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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안사연 하계 답사 보고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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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14-06-10 05:18 조회4,561회 댓글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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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안사연 하계 답사 보고 03

◆ 두릉리 입향조, 참의공(휘 彦沉) 묘역

안산지역 답사를 마치고 광교신도시의 참의공종중 선영에 도착한 것은 대략 1시간 만인 14:40분경입니다. 묘역으로 올라가는 길 입구에 참의공(휘 彦沉) 신도비가 서 있습니다. 한자를 잘 모르는 후세를 위해 한글로 새겼습니다. 참의공 묘역은 광교신도시 솔내공원에 자리잡고 있으며, 수원시 향토유적 제2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 참의공(휘 언침) 묘역과 효헌공(휘 찬) 묘소 지도. 참의공 신도비 바로 앞 도로에 차를 세우고 묘역으로 올라갔다.


▲ 참의공(휘 彦沉) 신도비. 묘역으로 올라가는 솔내공원 도로가에 세워져 있다.


▲ 참의공(휘 언침) 묘소. 두릉리 입향조로 1548년(명종 3년) 아원(亞元)으로 급제한 뒤 선정을 베풀어 명성을 드날렸다.


▲ 남쪽으로 뻗은 지맥을 따라 참의공(휘 彦沉), 증손자 부호군공(휘 鎬), 아드님 현감공(휘 瑾), 손자 판결사공(휘 孝建)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 참의공(휘 언침) 묘소 후경

광교산 지맥이 남쪽 승지골로 뻗어 내린 아늑한 능선의 묘역 가장 위쪽에 참의공 묘소가 있으며, 그 바로 아래 쌍분이 증손자 부호군공(휘 鎬) 내외분 묘소입니다. 그리고 아래쪽으로 얼마간 떨어져서 아드님 현감공(휘 瑾) 묘소와 손자 판결사공(휘 孝建) 묘소가 있습니다. 계대는 다음과 같습니다.

------대사헌공(휘 誠童) → 2子 부호군공(휘 濾) → 2子 참의공(휘 彦沉) → 2子 현감공(휘 瑾) → 1子 판결사공(휘 孝建) → 1子 부호군공(휘 鎬)

수원 이의동 두릉리 입향조이신 참의공은 통정대부 형조참의를 역임하고, 효헌공(휘 瓚)의 존귀로 영의정에 추증되었습니다. 1543년(중종 38년) 진사시를 거쳐 1548년(명종 3년) 문과에서 을과(乙科) 1위인 아원(亞元)으로 급제하여 명성을 드날렸습니다. 당시 장원은 서운관정공파 휘 홍도(弘度) 할아버님으로 글씨로 유명한 첨추공(휘 魯)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처럼 우리 선조님 두 분이 1ㆍ2등을 차지하셨으니 그 영광은 더할 나위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일송 심희수 선생의 부친 심건(沈鍵) 선생은 참의공과 진사시와 문과 동년이기도 합니다. 이런 인연으로 손자 판결사공(휘 孝建)이 심희수 선생의 아우 심창수 선생의 따님과 혼례를 올리게 됩니다. 참의공 묘소에서는 영국 전 문온공파 회장께서 헌작하셨습니다. 오락가락하던 빗방울이 어느새 가랑비로 변해 있습니다.


▲ 영국 전 문온공파 회장의 헌작


▲ 봉회 대종회장과 재광 전 문영공종회 회장


▲ 참의공(휘 언침) 묘소에서 답사팀 기념촬영


▲ 참의공(휘 언침) 급제기록이 적힌 명종 3년 문과방목

대사헌공 묘역을 소개하면서 잠깐 말씀드렸듯이 참의공께서는 맏형 휘 언필(彦泌) 공께서 아드님이 없이 일찍 돌아가시자 지극정성으로 형수님을 받들고, 외직으로 나가실 때에는 형님의 위패를 모시고 다니실 정도로 우애가 돈독하셨습니다. 문과 급제 직후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고 형님마저 일찍 유명을 달리하시자 형제분의 그리움이 더욱 각별했을 것입니다. 여주목사로 재임하실 적에 그 고을의 불효자를 형벌로 다스리지 않고도 개과천선시킨 일화를 보면 참의공의 성품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40여 년 동안 벼슬살이를 하시면서도 전답이 한 이랑도 더 늘지 않았으며, 집은 서까래 하나도 더 보태지 않을 정도였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청렴한 목민관으로 일생을 마치셨습니다.
봉분은 배위 증정경부인 전의이씨와 합장으로 모시고, 묘역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 문방석(文房石),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이 배치돼 있습니다. 문방석은 선비들이 책이나 벼루 등을 올려놓던 경상(經床)을 본떠 만든 석물입니다. 주로 문신(文臣) 묘소에서 발견된다고 합니다. 문방석에는 대체로 안상문(眼象文 : 코끼리 눈 모양의 문양)을 새긴다고 합니다. 이 문방석은 효헌공 묘소에도 1기가 놓여 있습니다.


