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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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1-10-05 06:14 조회1,989회 댓글0건본문
추석때 안정공파에 대하여 문의 하셨는데 바쁘다는 핑게로 이제야 답해 드립니다.
안정공파(安靖公派)
안정공파의 파조는 김구덕의 후손으로 이루어진 파입니다.
안정공의 휘는 김구덕(金九德)이며 시호는 安靖公입니다.
그래서 안정공파라고 합니다.
안정공 김구덕의 가계를 살펴보면 충렬공(김방경)--(김선), 김흔, 김순---
김승용, (김승택),김승우--(김묘), 김면--김구용,김제안(,김구덕)입니다. 충렬공의
현존하는 파조 현손 15명중의 한 분입니다 그러나 손녀딸이 세자빈(휘빈=문종이
세자 당시 첫 번째 세자빈임, 문종은 그 후 봉씨를 세자빈으로 맞이하였으나
또 폐빈 되었음 )으로 간택되어 입궐하였으나 불미한 사건으로 폐빈 되는 일을
당하게 된후 그 후손들이 빛을 잃어 현재는 얼마 되지 않은 후손이 있을 뿐입니다.
안정공의 묘소는 경기도 여주군 에 있으며 시제일은 음력 10월 4일입니다.
안정공의 아버님(김묘) 할아버님(김승택)에 관한 자료는 본 홈페지 각파문중란에
문온공파에 자세히 소개 되었으니 참고하시기 바람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휘빈에 대한 모든 자료가 제게 있으니 필요하시면
따로 연락 주십시요.
안정공파 회장님은 김경선씨입니다.
전화는 필요하시면 이메일로 물어오시면 답해 드리겠습니다.
김구덕(金九德) ?∼1428(세종 1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상락군(上洛君) 묘(昴)의 아들이다. 19세에 진사시·생원시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산원(散員)이 되었다. 이어서 사헌부규정(司憲府糾正)·
사헌부잡단(司憲府雜端)을 지냈고, 1396년(태조 5) 형조의랑(刑曹議郎)에 올랐다.
이때 형옥을 잘못 처리하였다고 하여 순군옥(巡軍獄)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뒤 외직으로 나가 단양·청풍(淸風:현재의 堤川)·한주(韓州:현재의 韓山) 등 3개
고을의 군수가 되어 선정을 폈고, 정종 때는 사헌부중승(司憲府中丞)이 되어 당시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로서 권력을 부리던 최운해(崔雲海)를 탄핵, 음죽(陰竹)으로
유배를 보냈다. 이어서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에 올랐고, 다시 외직으로 나가
해주·광주·청주목사를 지냈다. 이어서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가 되었는데, 그
때 그의 딸이 태종전(太宗殿)에 간택되어 명빈(明嬪)이 되자, 벼슬이 올라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가 되었다. 1412년(태종 12) 한성부윤을 지내고,
이어서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가 되었다.
이듬해 다시 한성부윤을 지내며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윽고 지돈녕부사를 거쳐 판돈녕부사에 이르렀고, 1427년(세종 9)에는
손녀가 세자빈에 간택되었다. 그가 죽자 나라에서는 3일 동안 철조(輟朝)하였고,
조문을 내려 치제하였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여 남과 다투지 않았고
사람을 대함에 예로써 하였다. 문장에 능하였으며, 음악을 좋아하였다.
시호는 안정공(安靖公)이다.
안정공 후손 역사적 인물
김구덕-김오문-김중엄-김뉴-
김중엄- 안정공의 손자- 지돈령부사를 역임
김뉴-안정공의 증손, 김중엄의 아들
김뉴(金紐)
1420(세종 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자고(子固), 호는
금헌(琴軒)·취헌(翠軒)·쌍계재(雙溪齋)·관후암(觀後庵) 또는 상락거사(上洛居士).
아버지는 중엄(仲淹)이고, 어머니는 조준(趙浚)의 손녀이며 대림(大臨)의 딸이다.
1464년(세조 10) 녹사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황해·평안도의 땅을 개간한
공으로 벼슬에 나가 성균학유가 되었다. 곧 사복직장으로 옮겼으며, 이듬해
호조좌랑으로 《경국대전》 편찬작업을 위해 이전(吏典)을 수교하였고,
또 경차관으로 전라도에 파견되었다.
1466년 발영시·등준시에 을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안효례(安孝禮)·유희익(兪希益)
등과 함께 도성(都城)을 측량하고 지도를 작성하였다.
또한, 예문관직제학으로 《세조실록》·《예종실록》 등을 편찬하는 데 기여함이 컸다.
1470년(성종 1) 완성단계에 있는 《경국대전》을 다시 수교하였다.
1472년 동부승지를 거쳐, 이듬해 참찬관으로 저화법(楮貨法)사용을 강조하는
방안을 주장하였다. 이어 공조참판·충청도관찰사·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1478년에는 대사헌으로 군비확충을 위해 전라도 순천지방에 석보(石堡)를 쌓고
군인을 늘리며, 함경도 회령과 마도달량어란(馬글達梁於蘭)사이에 보를 설치하고
식량을 저축할 것을 제의하여 실천하게 하였다.
1479년 겸성균관동지사가 되고, 1481년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곧 파직되었다.
1484년 행사직이 되고, 이듬해 시를 지어 바쳐 왕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며,
1490년 다시 이조참판이 되었다.
재주가 있고 학문을 좋아하여 글을 잘 지었고, 행서와 초서 등 글씨에
능하였으며, 거문고도 잘 하여 ‘3절(三絶)’이라 불리었고 그림 또한 잘 그렸다.
글씨로는 해동명적(海東名跡)·초로관주(草露貫珠) 등에 모간(模刊)한 것이 있다.]
김영환 solnae@empal.com 016-363-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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