념관이 있는 목천 입구에서 천안 북면가는 길로 우회전해서 한적한 시골도로를 달려 경기 안성 서운면에 도착하였다. 포도농장(오하농장)을 물어물어 찾아가서 포도 한 상자를 사서 차에 싣고 안성시내에 진입해서 안성-장호원간 도로를 달렸다.
안성 죽산, 일죽을 지나 이천 율면 소재지인 고당리를 지나 율면 본죽리에 도착해서 동네 분들에게 물어 (안렴사공파) 문단공 김주 선생의 사당을 구경하고 나무 그늘에서 동네 아이들과 쉬었다. 안동김씨 정려각을 찾고자 했으나 정려각은 없고 새로 지은 재실만 있어서 약간은 서운했습니다. 동네 아주머니 말씀이 본죽리 1,2,3구에는 안동김씨가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문단공 김주 선생과 관련된 기록을 찾아 보았습니다.
⊙ 대종회보 제62호 (1998. 10)
안동김씨 수백년 世居阡(세거천)
-부회장 斗會
경기도 이천시 율면 本竹里는 우리 안동김씨 안렴사공파 문중의 집성촌이다. 이 곳에 우리 안동김씨가 정착하게 된 것은 충렬공 현손 안렴사공 휘士廉의 7대손인 휘澍(주) 광국공신 화산군의 葬儀(장의)를 여주군 흥천면 歸白里에 모시고 이천시 율면 본죽리에 不 之位(부조지위)를 명받아 祠堂(사당)을 建竪(건수)함으로 이때부터 우리 안동김씨의 세거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면 화산군 휘주의 행장을 약기해 본다.
공의 자는 應林이요 호는 寓菴이니 안렴사공의 7대손이요 안원군 휘公亮의 셋째 아드님이시다. 배위는 정부인 전주이씨
공은 서기 1512년(중종7년 임신)에 출생, 1531년(중종26년 신묘)에 진사가 되시고, 1530년에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사가독서와 내외직을 역임후 대사헌 부제학 송도유수 전라도 황해도 양도 감사를 거쳐 文衡(문형)으로 薦擧(천거)되었고, 또 한성좌우윤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참판과 양관제학을 지내셨다.
1563년(명종18년 계해)에 종계변무사로 명나라 연경에 가셔서 사명을 마치시고 1563년 9월 17일 燕館(연관)에서 세상을 떠나시니 향년 52세라. 명나라 황제가 관의 수의를 특사하여 서장관 李陽元으로 하여금 염습과 호상을 치르게 하였다.
是年에 명나라 황제가 예조판서에 양관대제학을 추증하고 아조 선조 경인년(1590년 선조23)에 광국공신에 화산군을 봉하고 부조지위를 명하고 文端이란 諡號(시호)를 내렸다.
공은 풍채가 장엄하시고 도량이 넓으시고 문장과 도덕이 뛰어나셔서 그 이름을 세상에 널리 떨치셨다.
이렇듯 공명하신고로 공의 현손대에 이르러 1室4孝가 배출하였으니 휘銑 (官은 贈통덕랑 사헌부지평)과 선의 제 銶 (贈조산대부 사헌부지평)와 구의 제 휘錫 (송우암시열 문하 사산감역불사 통훈대부 사헌부지평)과 그의 妹氏(당시 10세) 등 4남매가 그의 어머니께서 병환이 위독하시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입에 넣으시니 병환이 소생하여 7일간을 더 연명케 하여 그 효행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서기 1753년 (영조 계유) 에 조정에서 증직을 하고 영조대왕께서 친필로 [一室四孝]라고 써서 賜額旌閭(사액정려)를 내리셨다. 그 정려가 폐허된 瓦家앞에 보존되어 있으며 일실사효라 쓴 영조의 친필현판은 종손인 22대손 起鎬씨가 보관하고 있다.