▲ 참의공 묘소의 문방석(왼쪽)과 효헌공 묘소의 문방석


▲ 효헌공 묘소의 문방석. 대체로 안상문(眼象文 : 코끼리 눈 모양의 문양)을 새긴다.

묘비는 1948년에 세웠으나, 비문 내용은 효헌공의 막내 사위인 용주 조경(趙絅) 선생이 지은 글입니다. 더욱이 이 비문은 방대한 분량의 용주선생문집에도 실려 있지 않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글입니다. 글씨는 완산후인(完山后人) 이기선(李箕善) 선생의 필적입니다.
참의공은 아드님 세 분 교위공(휘 琳), 현감공(휘 瑾), 효헌공(휘 瓚)과 따님 한 분을 두셨는데, 교위공은 처가인 경북 영주로 이거(移居)하여 그 후손들이 오늘날까지 영주지역에서 세거하고 있습니다. 교위공의 아드님이 바로 진사공(휘 慶建)으로 충렬공 묘소를 수호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신 분입니다(『충렬공김방경자료집성』의 충렬공 묘소 수호에 관한 내용 참조). 참의공 묘소 참배 기념으로 단체사진을 촬영하고 바로 아래 부호군공(휘 鎬) 묘소로 자리를 옮깁니다.

 

◆ 우리 문중역사의 한 단면, 부호군공(휘 鎬) 묘소

참의공의 증손자 부호군공(휘 鎬)의 묘소는 우리 문중역사의 한 단면이 담겨 있습니다. 판결사공(휘 孝建)과 8촌간인 낙서공(휘 自點)이 역모로 몰려 돌아가실 당시 그 화가 우리 문중 전반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부호군공 역시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증영의정이신 참의공 묘 앞에 모셨다고 합니다. 참배 일행이 큰절로 참배하고 아래쪽 현감공과 판결사공 묘소로 이동합니다.


▲ 참의공의 증손자 부호군공(휘 호)과 배위 덕수이씨 묘소


▲ 위쪽이 참의공(휘 언침) 묘소, 아래쪽이 부호군공(휘 호) 묘소이다.

 

 

◆ 율곡ㆍ서애ㆍ학봉ㆍ오리 선생의 동년, 현감공(휘 瑾) 묘소


▲ 현감공(휘 근) 묘소. 계배 언양김씨와 합장으로 모셨다가 2000년 봄에 안산의 밀양박씨 묘소를 천봉하여 세 분을 합장으로 모셨다.

부슬비가 제법 굵어져 머리 위에서 빗방울이 방울방울 어깨 위로 떨어집니다. 현감공(휘 瑾) 묘소는 본래 계배 언양김씨와 합장으로 모시고, 먼저 돌아가신 초배 밀양박씨는 이숙번 선생 묘역 인근에 묘소가 있었습니다. 2000년 봄에 밀양박씨 묘역을 관통하는 2차선 도로가 생기면서 밀양박씨를 이곳 현감공 묘소로 천봉하여 세 분을 합장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이때 밀양박씨 묘소에 있던 석물도 옮겨왔는데, 상석은 현감공 묘소에 있는 상석 오른쪽에 놓고, 망주석은 본래 있던 망주석과 문인석 사이에 배치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에 현감공 묘소의 석물이 다른 분들 묘소와 달라지게 된 것입니다. 초배 밀양박씨는 첨지중추부사 박선원(朴善元) 선생의 따님이며, 계배 언양김씨는 김복흥(金復興) 선생의 따님입니다. 현감공 묘소에서는 재광 전 문영공회장께서 헌작하셨습니다.


