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렴사공 金士廉 (5)(공민왕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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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1-09-15 05:56 조회2,253회 댓글0건본문
안렴사공 金士廉 (5)(공민왕 시절)
⊙ 김사렴과 공민왕
안렴사공 김사렴은 1330년경에 출생하여 공민왕초(1351-)에 문과에 급제하여 1358년경에는 秘書監(비서감, 고려 때 秘書省 소속의 종 3품 관직)을 역임하고 있고, 1365년에서 1371년 사이에 신돈의 횡포가 극심할 때 신돈을 탄핵하는 직간으로 명성을 떨치었다고 합니다.
공민왕은 1330년에 출생하여 1351년 고려 제31대왕으로 등극하여 1374년에 세상을 뜨게 됩니다.
김사렴은 공민왕과 연배도 비슷하고, 공민왕 초기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지금의 대통령비서실 격인 비서성에서 비서감으로 지내기도 하고, 우사간, 좌사간으로 신돈의 횡포를 직간하여 온나라에 명성을 떨치기도 하는등 공민왕 시절에는 주로 왕의 측근에서 비서 또는 간관으로 활동한 듯 합니다.
⊙ 김사렴 김사안 형제와 김구용 김제안 형제
김사렴이 주로 교유한 정몽주, 이색 등은 척약재 김구용과는 생사를 같이하는 절친한 사이였고,
김사렴의 바로 아래 동생인 김사안이 김구용, 김제안 형제의 큰 매형(매제)인 점,
김사렴과 김제안이 신돈의 횡포에 반대하여 활동한 점 등을 고려할 때
김사렴, 김사안 형제와 김구용, 김제안 형제도 (8촌간) 상당한 교유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으나 관련 자료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김방경- (1/5)김선- (3/4)김승택- (1/2)김묘- (1/3)김구용 (2/3)김제안
*김방경- (3/5)김순- (4/4)김영후- (2/1)김천- (4/2)김사렴 (3/4)김사안
★공민왕 恭愍王 [1330~1374]
고려 제31대 왕(재위 1351∼1374).
호 이재(怡齋)·익당(益堂). 이름 전(勿). 초명 기(祺). 몽골식 이름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 충숙왕의 둘째아들이다. 비는 원(元)나라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이다.
충목왕이 즉위할 때 강릉대군(江陵大君)에 봉해졌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숙위(宿衛)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가서, 노국대장공주와 결혼하였다. 원나라의 지시로 충정왕이 폐위되면서 왕위에 올랐다. 원나라가 쇠퇴해지자 원나라 배척운동을 일으키고, 1352년(공민왕 1) 변발(폴髮) ·호복(胡服) 등의 몽골풍을 폐지하였다.
1356년 몽골 연호 ·관제를 폐지하여 문종 때의 제도로 복귀하는 한편, 내정을 간섭한 정동행중서성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를 폐지하였다. 이어 원나라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고 권세를 부린 기철(奇轍) 일파를 숙청하고, 100년 간 존속한 쌍성총관부를 쳐서 폐지하는 등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였다. 1368년 명(明)나라가 건국하자 이인임(李仁任)을 보내어, 명나라와 협력하여 요동에 남은 원나라 세력을 공략하였다.
1369년 이성계(李成桂)로 하여금 동녕부(東寧府)를 치게 하여 오로산성(五老山城)을 점령, 국위를 크게 떨쳤다.
내정에서는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신돈(辛旽)을 등용하여 귀족이 겸병한 토지를 소유자에게 반환시키고,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을 해방시키는 등 개혁적인 정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그 뒤 홍건적 ·왜구의 계속적인 침범으로 국력이 소모되었고, 1365년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그녀를 추모하여 불사(佛事)에만 전심하였다.
정치를 신돈에게 맡겨 정치가 문란해졌으며,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여 풍기도 문란해졌다. 특히 홍륜(洪倫)이 익비(益妃)를 범하여 임신시키자, 이를 은폐할 의도로 홍륜 ·최만생(崔萬生) 등을 죽이려다가, 그들에게 살해되었다.
그림에 뛰어나 고려의 대표적 화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글씨에도 능하였으며, 특히 대자(大字)에 뛰어났다. 능은 현릉(玄陵)이다. 작품에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국립현대미술관) 《노국대장공주진(眞)》 《석가출산상(釋迦出山像)》 《아방궁도(阿房宮圖)》 《현릉산수도(玄陵山水圖)》 《동자보현육아백상도(童子普賢六牙白象圖)》 등이 있다.
▣ 안렴사공 김사렴의 교유 및 직간 시절의 자료를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여말충의열전 (1995, 고려숭의회)>
젊어서 학문에 정진하여 공민왕 초기에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시랑(정2품)을 역임하고 벼슬이 안렴사에 이르렀다. <♠경현사지>
선생은 문학과 氣節로 세상에서 推重하였으며 정포은 이목은과 친교를 맺고 함께 직언으로 간함으로써 저명하였다. 공민왕14년 (1365) 왕이 신돈을 총애하여 직급을 올리고 공신호를 내리자 선생이 忠奮義激하여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며 이르기를 "신돈은 바른 사람이 못되며 후에 반드시 정치를 어지럽힐 것이요, 그렇게 되면 고려의 사직은 장차 血食을 얻지 못하리이다" 고 하였다. <♠대동기문>
<⊙ 여말의충절 김사렴 (청주교대 교수 김재윤)>
공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文詞에 능하였고 일찍이 공민왕 초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문하시랑, 정당문학, 좌사간, 지제교 등 조정의 요직을 거쳐 안렴사에 이르렀다.