화산군의 향사는 연 춘추 2회 (춘:한식일, 추:추석일)에 배향하고 있으며 화산군의 문집으로는 寓菴集 3권으로 天地人이 있는데 지파 후손인 안렴사공의 19대손 文演씨가 소장하고 있다.
요즈음 후손들이 공의 유적을 영구히 보존키 위하여 여주군 공보실에 자료 일체를 갖추어 지방문화재로 상신을 하고 있다.
안렴사공 7대손 澍 사당건립
-泰相
본래 화산군의 사당은 이천군 율면 본죽리 후산 현 위치에 보존되어 왔었으나 불행히도 6.25 사변으로 인하여 관리가 소홀하여 완전 폐허가 되어 복원하기엔 속수무책으로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사변후 생계마저 어려운 형편에 사당복원 문제는 도저히 불가능하였다. 소종중에서는 복원건에 대하여 논의를 계속해 왔으며 복원해야 한다는 뜻은 이구동성으로 일치하였으나 소종중에는 재정이 없었으며 서로 만나면 걱정만 하고 있던 중
마침내 고향을 떠났던 안렴사공 21대손 泰相 현종 (현 안성축협 전무)께서 모친께서 늘 사당복원을 말씀하심이 여러차례이어서 어머님 (경주김씨) 생전에 소원을 풀어 드리고자 거액을 선뜻 獻誠(헌성)함으로 엄두도 못냈던 사당복원 공사를 시작함으로 諸宗의 기쁨이 충만하여 그후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공사를 착공한 후 태상 종친은 공무에도 바쁜 가운데 직접 공사를 지휘감독하고 휴일이면 자손까지 동원하여 일을 도움으로 마침내 훌륭한 사당을 준공하여 영령의 위패를 봉안하고 永世是安을 告由하니 온 문중의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이에 문중에서는 태상 현종의 공로를 높이 찬양하여 표창패를 수여하였다.
⊙ 이천군청 홈페이지 (http://www.icheon.gyeonggi.kr/)
본죽리 일실사효 정려(本竹里 一室四孝 旌閭)
소재지 : 율면 본죽리(栗面 本竹里)
현재 일실4효 정려는 소실되어 전하지 않지만 다행히 일실사효 정려에 소장하였던 현판 3개가 율면 본죽리 김용진(金龍振)씨 집 문전(門前)에 세워져 있던 것을 우암사(寓菴祠) 개축(改築) 당시 그 정문(旌門)을 옮겨 세웠다고 하는데 김선(金銑)과 그 동생인 김석(金錫), 김구(金銶), 이들의 누이동생 등 4남매의 효행(孝行)을 표한 정문(旌門)이다.
김선(金銑)의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이며, 율면 본죽리에 살았다. 어려서 급제하여 안겸사(按兼使)를 지낸후 벼슬 하지아니하고 청주(淸州)에 은둔한 김사겸(金士兼)의 11대손 광국공신 화산군 김주(光國功臣 化山君 金澍)의 현손이다. (★안겸사는 안렴사, 김사겸은 김사렴, 11대손은 7대손의 오기임)
김기창(金起昌)씨의 군지편찬(郡誌編纂) 자료(資料)에 의하면 김선(金銑)은 안동인(安東人)으로 문서공(文瑞公) 김주(金澍)의 현손(玄孫)인데 어머니의 병이 위급하자 이들 4남매가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으므로서 다시 소생(蘇生)하게 되어 그 효행(孝行)이 세상(世上)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영조 30년(1753)에 조정(朝廷)에서 정려(旌閭)되어 영조대왕의 친필(親筆)로 일실사효(一室四孝)라 써서 사액(賜額) 하였다고 한다.