▲ 재광 전 문영공종회 회장의 헌작

현감공은 1564년(명종 19년) 진사시에 합격하셨는데, ‘9도 장원’으로 불린 율곡 이이 선생이 현감공 동년입니다. 그 2년 뒤인 1566년(명종 21년)과 1567년에 율곡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 머물렀는데, 참의공께서 강릉부사로 재임 중이라 현감공도 강릉에 머물면서 서로 왕래하며 학문을 논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동년 관계를 뛰어넘어 그 이상의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자명한 일이겠지요. 현감공의 장손자 부호군공(휘 鎬)의 배위가 덕수이씨 이희원 선생의 따님이신데, 혹시 두 분의 밀접한 관계로 인해 혼인이 이루어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 현감공(휘 근) 진사시 합격기록이 적힌 명종 19년 사마방목

이런 인연으로 참의공은 율곡 선생의 아우 이우 선생과도 친밀한 관계를 이루게 됩니다. 이우 선생은 어머니 신사임당의 그림 솜씨를 물려받은 때문인지 그림과 시에 뛰어난 분입니다. 이우 선생의 문집 옥산시고에 ‘삼척군수 영감의 시운을 차운하다’라는 시가 실려 있는데, 당시 삼척군수가 바로 참의공(휘 彦沉)의 진사시 동년인 조징 선생입니다. 이때 현감공과 이우 선생은 함께 죽서루로 찾아가는 길에 조징 선생을 방문하게 되는데, 두 분의 대화가 참 멋들어집니다. 이우 선생이 현감공께 “조 영감은 시도 잘하고 술도 잘 마셔서 대적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라고 하자, 현감공이 웃으시며 “술이야 내가 감당할 테니, 시는 그대가 감당하시구려.”라고 하셨답니다.
율곡 선생 외에도 서애 유성룡, 성암 김효원, 학봉 김성일, 남악 김복일, 신안동김씨 사미당 김극효 선생 등이 모두 진사시 동년입니다. 그뿐인가요! 오리 이원익 선생은 생원시에 합격하여 역시 현감공과 동년이 됩니다. 현감공은 진사시, 이원익 선생은 생원시로 응시과목이 달랐지만, 옛날에는 같은 해 같은 과거에 합격하면 서로 동년이라 했답니다. 이 때문에 현감공의 아우 효헌공(휘 瓚)은 이원익 선생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고, 나아가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나라의 큰 재난을 수습하는 데 합심하게 됩니다. 이처럼 오늘날까지 명성을 드날리는 쟁쟁한 분들과 과장(科場)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시느라 현감공께서는 대과(大科) 초장에 합격하시고도 마지막 문턱에서 아깝게 고배를 마시기도 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현감공은 단 한 발짝도 관할구역인 포천 관내를 벗어나지 않고 백성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한편 연로하신 어머니를 포천 인근으로 모셔와 전란을 피하게 하셨습니다. 그 후 포천현감이 무관(武官)으로 교체되자 강화에 피신 중이던 어머니를 모시고 충남 보령으로 거처를 옮기는 등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셨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체찰사 윤두수 선생이 진휼사 권징 선생 휘하에서 일을 맡아보게 주선해서 홍성으로 이사를 하시게 되었답니다. 때마침 광해군의 동궁분조(東宮分朝)가 홍성에 도착해 현감공은 동궁분조의 무군동랑청(撫軍同郎廳)으로서 전쟁과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구제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평안도 의주로 파천하면서 광해군을 세자로 삼아 종묘사직을 받들고 본국에 머물도록 했는데, 이때 조정을 나누어 의주의 행재소(行在所)를 ‘원조정(元朝廷)’이라 하고, 광해군이 있는 곳을 ‘분조(分朝)’라 하였습니다. 무군동랑청은 임시 관직이었는데, ‘무군(撫軍)’은 세자가 임금을 따라 종군하는 일을 뜻하는 말입니다.
동궁분조가 홍성에 머물면서 민심을 다독이고 백성들을 구제하는 사업을 펼치자 굶주림에 지친 백성들이 각지에서 대거 몰려들면서 돌림병이 창궐하였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현감공께서는 손수 미음을 쑤고 열병을 앓는 백성들을 밤낮으로 돌보면서 수많은 생명들을 살려내셨습니다. 하지만 현감공 자신은 돌림병에 감염돼 끝내 하세하시고 말았습니다. 현감공께서 순직하실 당시 큰아드님 판결사공은 불과 11살이었으니 집안이 크나큰 어려움에 직면한 시기였습니다. 다행히 먼 친인척과 현감공께서 관직생활을 할 당시 은혜를 베풀었던 백성들의 도움으로 홍성에 장지를 마련해 무사히 장례를 치렀다고 합니다. 그 후 아드님 판결사공이 장성하여 1629년(인조 7년) 11월 현감공의 배위 언양김씨께서 돌아가시자 선영 아래 빈장(殯葬)한 뒤 이듬해 1630년 2월 홍성에 모셨던 현감공 묘소를 천봉하여 지금 이 자리에 합장으로 다시 모시게 되었습니다.