*문하시랑(門下侍郞) : 고려 때 중서문하성의 종1품 벼슬
*정당문학(政堂文學) : 고려·조선시대 관직. 고려 문종(文宗) 때 정원은 1명, 품계는 종2품으로 정하였다. 1275년(충렬왕 1) 참문학사(參文學事)로 개칭하고, 90년 다시 정당문학으로 고쳤다. 충선왕 때 잠시 폐지했다가 뒤에 다시 두어 조선 초까지 명칭과 기능이 이어졌다. 중서문하성의 재신(宰臣)으로 국정을 논의하는 일을 맡았다. 조선 초기에는 문하부(門下府)의 관직으로 존속하였고, 1401년(태종 1) 문하부를 의정부(議政府)로 개칭할 때 의정부문학으로 바뀌었다
*左司諫(좌사간) ; 고려 때 문하부에 소속된 관직. 뒤에 좌헌납(左獻納)으로 개칭.
*知制誥(지제고) ; 고려 때 조서(詔書). 교서(敎書) 등을 지어 왕에게 올리던 관직.
知制敎(지제교) ; 조선 때 왕에게 교서 등을 기록하여 올리는 일을 담당하였으며, 부제학(정3품) 이하 부수찬(종6품)까지가 겸임.
농암 김주, 목은 이색 등 당대의 유명한 선비들과 함께 문정공 신현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는데, 특히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등과 가까이 사귀었다.
?★김주(金輳){3}
생몰년 미상. 고려 말기의 충신. 본관은 선산. 호는 농암(籠巖).
아버지는 예의판서(禮儀判書) 원로(元老)이며, 어머니는 수주김씨(水州金氏)이다.
?★김주(金湊){1}
?∼1404(태종 4).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낙안(樂安).
문과에 급제한 뒤 공민왕 때 성균직강(成均直講)이 되었다.
1366년(공민왕 15) 간관(諫官) 정공권(鄭公權)이 신돈(辛旽)의 죄를 극간한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나, 곧 서용되어 비서감승(#비58書監丞)의 직에 올랐다
★이색(李穡)
1328(충숙왕 15)∼1396(태조5). 고려말의 문신·학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찬성사 곡(#곡13)의 아들로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진사가 되고, 1348년(충목왕 4)원나라에 가서 국자감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351년(충정왕 3)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귀국하여
★정몽주(鄭夢周)
1337(충숙왕 복위 6)∼1392(공양왕 4). 고려의 문신·학자. 본관은 영일(迎日). 경상도 영천출생. 초명은 몽란(夢蘭) 또는 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습명(襲明)의 후손으로 운관(云瓘)의 아들이다.
신현선생은 일찍이 원나라에 건너가 왕의 사부로 대접받았었고 국내에서는 정몽주, 원천석, 김진양, 이색 등 당대의 거유들을 길러낸 대학자였는데, 여말에 김사렴을 비롯해서 많은 충신 열사들이 배출되었던 것도 이분의 높은 가르침에 감화를 많이 받은 것이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 신현
★원천석(元天錫)
1330(충숙왕 17)∼? 고려말과 조선초의 은사(隱士).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
고려말에 정용별장(精勇別將)을 지낸 열(悅)의 손자이며, 종부시령(宗簿寺令)을 지낸 윤적(允迪)의 아들로 원주원씨의 중시조이다
★김진양(金震陽)
?∼1392(태조 1). 고려 후기의 문관. 자는 자정(子靜), 호는 초려(草廬).
성품이 강개하며 출중하였다. 어려서 고아가 되었으나 학문에 힘써서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이 되었다.
공은 외모에서 풍채와 위엄이 있었고, 한 인간으로서 마음 씀씀이가 크고 넓었으며, 공직에 나아가서는 오직 충절로 신명을 다하였고, 외직에 있을 때에는 백성들을 보살피고 어루만지는 데 온 정성을 쏟아 그 이름을 온 세상에 떨쳤다. (風采嚴威 器度弘傅 奉公以誠 按民盡力 名重當世 : ♠조선명신록, ♠해동인물지 참조)
또한 공을 주벽으로 모시고 있는 ♠송천서원 상량문에는 공에 대해서 이르기를,
"사람된 바탕과 성품이 쇠붙이나 옥덩어리처럼 굳세고 알차며, 그 지조와 기개는 찬서리 속에 우뚝 솟아 있는 소나무 같고, 곧은 정신은 항상 진나라 五柳선생을 흠모하였고, 주나라 곡식을 먹기 부끄러워하였던 백이 숙제의 기풍을 지녔다. " 고 하였다.
공이 이와 같이 충군 애국에 일생을 일관하였고, 높은 기개를 지녔던 것은 위에서 언급하였던 바와 같이 공의 고조부 김방경 이래 조상들의 훌륭한 가풍 속에서 성장해 온 것도 중요한 요인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공의 기풍은 여말 요승인 신돈의 일에서 그 진면목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주지하는 대로 신돈은 공민왕의 총애를 받으면서부터 갖가지 못된 짓을 자행하였다.
더구나 임금의 사부가 되고, 1365년(공민왕14년)에 큰 벼슬 (벽상삼한 삼중대광 집현전 태학사)과 수정이순 논도변리 보세공신이란 호를 받고 영도첨의사사사가 된 뒤에 인사권을 비롯한 강력한 권력을 장악했을뿐 아니라, 왕을 대신하여 백관의 조례를 받는등 무례 방자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도 왕은 남몰래 미행으로 자주 신돈의 집에 나가서 함께 공을 치고(격구) 연등회와 같은 큰 잔치를 펼치는가 하면, 경기에 대한 상품으로 은병, 말안장 말(안마), 비단과 주단 등을 많이 하사하였다
이러한 일은 군신간에 있을 수 없는 것임은 물론 정사를 어지럽히는 일인 동시에 당시 신돈의 횡포가 얼마나 자심했던가 하는 점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일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신돈의 위세에 영합하여 그를 추종하는 자가 없지 않았으나 조정의 뜻있는 선비들은 이를 좌시하지 않았다.