한 집안에서 4명의 효자가 난 것을 기리는 추천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 ( 중 략 ) ---
아아! 돌아가신 증조할아버지 4남매의 지극한 효를 다한 행적은 여지병풍과 읍지에 기록되었으며, 같은 고을에 사는 선비가 이러한 사실을 이천군에 알리고, 이천군에서는 경기감영에 보고하고, 경기감영에서는 국왕에게 보고하여 현종 10년(1669)에 4남매에게 부역을 면제하는 은혜가 내려졌다. 이뿐만 아니라 영종 30년(1754)에는 왕명으로 정려가 내려졌으며, 『一室之四孝』라 하였다.
--- ( 중 략 ) ---
<賜額內容>
孝子 贈 通德郞 司憲府持平 金銑 贈 朝散大夫司憲府持平 金銶 贈 通訓大夫 司憲府持平 行果毅 四山監役 金錫 孝女監役 李明三妻 金氏四男妹 之門 英宗甲戊七月 日 ?命 旌閭
(해설)
효자로 통덕랑(정5품) 사헌부지평에 증직된 김선, 조산대부(종4품) 사헌지부평에 증직된 김구와, 통훈대부(정3품) 사헌부지평 행과의 사산감역에 증직된 김석과, 효녀이므로 감역에 증직된 이명삼의 처 등 김씨 4남매 의 정려문이다. 김씨 4남매의 효행을 기려 영조 30년(1754)에 명정되 었다.
⊙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 (http://www.koreandb.net/)
金澍(김주)
1512(중종 7)∼1563(명종 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응림(應霖), 호는 우암(寓菴). 안원군(安原君) 공량(公亮)의 아들이다.
1531년에 진사가 되고, 1539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호당에 뽑혔다. 전라도·경상도의 관찰사 및 개성유수·대사헌을 지냈고,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1563년 제학으로 있을 때 선계변무사(璿系辨誣使)로 명나라에 가서 사명을 완수하였으나 그곳에서 병들어 죽었다.
1590년(선조 23) 그의 공이 인정되어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화산군(花山君)에 추봉되었다.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임형수(林亨秀) 등과 교유가 깊었다.
문장이 뛰어났고 초서를 잘 썼다. 저서로는 《우암유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단(文端)이다.
참고문헌 : 明宗實錄, 宣祖實錄. 〈兪炳勇〉
▣ 충북 음성군 감곡면 상평1리
죽산-이천간 도로를 타고 이천 시내로 들어가 도자기엑스포장과 이천도예촌, 해강도자미술관을 구경하고 이천 장호원으로 다시 내려와서 음성 장호원 (음성 감곡)을 지나 한 4km정도 내려 오다가 충주 노은 가는 길로 10리 정도 가다보면 음성 감곡 상평1리가 나오는데 이 마을은 윤만 종친께서 소개한 바 있듯이 우리 先안동(舊안동)김씨 문온공파 세거지지입니다.
⊙ 음성군청 홈페이지 (http://gun.umsong.chungbuk.kr/)
상평1리 마을비문안
우리마을 상평1리는 약 400년전 처음으로 안동김씨 김진강공의 장남 대화공이 벼슬을 시작하고 이 마을에 정착하고 되면서 뽕나무를 많이 심어 의식주를 자급자족하게 되면서 마을이름을 상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상촌마을은 차령산맥의 지맥인 원통산줄기 가사바위밑에 펼쳐진 작은 분지에 이루어진 촌락으로 마을둘레는 얕은 산으로 둘러 쌓여져 마치 병풍을 두른 것 같아 매우 아늑하고 포근하며 마을안 울창한 느티나무 숲 아래서 푸른 반석위를 구르는 백옥같은 맑은 물소리는 산새와 매미소리가 서로 조화되며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어 이곳에 옛 선비들이 모여앉아 바둑과 장기를 즐기던 이른바 선경으로 상촌 마을은 길이 후대에 자랑거리라 이 비를 새겨 전하다.