◆ 뛰어난 시인, 판결사공(휘 孝建)의 品자형 묘소

참의공 자손은 상당히 적은 편이었습니다. 큰아드님 교위공(휘 琳)은 진사공(휘 경건) 한 분, 둘째 아드님 현감공은 판결사공(휘 孝建)과 선교랑공(휘 忠建) 두 분, 효헌공은 시은공(市隱公 : 휘 弘建) 한 분만을 두셨으니, 아드님 세 분에 손자는 불과 네 분이었습니다. 이처럼 가까운 피붙이가 적은 데에다 교위공은 영주로 이거하시고,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판결사공이 실제로 의지할 분은 작은아버님 효헌공뿐이었습니다. 그나마 효헌공은 오랜 세월 전란을 수습하느라 잠시도 집안을 돌볼 틈이 없었던 데에다 1599년(선조 32년) 12월에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이때 판결사공은 불과 16세로 혼례를 올리기 전이었습니다. 손윗분으로는 사촌형님이신 시은공(휘 弘建 : 효헌공 외아드님) 한 분이었습니다. 형편이 이러하였으니 소년 시절 판결사공을 비롯한 집안의 고충은 이루 헤아리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판결사공은 13세에 ‘붉은 게가 살지는 계절 늦벼가 향기롭다(紫蟹肥時晩稻香)’라는 시를 지어 집안 어른들을 놀라게 함으로써 ‘김무적(金無敵)’이라는 별호를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뒤 판결사공은 학문에 힘써 24세인 1607년(선조 40년) 승보시에서 절친한 벗 동주 이민구 선생에 이어 2등을 차지하고, 2년 뒤 1609년(광해군 1년) 진사시에 합격하셨습니다. 당시 생원시 장원은 김시주 선생, 진사시 장원은 이민구 선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집안의 어려움 속에서 연로하신 어머니를 봉양하느라 하급관원 생활을 이어나가다가 1624년(인조 2년)이 되어서야 삼가현감 재임 중 문과에 급제하여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 판결사공(휘 효건) 급제기록이 적힌 인조 2년 갑자별시(甲子別試) 방목

이후 판결사공은 삼가현감으로 재임 중 충익공(휘 時讓)과 함께 충렬공 묘소 수호에 기여하는 한편 충익공께서 경주에 경순왕 영당을 중건하자 그 중건기(경순왕영당중건기)를 짓기도 하셨습니다. 이 글이 판결사공종중의 전래 고문서와 우리 보책은 물론 신라김씨 각 성씨 보책에 실려 있기도 합니다. 판결사공은 청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늦게 급제하신 탓에 벼슬은 판결사에 그쳤으나, 춘추 80세에 아드님이 상소를 올려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가 되셨으며, 1666년(현종 7년) 83세를 일기로 하세하셨습니다.
판결사공 묘소는 봉분을 나란히 모시지 않아 눈길을 끄는데, 돌아가실 때 초배 청송심씨 서쪽에 봉분을 조성해 “훗날 品자 형태로 무덤을 쓰라.”고 하신 유언에 따른 것이라고 재용 회장께서 내력을 들려 주십니다. 판결사공 봉분을 바라보고 동쪽이 초배 청송심씨, 서쪽이 나주박씨 봉분입니다. 석물은 상석, 향로석, 혼유석, 망주석만 있을 뿐 묘갈이나 비석이 없습니다. 판결사공이 돌아가시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비석을 세우고자 7대손 생원공(휘 熽)이 해은 강필효 선생에게 묘비문을 부탁했는데, 그 글이 해은선생유고(海隱先生遺稿)에 실려 있는 것을 최근 발견하였습니다. 판결사공 묘소에서는 태영 안사연 부회장이 헌작하였습니다.