1366년(공민왕15년) 에 좌사의대부인 정추와 좌정언 이존오 등이 신돈의 부당함을 거론하였다가 정추는 도리어 경상도 동래로 쫒겨가고, 이존오도 직위가 강등되어 장사의 감무로 축출당하였다. (이들은 그 뒤에 귀양지에서 죽음)
★ 신돈 辛旽 [?~1371]
본관 영산(靈山). 속성 신(辛). 자 요공(耀空), 법명 편조(遍照), 돈(旽)은 퇴속하여 고친 이름. 호 청한거사(淸閑居士). 계성현(桂城縣) 옥천사(玉川寺) 사비(寺婢)의 아들.
김원명(金元命)의 추천으로 공민왕(恭愍王)으로부터 신임을 받고 사부(師傅)로서 국정을 맡았다. 1365(공민왕 14) 진평후(眞平侯)라는 봉작까지 받아 가며 정치개혁을 단행하였는데, 그의 개혁정치는 고려 내부의 혼탁한 사회적 적폐(積弊)를 타개,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것으로,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이라는 토지개혁 관청을 두어 부호들이 권세로 빼앗은 토지를 각 소유자에게 돌려주고, 노비로서 자유민이 되려는 자들을 해방시켰으며, 국가재정을 잘 관리하여 민심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급진적 개혁은 상층계급의 반감을 샀고, 왕의 신임을 기화로 점차 오만해져서 방탕과 음란을 일삼았으므로 점점 배척을 당하게 되었다. 영록대부집현전대학사(榮祿大夫集賢殿大學士)가 되어 1369년(공민왕 18)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로 왕을 유혹, 서울을 충주(忠州)로 옮길 계획을 세우고 스스로 오도도사심관(五道都事審官)이 되려다 왕의 불신을 받았다. 그러자 왕을 살해하려는 역모(逆謀)를 꾸며 권력을 되찾으려 하였으나 발각되어 수원(水原)에 유폐되었다가 1371년에 처형되었다.
★정공권(鄭公權)
1333(충숙왕 복위 2)∼1382(우왕 8). 고려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초명은 추(樞). 자는 공권(公權)인데, 뒷날 자를 이름으로 썼다. 호는 원재(圓齋).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보(溥)의 아들이다.
1353년(공민왕 2) 문과에 급제하였고 예문검열을 거쳐 좌사의대부에 올랐다.
1366년 이존오(李存吾)와 함께 신돈(辛旽)을 탄핵하다가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였으나, 이색(李穡)의 구원으로 동래현령으로 좌천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1371년 신돈이 제거된 뒤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다시 발탁되었다.
★이존오(李存吾)
1341(충혜왕 복위 2)∼1371(공민왕 20).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경(順卿), 호는 석탄(石灘)·고산(孤山).
1360년(공민왕 9)문과에 급제, 수원서기(水原書記)를 거쳐 사관(史官)에 발탁되었다.
1366년 우정언이 되어 신돈(辛旽)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샀으나, 이색(李穡) 등의 옹호로 극형을 면하고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
※영환종친께서 게재한 20.上洛君(金昴) 設壇 墓碑文에 보면
제 6서는 석탄 李存五之弟 보문각 교감 경주인 존사요,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즉 김구용의 아버지의 여섯 번째 사위는 이존오의 동생 이존사이다.
제 1서는 재신 김사안이나 무후하고,
제 2서는 충혜공 경주인 이제현지 三子 찬성사 장로요,
제 3서는 문정공 전주인 최재之子 찬성사 평도공 유경이요,
제 4서는 한성판윤공 양천인 허 호이며,
제 5서는 양천군 허순之子 선이니 무후라.
제 6서는 석탄 李存五之弟 보문각 교감 경주인 존사요,
제 7서는 문민공 김광철 之孫 예조전서 예문관 제학 광산인 김섬이며,
제 8서는 사윤공 김수천이요,
제 9서는 부정공 화순인 최자하이다.
이밖에도 오인택, 경천흥, 김원명 등이 신돈을 제거하려고 밀의하다가 발각되어 장류를 당했으며, 1368년 10월에도 김정, 김흥조, 김제안(김구용 제) 등이 그를 죽일 것을 모의하다가 그 계획이 누설되어 역시 장류되던 중에 살해를 당하였다.
★오인택(吳仁澤)
생몰년 미상. 고려의 무신.
신돈(辛旽)의 집권 뒤 풀려나와 지도첨의(知都僉議)가 되었으나 전시중(前侍中) 경천흥(慶千興), 전평리(前評理) 목인길(睦仁吉) 등과 신돈의 제거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1367년 상주로 장배(杖配)되고, 가산이 적몰되었다.
뒤에 신돈이 그를 죽이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탈출하여 숨었으나 다시 잡혀 사리성(思利城)의 봉졸(烽卒)로 장배되었다
★경복흥(慶復興)
?∼1380(우왕 6). 고려의 재상. 본관은 청주. 초명은 천흥(千興). 아버지는 우대언(右代言) 사만(斯萬)이다. 벼슬을 여러 번 옮겨 감찰·장령이 되었고, 1354년(공민왕 3)에는 군부판서(軍簿判書)가 되었다.
※ 경복흥은 초명이 천흥으로 우리 가문의 중시조 김방경의 외증손자이다.
*김방경- 여(안동김씨)+경수- 경사만- 경복흥
1365년에 수시중(守侍中)이 되었으나, 그때는 신돈(辛旽)이 권세를 부리고 있었으므로 비록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정사에 참여하지 못하고, 마침내 신돈의 배척을 받아 파직되고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367년 오인택(吳仁澤)·안우경(安遇慶)·김원명(金元命) 등과 신돈을 제거하려다가 일이 누설되어, 장형을 받고 흥주(興州)로 귀양가고 그 집은 적몰(籍沒)되었다.