마을비현황
1996년 9월 10일 마을입구에 총높이 103cm, 비신가로 82cm, 비신세로 52cm 규모로 군비 100만원, 자부담 40만원의 예산이 소요되어 건립 되었다. 기단부는 방형이며 비신은 마을유래·자랑 등이 기록되어 있다.
▣ 충북 괴산군 증평읍
음성을 지나 충주-청주간 도로를 타고 내려오다가 증평에 도착했습니다. 증평소방서 옆 다리 (송산교) 바로 옆에 소공원이 있는데 이곳에 (안렴사공파) 김봉연 선생의 공적비를 살펴 보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공적비문을 보니까 비문을 세우는데 공헌을 한 분들 명단중에 김학응, 김재성, 김사진 등 많은 종친들이 성함이 적혀 있었습니다.
⊙ <증평 향토자료>
지역사회 봉사자 김봉연
생활철학 - 숭조,성실,근검,겸양
金鳳演(김봉연, 1905.10.8-1993.12.5)! 그는 누구인가?
구한말 국운이 기울던 1905년 증평읍 남하리 (솔모루)에서 출생해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고 청주농고를 졸업한 후
당시 대홍수로 논밭이 매몰될 때 안동김씨의 문중과 가족을 위해, 또 농촌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고향에 머물게 됐다고 하는 그는 외국유학을 갈수도 있었고 더불어 더 좋은 관직에서 일할 수 있지만 그는 묵묵히 고향을 지킨 인물로 지역에서 존경을 받고 있다.
선생은 매사에 청렴결백하고 책임감이 강한 굳은 의지로 항상 약자를 도우며 생활해 왔고, "숭조,성실,근검,겸양"을 생활철학으로 평생 본을 보이며 살아 왔다.
12살에 결혼해 슬하에 3남1녀를 두었는데, 자제들의 말로는 근검 절약해 선고의 뜻을 따르기가 대단히 힘겨웠다고 회고하고 있다.
자식들에게 일러주던 일화가 있다.
지방선비가 서울에 가서 벼슬자리를 하나 얻어 보려고 대감집 식객으로 가서 있었다. 다른 사람은 다 벼슬자리 하나씩을 마련해 주는데, 이 사람은 벼슬자리를 주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는 주인대감을 찾아가 "저도 벼슬자리 하나만 마련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니 "자네는 감이 되지 못하네. 감이 안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세수를 하고 얼굴을 닦는 수건을 보니 자네 혼자 수건을 다 버려 놓으면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주는 것이 아닌가? 자신을 위하기 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훈계했다고 한다.
선생은 일찍이 민주주의를 손수 실천했고 외유내강의 성품으로 집안에서부터 예의범절을 실천했다. 됨됨이가 된 분을 대하면 우선 마음이 편하다. 마음의 문이 열린다. 주변이 깔끔하다. 노환 중에도 찾아오는 사람에게 예의를 잊지 않던 그 분! 화로에 불을 끄지 않고 성냥 한 개비를 아껴 쓰시던 분이다.
마지막 선생이 우리 지역의 발전을 위해 숨은 공을 세운 사람을 기록하지 못할 것 같다며 20여 분의 명단을 적어주고 "자네가 내가 할 일을 도와 주어서 고맙다"며 손을 잡아 주시던 일이 마지막이다.
또 손수 전화를 걸어 집안에 있는 미선나무와 능소화를 학교에 갔다 심어 많은 사람이 보도록 하라던 일, 신문에 간지로 끼워진 광고물의 이면지를 재활용하시던 일들이 바로 선생이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했던 모습이었다.
선생은 가정의례편람, 제례국해 등을 엮어 후손들에게 예절과 도덕성을 갖도록 하고, 증평, 도안의 향토사에도 많은 관심을 갖는 한편, 조언을 아끼지 않은 분으로 깊이 기억되기도 한다.
1995년 4월 16일에는 증평문화원과 증평향토문화연구회 및 지역유지들이 뜻을 모아 송산교 옆 소공원에 공적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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