▲ 판결사공(휘 효건)의 유언을 받들어 品자 형태로 모셨다. 동주 이민구, 용주 조경, 화포 홍익한 등 대문장가들과 주고받은 시들을 모은 <강양창수록>과 <안동김씨선세사적> 등 중요한 기록을 남기셨다.


▲ 판결사공(휘 효건) 묘소 후경


▲ 태영 안사연 부회장의 헌작

판결사공께서는 시에 뛰어나셨는데, 동주 이민구 선생을 비롯해 용주 조경, 화포 홍익한, 죽남 오준, 일옹 박경응 선생 등 당대 대문장가들과 화답하신 시들을 모은 ‘강양창수록(江陽唱酬錄)’이 판결사공종중에 전해집니다. 이 시문집이 우리 문중은 물론 학계에도 아직 알려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근 400년 세월이 흐른 탓에 일부 글자를 알아보기 어려우나 이민구 선생과 주고받은 시 중에는 거질(巨帙)인 동주 이민구 선생 문집에도 실리지 않은 시가 7편이나 들어 있는 데에다 이민구 선생이 유배생활을 할 당시에 주고받은 시들이 포함돼 있어 향후 학계의 주목을 받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게다가 이 시들은 간찰을 통해 주고받은 시들이라 모두 그분들의 친필입니다. 용주 조경 선생은 초서로, 한석봉 선생에게 사사한 죽남 오준 선생은 해서로 유명하신 분들이라 살아 움직이는 듯한 그 필체를 보고 있노라면 황홀하기 그지없습니다.
이외에도 종중에 전해지는 고문서 중에는 판결사공과 동갑계를 하신 분들의 명단을 적은 ‘갑신계첩(甲申契帖)’, 선대 행적을 기록한 ‘화김래파사적약변(花金來派事蹟略弁)’, 충렬공을 비롯한 직계 선조의 장수(長壽) 기록을 적은 ‘경수감은록(慶壽感恩錄)’ 등 여러 종류의 진귀한 보물들이 포함돼 있습니다. 특히 판결사공의 아드님 낙애공(휘 鍰)은 94세로 천수를 누리셨는데, 두 분의 향년이 무려 180년에 가깝습니다. 이처럼 장수를 누리자 낙애공 83세 때인 1738년(영조 14년)과 1742년(영조 18년)에 영조 임금께서 친히 낙애공을 대궐로 불러 “우리 왕조가 300년을 이어왔는데, 그대 부자가 그 절반이구려. ……”라는 내용의 어제시(御製詩)를 짓고 직접 어필로 써서 하사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해집니다. 이 내용이 우리 보책의 낙애공 기사란에 실려 있기도 합니다. 판결사공과 낙애공의 장수기록은 사대부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성호 이익 선생은 낙애공과의 친분으로 ‘경수감은록서(慶壽感恩錄序)’를 짓고 ‘만달(晩達 : 만년에 영달하다)’이라는 글까지 남기게 된 것입니다. 판결사공 가족의 장수기록은 핏줄인 자손뿐만 아니라 배위나 사위까지도 이어져 더욱 기이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승정원일기에는 1668년(현종 9년) 4월에 예조판서 조복양 선생이 판결사공의 치제(致祭)를 청하자 5월 11일 예조좌랑 이옥 선생을 보내 판결사공 묘소에서 제사를 올리도록 하였습니다. 당시 치제문이 전하지 않는데 최근 발견된 판결사공 묘비문에 치제문 일부가 담겨 있기도 합니다. 이외에도 판결사공에 관해서는 많은 일화가 전해지는데 추후 소개하는 자리가 마련될 것을 기대하며 이만 줄입니다. 가랑비가 굵어졌다 가늘어졌다 하는 사이에 참배를 마치고 15:10분경 오늘의 마지막 일정인 효헌공(휘 瓚) 묘소로 향합니다.