1371년 신돈이 제거되자 소환되어 다시 좌시중에 제배되고, 정방(政房)의 제조(提調)를 겸하며 전선(銓選)을 맡았다.
★김원명(金元命)
?∼1370(공민왕 19). 고려 말기의 공신. 본관은 화평(化平). 중찬(中贊) 지숙(之淑)의 손자이며, 찬성사(贊成事) 인연(仁沇)의 아들이고, 속명(續命)의 형이다.
그리고 그가 천거하였던 신돈(辛旽)이 왕의 총애를 받자 1365년 삼사좌사응양군상호군(三司左使鷹揚軍上護軍)에 제수되어 8위(八衛) 42도부(四二都府)의 병권을 장악하였다. 뒤에 오인택(吳仁澤) 등과 함께 신돈을 제거하려는 모의를 하였으나, 발각되어 영덕에 유배되었다가, 신돈의 당류(黨類)인 손연(孫演)에 의하여 장살(杖殺)되었다.
★김정(金精){3}
?∼1368(공민왕 17). 고려 말기의 문신. 좌부대언(左副代言)·좌대언(左代言)·밀직부사(密直副使)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1365년(공민왕 14)에 황원군(黃原君) 최백(崔伯)과 함께 성절사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1368년 김흥조(金興祖)·조사공(趙思恭)·유사의(兪思義)·김제안(金齊顔)·김구보(金龜寶)·이원림(李元林)·윤희종(尹希宗)·조린(趙璘)·김광재(金光載) 등과 함께 신돈(辛旽)을 죽일 것을 모의하였는데, 조사공이 이 사실을 자기와 평소 친히 지내고 있던 홍주목사(洪州牧使) 정운(鄭#운16)에게 말하자, 정운은 밀직제학(密直提學) 한천(韓#천46)과 더불어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 이춘부(李春富)에게 밀고하였으며, 이춘부가 궁궐에 들어가 왕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왕명으로 순군옥(巡軍獄)에 갇힌 뒤 유배되었고, 신돈에 의하여 일당과 더불어 죽음을 당하였다.
※ 영환 종친께서 소개하신 "소천서원과 청원정 (蘇川書院과 淸遠亭)" 내용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가야리에는 이곳 龍宮全氏(용궁전씨)의 시조이신 菊波 全元發(국파 전원발) 선생은 모신 서원이 있다. 전원발 선생과 척약재 김구용 선조와는 각별한 사이었으며,
더욱이 우리 안동김문의 장손은 方慶(방경)- (선)- 資(자)- 爲(위)- 得男(득남)- 精(정)으로 이어오다 金精공은 척약재의 아우인 金齊顔공과 더불어 신돈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김정공의 후손은 수안김씨로 , 김제안공의 후손은 사천김씨로 분적하였다. 바로 안동김문의 장손인 김정공의 배위가 국파 전원발선생의 따님이었다.
사천김씨 시조 김부(金阜)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아들인 김은열의 13세손이다. 김부의 자는 유돈(惟敦), 시호는 정의(貞義)다
김부는 안동김씨의 중시조인 김방경의 6세손이기도 하다. 고려말 김방경의 현손(★5세손)으로 판도판서의 관직에 있던 김제안(金濟顔)은 신돈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살해되었다. 이 사건으로 그 아들 김부도 사성(泗城)으로 귀양갔으나 정사왜구의 난때 전공을 세워 공양왕으로부터 사성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뒤 후손들이 사천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나왔다. 사성은 경남 泗川의 옛이름이다.
★김흥조(金興祖)
?∼1368(공민왕 17).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문하시중 태현(台鉉)의 손자이며, 첨의평리(僉議評理) 광재(光載)의 아들이다. 재주가 뛰어나고 지조가 있어 군기감을 거쳐 수원·해주의 수령을 지냈다.
1361년 10월 10만의 홍건적이 쳐들어와 개성을 위협하자 수원부사로서 왕을 모시고 복주(福州:지금의 안동)까지 호종한 공으로 신축호종공신(辛丑扈從功臣)2등에 서훈되었다.
그러나 1368년 전 밀직부사(密直副使) 김정(金精)·조사공(趙思恭)·유사의(兪思義)·김제안(金齊顔)·김구보(金龜寶) 등과 함께 신돈(辛旽)을 살해하기로 한 모의가 누설되어 순군옥(巡軍獄)에 갇혔다가 장류되는 도중 신돈이 보낸 자객에 의해 교살되었다
★김제안(金齊顔)
?∼1368(공민왕 17). 고려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중현(仲顯).
방경(方慶)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상락군(上洛君) 묘(昴)이며, 성균직강(成均直講)을 지낸 구용(九容)의 아우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정도전(鄭道傳)·이존오(李存吾) 등과 친분이 두터웠다.
그뒤 전 밀직부사 김정(金精) 등과 더불어 신돈을 죽이려고 모의하다가 전 홍주목사 정휘(鄭暉)의 고발로 인하여 기밀이 누설되어 왕명으로 순군옥(巡軍獄)에 갇히어 국문을 받고 귀양가던 도중에 신돈이 보낸 사람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야는 모두 신돈의 위세로 무서워 벌벌 떨고 있을 뿐 누가하나 나서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김사렴은 이를 그대로 보고 있지 않았다. 공은 임금께 아뢰기를
"신돈은 바른 사람이 못 되며 후일에 반드시 정사를 혼란에 빠뜨려, 고려 사직이 장차 血食(피묻은 산 짐승을 제물로 바치어 제사 지냄)을 누리지 못한다." 고 죽기를 무릎쓰고 諫하였다. (♠[대동기문] 참조)
공이 이렇게 정론으로써 그 중절과 기개를 펴자 공의 강직함에 조야가 모두 놀라고 또 한편 칭찬해 마지 않았으며 그 명성이 온 나라에 떨쳤다.
