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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봉(南峰)김홍도(金弘度,)의 증 영의정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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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4-10-22 11:52 조회2,309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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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운관정공 후손 남봉공 김홍도 선조님의 증 영의정 기록입니다.


김홍도의 묘갈명(墓碣銘)

저자;허목(許穆)

본관;안동(安東)  이명 자 : 중원(重遠) 호 : 남봉(南峰)

 원전서지;국조인물고 권48 을사 이후 이화인(乙巳以後罹禍人)

 

 김전한 묘갈문(金典翰碣 )

공의 휘(諱)는 홍도(弘度), 자(字)는 중원(重遠), 호는 남봉(南峰)이고 성은 김씨(金氏)이다. 김씨의 관향은 안동(安東)인데 본래 신라(新羅)의

후손이다. 고려(高麗) 말엽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김장(金萇), 서운관 정(書雲觀正) 김수(金綏)가 있었는데, 이분들이 공의 7대조와 6대조

이다. 서운관 정이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김질(金晊)을 낳고, 집의가 관찰사(觀察使) 김자행(金自行)을 낳았는데, 이분들이 모두 본 조선조

(朝鮮朝)에서 벼슬하였다. 관찰사가 양주 목사(楊州牧使) 김숙연(金叔演)을 낳고, 양주 목사가 대사헌(大司憲) 김희수(金希壽)를 낳고, 대사헌

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김노(金魯)를 낳았는데, 이분들이 모두 문학과 초서(草書), 예서(隸書)로 후세에 저명하였다. 첨지공(僉知公)이
직제학(直提學)에서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승진되어 서반(西班)에 있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이분이 공의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광주 이씨(廣州

李氏)이고 외할아버지는 한평군(漢平君) 이성언(李誠彦)이다. 명 세종(明世宗) 가정(嘉靖) 3년인 갑신년(甲申年, 1524년 중종 19년)에 공이 태

어났는데, 재주와 학문으로 일찍부터 큰 명성이 났었다. 우리 공헌왕(恭憲王, 명종(明宗)) 원년인 병오년(丙午年, 1546년)에 나이 23세로 진사

(進士) 시험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3년인 무신년(戊申年, 1548년)에 또 대과(大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명성이 일시에 크게 났고 항상 경연

(經筵)에서 임금을 모시었다. 10년인 을묘년(乙卯年, 1555년 명종 10년)에 왜구(倭寇)가 침범하자 크게 군사를 동원하여 토벌할 때 공이 어사

(御史)로 영남(嶺南)의 군사를 감독하였다. 그 이듬해 병진년(丙辰年, 1556년 명종 11년)에 호당(湖堂)에 있을 때 임금이 중귀인(中貴人)을 파

견하여 책문(策問)을 시험보이자, 공이 수천 마디의 말을 건의하고 이어 나라가 위태롭고 망할 수 있는 열 가지 일에 대해 개진하면서 정사의 폐

단을 극구 말하였는데, 말뜻이 엄정하였으므로 일시의 사람들이 매우 놀랐다. 그 글에 대해 ‘김홍도의 문장은 김일손(金馹孫), 박은(朴誾)과 막상
막하(莫上莫下)이고 훨씬 더 널리 안다.’고 평가되었으나, (왕실의) 외척인 의정(議政) 윤원형(尹元衡)이 공을 미워하여 참소하였고 또 모함하는
사람이 있어 천여 리의 북변(北邊) 갑산(甲山)으로 귀양 가 세상을 떠났다. 공이 벼슬길에 나간 지 겨우 10년 만에 벼슬이 전한(典翰)에 이르렀

고 나이 34세에 양주 남쪽 70리 문개동(文介洞)에 전 부인과 같이 묻히었다. 그 뒤 윤원형이 패배하자 공의 관작이 환원되었고, 또 그 뒤에
작은

아들 김수(金睟)의 귀(貴)로 인해 영의정(領議政)의 벼슬까지 추증(追贈)되었다.

 

공이 처음에 평창 이씨(平昌李氏)에게 장가들어 교리(校理) 김첨(金瞻)을 낳고, 두 번째 한산 이씨(韓山李氏)에게 장가들어 판중추부사(判中樞

府事) 김수(金睟)를 낳고, 세 번째 평산 신씨(平山申氏)에게 장가들어 자식이 없이 의절(義絶)하였다. 김첨은 2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정자

(正字) 김성립(金誠立), 군수(郡守) 김정립(金正立)이고, 딸은 판서(判書) 이경전(李慶全), 박돈(朴燉)에게 시집갔다. 김정립은 김진(金振), 김

식(金拭), 김위(金撝)를 낳았는데, 김진은 관찰사(觀察使)로 백부(伯父) 김성립의 후사가 되었고, 김식은 생원(生員)이고, 김위는 감찰(監察)이

다. 3녀는 교관(敎官, 내시 교관(內侍敎官)) 이제항(李齊沆), 군수(郡守) 나반(羅襻), 승지(承旨) 조성(趙)에게 시집갔다. 이경전은 이후(李厚),

이구(李久), 이부(李阜), 이유(李卣), 이무(李袤)를 낳았는데, 이후는 정랑(正郞)이고 이구는 한림(翰林)이고 이부는 진사(進士)이고 이무는 대

사헌(大司憲)이다. 딸은 참판(參判) 조수익(趙壽益)에게 시집갔다. 김진은 김대성(金大成), 김대유(金大猷), 김대지(金大智)를 낳고, 김식은 김

대경(金大鏡)을 낳고, 김위는 김대뢰(金大), 김대석(金大錫)을 낳았다. 김수는 김경립(金敬立), 김의립(金義立), 김신립(金信立)을 낳았는데, 김

경립은 좌랑(佐郞)이고 김신립은 감찰(監察)이다. 딸은 교리(校理) 박지(朴篪)에게 시집갔다. 김경립의 아들은 김잉(金礽)인데, 아들이 없고 딸

은 교관(敎官) 윤부(尹璷)에게 시집갔다. 김의립의 딸은 현감(縣監) 유성(柳惺)에게 시집갔다. 김신립은 김비(金祕), 김개(金祴)를 낳았는데 김

개는 판관(判官)이다. 박지의 딸은 동중추(同中樞) 이호(李灝)에게 시집갔다. 김개는 김형중(金衡重), 김중윤(金重胤)을 낳았는데 김중윤은 당

숙부(堂叔父) 김잉의 후사가 되었고, 김형중은 상식사 봉사(尙食司奉事)이다. 안팎 자손은 4대에 걸쳐 36명 중 11명이 저명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그 명예가 영구히 가니 단명해도 상심할 것 없도다. 아! 천도(天道)는 선(善)을 도우니 그 후손 필시 창성하리라.

 

댓글목록

김상호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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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미수기언에서 남애공 김홍도 할아버님의 귀중한 자료를 찾아 주시어 대단히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활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석릉세적과 파보기록에만 의존했는데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