◆ 전란을 극복한 백규(百揆), 효헌공(휘 瓚) 묘소

이의동 두릉리는 안동김씨와 청송심씨가 집성촌을 이뤄 대대로 지켜온 터전이나, 최근에 광교신도시 개발로 천지가 개벽해 어디가 어딘지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참의공종중 세장지(世葬地)가 수용되어 다른 곳으로 천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현재 광교신도시 내에 남은 묘역은 앞서 참배한 솔내공원의 참의공 묘역, 그리고 조금 떨어져 모신 효헌공(휘 瓚) 묘역 두 곳뿐입니다. 청송심씨 역시 마찬가지로 심온 선생 묘소만 제자리를 지킬 뿐 많은 분들의 묘소를 옮겨야만 했습니다.
효헌공 묘소는 참의공 묘역에서 직선거리로 500미터쯤 떨어져 있습니다(지도 참조). 자동차를 이용하실 때에는 지도의 파란색 코스를 참조하시고, 걸어가실 때에는 지도에 ②번으로 표시한 광교e편한세상 2차 아파트 옆 실개천을 따라 올라가시면 됩니다. 우리 일행은 이 지점에 차를 세우고 가랑비 내리는 초여름을 만끽하며 묘역으로 향했습니다.


▲ 참의공 묘역에서 효헌공 묘소로 가는 길


▲ 효헌공(휘 瓚) 신도비. 막내사위 조경 선생이 비문을 지었다.


▲ 효헌공(휘 찬)과 배위 양성이씨 묘소


▲ 효헌공(휘 찬) 묘소 후경

효헌공은 자(字)는 숙진(叔珍), 호는 눌암(訥菴)으로 참의공(휘 彦沈)의 세 아드님 중 막내 아드님이십니다. 1567년(선조 즉위년)에 진사시를 거쳐 1568년 문과에 급제하신 뒤 삼사의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뛰어난 정치가이자 문장가로 명성을 쌓아 나가셨습니다.


▲ 효헌공(휘 찬) 급제기록이 적힌 선조 즉위년
문과방목

이후 직제학, 승지, 대사헌, 대사간, 대사성, 경기관찰사 등을 역임하시고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의 의주 파천을 반대하며 왜구에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전란 중에는 체찰부사(體察副使)와 양호조도사(兩湖調度使)로 전란을 극복하기 위한 각종 뒷바라지를 총괄하시는 한편 접반사(接伴使)로서 명나라와의 외교 실무도 총지휘하셨습니다. 아울러 1597년 정유재란 때부터는 예조판서, 대사헌, 이조판서, 지돈녕부사를 거쳐 우참찬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1599년(선조 32년) 12월 12일 향년 57세로 유명을 달리하셨으니 애석하기 그지없습니다.
막내 사위 조경 선생이 지은 묘갈문에 의하면 전란 뒷수습에 몰두하시던 효헌공께서 1597년(선조 30년) 가을에 어머니께서 위독하시다는 전갈을 받고 두릉리로 급히 달려가다가 도중에 부음을 들으시고는 애통해 하다가 가벼운 병이 드셨는데, 대상(大祥)이 지나고 나서 병세가 위중해져 고양(高陽)의 촌사(村舍)에서 돌아가시어 이듬해 2월 고향 두릉리 선영에 모셨다고 합니다(『용주유고(龍洲遺稿)』 권15 <이조판서 눌암 김 공 묘갈병서(吏曹判書訥庵金公墓碣幷序)> 참조). 효헌공께서 돌아가시자 선조 임금은 조회를 정지하여 추모하였으며, 영조 임금은 1767년(영조 43년) 11월에 효헌(孝獻)이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조선왕조실록 영조 43년 11월 14일조 참조). 한 마디로 효헌공은 문무백관을 통솔하는 백규(百揆 : 이조판서의 별칭)로서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라가 안전하게 나아갈 진로를 제시하고 민심을 다독여 뒷수습을 담당하느라 동분서주하시다 순국하셨으니 진정한 정치 지도자의 표본이라 하겠습니다.


▲ 조선왕조실록의 효헌공(휘 찬) 시호 하사 기록

효헌공 묘소에서 내려다보는 전경(前景)은 아늑하면서도 활달한 곳인데, 이제는 아파트 숲으로 바뀌어 가는 중입니다. 묘소는 쌍분이며, 봉분은 근래에 원형 호석을 둘렀습니다. 석물은 상석을 비롯해 혼유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문방석 등이 배치돼 있는데, 장중한 느낌의 문인석은 앞뒤로 화려한 장식을 새겼습니다. 봉분 우측의 비석은 옥개석을 얹은 형태입니다. 그 오른쪽으로 구릉 아래에 신도비가 있는데, 조경 선생이 지은 신도비문을 13세손 재선(在璿)이 번역하여 국한문 혼용으로 새겨 놓았습니다. 가랑비가 여전히 내리는 가운데 효헌공 묘소에서는 용주 전 문영공종회 사무총장께서 헌작하셨습니다.