⊙ 김사렴과 공민왕
안렴사공 김사렴은 1330년경에 출생하여 공민왕초(1351-)에 문과에 급제하여 1358년경에는 秘書監(비서감, 고려 때 秘書省 소속의 종 3품 관직)을 역임하고 있고, 1365년에서 1371년 사이에 신돈의 횡포가 극심할 때 신돈을 탄핵하는 직간으로 명성을 떨치었다고 합니다.
공민왕은 1330년에 출생하여 1351년 고려 제31대왕으로 등극하여 1374년에 세상을 뜨게 됩니다.
김사렴은 공민왕과 연배도 비슷하고, 공민왕 초기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지금의 대통령비서실 격인 비서성에서 비서감으로 지내기도 하고, 우사간, 좌사간으로 신돈의 횡포를 직간하여 온나라에 명성을 떨치기도 하는등 공민왕 시절에는 주로 왕의 측근에서 비서 또는 간관으로 활동한 듯 합니다.
⊙ 김사렴 김사안 형제와 김구용 김제안 형제
김사렴이 주로 교유한 정몽주, 이색 등은 척약재 김구용과는 생사를 같이하는 절친한 사이였고,
김사렴의 바로 아래 동생인 김사안이 김구용, 김제안 형제의 큰 매형(매제)인 점,
김사렴과 김제안이 신돈의 횡포에 반대하여 활동한 점 등을 고려할 때
김사렴, 김사안 형제와 김구용, 김제안 형제도 (8촌간) 상당한 교유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으나 관련 자료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김방경- (1/5)김선- (3/4)김승택- (1/2)김묘- (1/3)김구용 (2/3)김제안
*김방경- (3/5)김순- (4/4)김영후- (2/1)김천- (4/2)김사렴 (3/4)김사안
★공민왕 恭愍王 [1330~1374]
고려 제31대 왕(재위 1351∼1374).
호 이재(怡齋)·익당(益堂). 이름 전(勿). 초명 기(祺). 몽골식 이름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 충숙왕의 둘째아들이다. 비는 원(元)나라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이다.
충목왕이 즉위할 때 강릉대군(江陵大君)에 봉해졌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숙위(宿衛)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가서, 노국대장공주와 결혼하였다. 원나라의 지시로 충정왕이 폐위되면서 왕위에 올랐다. 원나라가 쇠퇴해지자 원나라 배척운동을 일으키고, 1352년(공민왕 1) 변발(폴髮) ·호복(胡服) 등의 몽골풍을 폐지하였다.
1356년 몽골 연호 ·관제를 폐지하여 문종 때의 제도로 복귀하는 한편, 내정을 간섭한 정동행중서성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를 폐지하였다. 이어 원나라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고 권세를 부린 기철(奇轍) 일파를 숙청하고, 100년 간 존속한 쌍성총관부를 쳐서 폐지하는 등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였다. 1368년 명(明)나라가 건국하자 이인임(李仁任)을 보내어, 명나라와 협력하여 요동에 남은 원나라 세력을 공략하였다.
1369년 이성계(李成桂)로 하여금 동녕부(東寧府)를 치게 하여 오로산성(五老山城)을 점령, 국위를 크게 떨쳤다.
내정에서는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신돈(辛旽)을 등용하여 귀족이 겸병한 토지를 소유자에게 반환시키고,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을 해방시키는 등 개혁적인 정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그 뒤 홍건적 ·왜구의 계속적인 침범으로 국력이 소모되었고, 1365년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그녀를 추모하여 불사(佛事)에만 전심하였다.
정치를 신돈에게 맡겨 정치가 문란해졌으며,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여 풍기도 문란해졌다. 특히 홍륜(洪倫)이 익비(益妃)를 범하여 임신시키자, 이를 은폐할 의도로 홍륜 ·최만생(崔萬生) 등을 죽이려다가, 그들에게 살해되었다.
그림에 뛰어나 고려의 대표적 화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글씨에도 능하였으며, 특히 대자(大字)에 뛰어났다. 능은 현릉(玄陵)이다. 작품에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국립현대미술관) 《노국대장공주진(眞)》 《석가출산상(釋迦出山像)》 《아방궁도(阿房宮圖)》 《현릉산수도(玄陵山水圖)》 《동자보현육아백상도(童子普賢六牙白象圖)》 등이 있다.
▣ 안렴사공 김사렴의 교유 및 직간 시절의 자료를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여말충의열전 (1995, 고려숭의회)>
젊어서 학문에 정진하여 공민왕 초기에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시랑(정2품)을 역임하고 벼슬이 안렴사에 이르렀다. <♠경현사지>
선생은 문학과 氣節로 세상에서 推重하였으며 정포은 이목은과 친교를 맺고 함께 직언으로 간함으로써 저명하였다. 공민왕14년 (1365) 왕이 신돈을 총애하여 직급을 올리고 공신호를 내리자 선생이 忠奮義激하여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며 이르기를 "신돈은 바른 사람이 못되며 후에 반드시 정치를 어지럽힐 것이요, 그렇게 되면 고려의 사직은 장차 血食을 얻지 못하리이다" 고 하였다. <♠대동기문>
<⊙ 여말의충절 김사렴 (청주교대 교수 김재윤)>
공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文詞에 능하였고 일찍이 공민왕 초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문하시랑, 정당문학, 좌사간, 지제교 등 조정의 요직을 거쳐 안렴사에 이르렀다.
*문하시랑(門下侍郞) : 고려 때 중서문하성의 종1품 벼슬
*정당문학(政堂文學) : 고려·조선시대 관직. 고려 문종(文宗) 때 정원은 1명, 품계는 종2품으로 정하였다. 1275년(충렬왕 1) 참문학사(參文學事)로 개칭하고, 90년 다시 정당문학으로 고쳤다. 충선왕 때 잠시 폐지했다가 뒤에 다시 두어 조선 초까지 명칭과 기능이 이어졌다. 중서문하성의 재신(宰臣)으로 국정을 논의하는 일을 맡았다. 조선 초기에는 문하부(門下府)의 관직으로 존속하였고, 1401년(태종 1) 문하부를 의정부(議政府)로 개칭할 때 의정부문학으로 바뀌었다
*左司諫(좌사간) ; 고려 때 문하부에 소속된 관직. 뒤에 좌헌납(左獻納)으로 개칭.
*知制誥(지제고) ; 고려 때 조서(詔書). 교서(敎書) 등을 지어 왕에게 올리던 관직.
知制敎(지제교) ; 조선 때 왕에게 교서 등을 기록하여 올리는 일을 담당하였으며, 부제학(정3품) 이하 부수찬(종6품)까지가 겸임.
농암 김주, 목은 이색 등 당대의 유명한 선비들과 함께 문정공 신현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는데, 특히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등과 가까이 사귀었다.
?★김주(金輳){3}
생몰년 미상. 고려 말기의 충신. 본관은 선산. 호는 농암(籠巖).
아버지는 예의판서(禮儀判書) 원로(元老)이며, 어머니는 수주김씨(水州金氏)이다.
?★김주(金湊){1}
?∼1404(태종 4).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낙안(樂安).
문과에 급제한 뒤 공민왕 때 성균직강(成均直講)이 되었다.
1366년(공민왕 15) 간관(諫官) 정공권(鄭公權)이 신돈(辛旽)의 죄를 극간한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나, 곧 서용되어 비서감승(#비58書監丞)의 직에 올랐다
★이색(李穡)
1328(충숙왕 15)∼1396(태조5). 고려말의 문신·학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찬성사 곡(#곡13)의 아들로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진사가 되고, 1348년(충목왕 4)원나라에 가서 국자감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351년(충정왕 3)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귀국하여
★정몽주(鄭夢周)
1337(충숙왕 복위 6)∼1392(공양왕 4). 고려의 문신·학자. 본관은 영일(迎日). 경상도 영천출생. 초명은 몽란(夢蘭) 또는 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습명(襲明)의 후손으로 운관(云瓘)의 아들이다.
신현선생은 일찍이 원나라에 건너가 왕의 사부로 대접받았었고 국내에서는 정몽주, 원천석, 김진양, 이색 등 당대의 거유들을 길러낸 대학자였는데, 여말에 김사렴을 비롯해서 많은 충신 열사들이 배출되었던 것도 이분의 높은 가르침에 감화를 많이 받은 것이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 신현
★원천석(元天錫)
1330(충숙왕 17)∼? 고려말과 조선초의 은사(隱士).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
고려말에 정용별장(精勇別將)을 지낸 열(悅)의 손자이며, 종부시령(宗簿寺令)을 지낸 윤적(允迪)의 아들로 원주원씨의 중시조이다
★김진양(金震陽)
?∼1392(태조 1). 고려 후기의 문관. 자는 자정(子靜), 호는 초려(草廬).
성품이 강개하며 출중하였다. 어려서 고아가 되었으나 학문에 힘써서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이 되었다.
공은 외모에서 풍채와 위엄이 있었고, 한 인간으로서 마음 씀씀이가 크고 넓었으며, 공직에 나아가서는 오직 충절로 신명을 다하였고, 외직에 있을 때에는 백성들을 보살피고 어루만지는 데 온 정성을 쏟아 그 이름을 온 세상에 떨쳤다. (風采嚴威 器度弘傅 奉公以誠 按民盡力 名重當世 : ♠조선명신록, ♠해동인물지 참조)
또한 공을 주벽으로 모시고 있는 ♠송천서원 상량문에는 공에 대해서 이르기를,
"사람된 바탕과 성품이 쇠붙이나 옥덩어리처럼 굳세고 알차며, 그 지조와 기개는 찬서리 속에 우뚝 솟아 있는 소나무 같고, 곧은 정신은 항상 진나라 五柳선생을 흠모하였고, 주나라 곡식을 먹기 부끄러워하였던 백이 숙제의 기풍을 지녔다. " 고 하였다.
공이 이와 같이 충군 애국에 일생을 일관하였고, 높은 기개를 지녔던 것은 위에서 언급하였던 바와 같이 공의 고조부 김방경 이래 조상들의 훌륭한 가풍 속에서 성장해 온 것도 중요한 요인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공의 기풍은 여말 요승인 신돈의 일에서 그 진면목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주지하는 대로 신돈은 공민왕의 총애를 받으면서부터 갖가지 못된 짓을 자행하였다.
더구나 임금의 사부가 되고, 1365년(공민왕14년)에 큰 벼슬 (벽상삼한 삼중대광 집현전 태학사)과 수정이순 논도변리 보세공신이란 호를 받고 영도첨의사사사가 된 뒤에 인사권을 비롯한 강력한 권력을 장악했을뿐 아니라, 왕을 대신하여 백관의 조례를 받는등 무례 방자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도 왕은 남몰래 미행으로 자주 신돈의 집에 나가서 함께 공을 치고(격구) 연등회와 같은 큰 잔치를 펼치는가 하면, 경기에 대한 상품으로 은병, 말안장 말(안마), 비단과 주단 등을 많이 하사하였다
이러한 일은 군신간에 있을 수 없는 것임은 물론 정사를 어지럽히는 일인 동시에 당시 신돈의 횡포가 얼마나 자심했던가 하는 점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일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신돈의 위세에 영합하여 그를 추종하는 자가 없지 않았으나 조정의 뜻있는 선비들은 이를 좌시하지 않았다.
1366년(공민왕15년) 에 좌사의대부인 정추와 좌정언 이존오 등이 신돈의 부당함을 거론하였다가 정추는 도리어 경상도 동래로 쫒겨가고, 이존오도 직위가 강등되어 장사의 감무로 축출당하였다. (이들은 그 뒤에 귀양지에서 죽음)
★ 신돈 辛旽 [?~1371]
본관 영산(靈山). 속성 신(辛). 자 요공(耀空), 법명 편조(遍照), 돈(旽)은 퇴속하여 고친 이름. 호 청한거사(淸閑居士). 계성현(桂城縣) 옥천사(玉川寺) 사비(寺婢)의 아들.
김원명(金元命)의 추천으로 공민왕(恭愍王)으로부터 신임을 받고 사부(師傅)로서 국정을 맡았다. 1365(공민왕 14) 진평후(眞平侯)라는 봉작까지 받아 가며 정치개혁을 단행하였는데, 그의 개혁정치는 고려 내부의 혼탁한 사회적 적폐(積弊)를 타개,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것으로,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이라는 토지개혁 관청을 두어 부호들이 권세로 빼앗은 토지를 각 소유자에게 돌려주고, 노비로서 자유민이 되려는 자들을 해방시켰으며, 국가재정을 잘 관리하여 민심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급진적 개혁은 상층계급의 반감을 샀고, 왕의 신임을 기화로 점차 오만해져서 방탕과 음란을 일삼았으므로 점점 배척을 당하게 되었다. 영록대부집현전대학사(榮祿大夫集賢殿大學士)가 되어 1369년(공민왕 18)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로 왕을 유혹, 서울을 충주(忠州)로 옮길 계획을 세우고 스스로 오도도사심관(五道都事審官)이 되려다 왕의 불신을 받았다. 그러자 왕을 살해하려는 역모(逆謀)를 꾸며 권력을 되찾으려 하였으나 발각되어 수원(水原)에 유폐되었다가 1371년에 처형되었다.
★정공권(鄭公權)
1333(충숙왕 복위 2)∼1382(우왕 8). 고려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초명은 추(樞). 자는 공권(公權)인데, 뒷날 자를 이름으로 썼다. 호는 원재(圓齋).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보(溥)의 아들이다.
1353년(공민왕 2) 문과에 급제하였고 예문검열을 거쳐 좌사의대부에 올랐다.
1366년 이존오(李存吾)와 함께 신돈(辛旽)을 탄핵하다가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였으나, 이색(李穡)의 구원으로 동래현령으로 좌천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1371년 신돈이 제거된 뒤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다시 발탁되었다.
★이존오(李存吾)
1341(충혜왕 복위 2)∼1371(공민왕 20).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경(順卿), 호는 석탄(石灘)·고산(孤山).
1360년(공민왕 9)문과에 급제, 수원서기(水原書記)를 거쳐 사관(史官)에 발탁되었다.
1366년 우정언이 되어 신돈(辛旽)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샀으나, 이색(李穡) 등의 옹호로 극형을 면하고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
※영환종친께서 게재한 20.上洛君(金昴) 設壇 墓碑文에 보면
제 6서는 석탄 李存五之弟 보문각 교감 경주인 존사요,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즉 김구용의 아버지의 여섯 번째 사위는 이존오의 동생 이존사이다.
제 1서는 재신 김사안이나 무후하고,
제 2서는 충혜공 경주인 이제현지 三子 찬성사 장로요,
제 3서는 문정공 전주인 최재之子 찬성사 평도공 유경이요,
제 4서는 한성판윤공 양천인 허 호이며,
제 5서는 양천군 허순之子 선이니 무후라.
제 6서는 석탄 李存五之弟 보문각 교감 경주인 존사요,
제 7서는 문민공 김광철 之孫 예조전서 예문관 제학 광산인 김섬이며,
제 8서는 사윤공 김수천이요,
제 9서는 부정공 화순인 최자하이다.
이밖에도 오인택, 경천흥, 김원명 등이 신돈을 제거하려고 밀의하다가 발각되어 장류를 당했으며, 1368년 10월에도 김정, 김흥조, 김제안(김구용 제) 등이 그를 죽일 것을 모의하다가 그 계획이 누설되어 역시 장류되던 중에 살해를 당하였다.
★오인택(吳仁澤)
생몰년 미상. 고려의 무신.
신돈(辛旽)의 집권 뒤 풀려나와 지도첨의(知都僉議)가 되었으나 전시중(前侍中) 경천흥(慶千興), 전평리(前評理) 목인길(睦仁吉) 등과 신돈의 제거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1367년 상주로 장배(杖配)되고, 가산이 적몰되었다.
뒤에 신돈이 그를 죽이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탈출하여 숨었으나 다시 잡혀 사리성(思利城)의 봉졸(烽卒)로 장배되었다
★경복흥(慶復興)
?∼1380(우왕 6). 고려의 재상. 본관은 청주. 초명은 천흥(千興). 아버지는 우대언(右代言) 사만(斯萬)이다. 벼슬을 여러 번 옮겨 감찰·장령이 되었고, 1354년(공민왕 3)에는 군부판서(軍簿判書)가 되었다.
※ 경복흥은 초명이 천흥으로 우리 가문의 중시조 김방경의 외증손자이다.
*김방경- 여(안동김씨)+경수- 경사만- 경복흥
1365년에 수시중(守侍中)이 되었으나, 그때는 신돈(辛旽)이 권세를 부리고 있었으므로 비록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정사에 참여하지 못하고, 마침내 신돈의 배척을 받아 파직되고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367년 오인택(吳仁澤)·안우경(安遇慶)·김원명(金元命) 등과 신돈을 제거하려다가 일이 누설되어, 장형을 받고 흥주(興州)로 귀양가고 그 집은 적몰(籍沒)되었다.
1371년 신돈이 제거되자 소환되어 다시 좌시중에 제배되고, 정방(政房)의 제조(提調)를 겸하며 전선(銓選)을 맡았다.
★김원명(金元命)
?∼1370(공민왕 19). 고려 말기의 공신. 본관은 화평(化平). 중찬(中贊) 지숙(之淑)의 손자이며, 찬성사(贊成事) 인연(仁沇)의 아들이고, 속명(續命)의 형이다.
그리고 그가 천거하였던 신돈(辛旽)이 왕의 총애를 받자 1365년 삼사좌사응양군상호군(三司左使鷹揚軍上護軍)에 제수되어 8위(八衛) 42도부(四二都府)의 병권을 장악하였다. 뒤에 오인택(吳仁澤) 등과 함께 신돈을 제거하려는 모의를 하였으나, 발각되어 영덕에 유배되었다가, 신돈의 당류(黨類)인 손연(孫演)에 의하여 장살(杖殺)되었다.
★김정(金精){3}
?∼1368(공민왕 17). 고려 말기의 문신. 좌부대언(左副代言)·좌대언(左代言)·밀직부사(密直副使)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1365년(공민왕 14)에 황원군(黃原君) 최백(崔伯)과 함께 성절사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1368년 김흥조(金興祖)·조사공(趙思恭)·유사의(兪思義)·김제안(金齊顔)·김구보(金龜寶)·이원림(李元林)·윤희종(尹希宗)·조린(趙璘)·김광재(金光載) 등과 함께 신돈(辛旽)을 죽일 것을 모의하였는데, 조사공이 이 사실을 자기와 평소 친히 지내고 있던 홍주목사(洪州牧使) 정운(鄭#운16)에게 말하자, 정운은 밀직제학(密直提學) 한천(韓#천46)과 더불어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 이춘부(李春富)에게 밀고하였으며, 이춘부가 궁궐에 들어가 왕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왕명으로 순군옥(巡軍獄)에 갇힌 뒤 유배되었고, 신돈에 의하여 일당과 더불어 죽음을 당하였다.
※ 영환 종친께서 소개하신 "소천서원과 청원정 (蘇川書院과 淸遠亭)" 내용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가야리에는 이곳 龍宮全氏(용궁전씨)의 시조이신 菊波 全元發(국파 전원발) 선생은 모신 서원이 있다. 전원발 선생과 척약재 김구용 선조와는 각별한 사이었으며,
더욱이 우리 안동김문의 장손은 方慶(방경)- (선)- 資(자)- 爲(위)- 得男(득남)- 精(정)으로 이어오다 金精공은 척약재의 아우인 金齊顔공과 더불어 신돈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김정공의 후손은 수안김씨로 , 김제안공의 후손은 사천김씨로 분적하였다. 바로 안동김문의 장손인 김정공의 배위가 국파 전원발선생의 따님이었다.
사천김씨 시조 김부(金阜)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아들인 김은열의 13세손이다. 김부의 자는 유돈(惟敦), 시호는 정의(貞義)다
김부는 안동김씨의 중시조인 김방경의 6세손이기도 하다. 고려말 김방경의 현손(★5세손)으로 판도판서의 관직에 있던 김제안(金濟顔)은 신돈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살해되었다. 이 사건으로 그 아들 김부도 사성(泗城)으로 귀양갔으나 정사왜구의 난때 전공을 세워 공양왕으로부터 사성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뒤 후손들이 사천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나왔다. 사성은 경남 泗川의 옛이름이다.
★김흥조(金興祖)
?∼1368(공민왕 17).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문하시중 태현(台鉉)의 손자이며, 첨의평리(僉議評理) 광재(光載)의 아들이다. 재주가 뛰어나고 지조가 있어 군기감을 거쳐 수원·해주의 수령을 지냈다.
1361년 10월 10만의 홍건적이 쳐들어와 개성을 위협하자 수원부사로서 왕을 모시고 복주(福州:지금의 안동)까지 호종한 공으로 신축호종공신(辛丑扈從功臣)2등에 서훈되었다.
그러나 1368년 전 밀직부사(密直副使) 김정(金精)·조사공(趙思恭)·유사의(兪思義)·김제안(金齊顔)·김구보(金龜寶) 등과 함께 신돈(辛旽)을 살해하기로 한 모의가 누설되어 순군옥(巡軍獄)에 갇혔다가 장류되는 도중 신돈이 보낸 자객에 의해 교살되었다
★김제안(金齊顔)
?∼1368(공민왕 17). 고려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중현(仲顯).
방경(方慶)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상락군(上洛君) 묘(昴)이며, 성균직강(成均直講)을 지낸 구용(九容)의 아우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정도전(鄭道傳)·이존오(李存吾) 등과 친분이 두터웠다.
그뒤 전 밀직부사 김정(金精) 등과 더불어 신돈을 죽이려고 모의하다가 전 홍주목사 정휘(鄭暉)의 고발로 인하여 기밀이 누설되어 왕명으로 순군옥(巡軍獄)에 갇히어 국문을 받고 귀양가던 도중에 신돈이 보낸 사람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야는 모두 신돈의 위세로 무서워 벌벌 떨고 있을 뿐 누가하나 나서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김사렴은 이를 그대로 보고 있지 않았다. 공은 임금께 아뢰기를
"신돈은 바른 사람이 못 되며 후일에 반드시 정사를 혼란에 빠뜨려, 고려 사직이 장차 血食(피묻은 산 짐승을 제물로 바치어 제사 지냄)을 누리지 못한다." 고 죽기를 무릎쓰고 諫하였다. (♠[대동기문] 참조)
공이 이렇게 정론으로써 그 중절과 기개를 펴자 공의 강직함에 조야가 모두 놀라고 또 한편 칭찬해 마지 않았으며 그 명성이 온 나라에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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