▲ 용주 전 문영공종회 사무총장의 헌작


▲ 빗발이 제법 굵어진 가운데 참배 중인 일행


 

 

 

◆ 충무공 김응하 장군의 충절을 기리며, 안사연 가을 답사 예정

어느덧 시간은 15:30분경이 되어 성죽공원 인근으로 천봉한 선교랑공(휘 忠建) 묘역을 참배한 뒤 16:00시경 수원시 권선동의 안동빌딩에 도착하였습니다. 안동빌딩은 참의공종중 소유로 수원시청역 3번 출구 바로 앞 건물입니다. 효헌공종중에서 사용하는 5층 회의실로 올라가 가을철 안사연 답사계획을 논의하고 다음 답사행사는 충무공(휘 應河) 묘역 답사를 잠정적으로 결정하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재용 회장께서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참의공종중을 방문해 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와 함께 태철 효헌공종회 총무이사 등 참의공종중 종원들을 소개하셨습니다. 봉회 대종회장께서는 그 동안 안사연이 문중역사 탐구에 큰 역할을 해 온 점을 높이 치하하는 한편 앞으로도 오늘과 같은 행사를 자주 개최함과 동시에 훌륭한 자질을 갖춘 종인들을 발굴하는 데에도 노력해 줄 것을 당부하면서 오늘 행사의 평가 말씀을 갈음하셨습니다. 또한 재영 회장과 영국 전 문온공파 회장께서는 안사연과 종인 등 많은 분들의 참의공종중 방문에 대해 감사 인사와 함께 귀한 덕담을 들려 주셨습니다.


▲ 참배 후 권선동의 안동빌딩에 도착한 일행


▲ 가을 답사 논의 중인 일행


▲ 봉회 대종회장의 답사 평가 및 인사말

이후 17:00시경 회의를 마치고 인근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즐거운 시간을 갖고 귀갓길에 올랐습니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행사일정을 함께 하신 문중 원로 여러분과 참가 종인, 참의공종중 종원 및 관계자 여러분, 그리고 금일봉을 주신 봉회 대종회장, 재용ㆍ재영 회장 및 점심ㆍ저녁 대접해 주신 참의공종중 종인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두서없는 글로 행사 내용을 제대로 소개했는지 염려스럽습니다. 부디 혜량하시고 잘못된 점은 바로 잡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끝>

사진 발용 / 글 윤식

 

댓글목록

김태철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태철
작성일

2014 안사연 하계답사에 많은 관심 가져주신 분들과 준비를 열심히 하여주신 모든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기록으로 남을 사진과 글을 정리하여 주신 발용, 윤식님의 열의에 감사드립니다.

김재영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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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대종회장님을 비롯하여 안사연하계답사에 참여하여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시흥안산수원지역의 저희문중을 채택하여 주신 안사연 영환회장님과 회원여러분께 고마움의 인사를 올립니다
일기도 불순하였고 준비도 부족하였든 점 죄송합니다.
답사자료 준비하신 태영총무님, 순간을 저장하신 발용 사진사님,  답사후기를 위하여 열심히 메모하시고 자료발췌 검색하여 좋은글 남겨주신 윤식님, 큰절로 인사올립니다
년중 4회 안사연 모임에 많은 종인님들이 관심을 갖고 참석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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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대부님, 아저씨. 답사하던 날 많은 폐를 끼쳐 송구합니다.
덕분에 몰랐던 내용들을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발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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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행사당일 일기불순하여 묘역사진은 예전에 촬영한 사진으로 첨부하였습니다.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김재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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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안사연의 훌륭한 조상숭배 업적 정말 대단하십니다
다음 모임부터는 저도 참석할수있도록 노력할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김영환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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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재이씨 반갑습니다.  다음 행사는 부사공 후손이신 충무공 김응하 장군 묘역 일대를 답사할 예정입니다.  민통선 안에 있는 묘소도 있고 해서 좀처럼 답사하기가 어려운 지역입니다만, 부사공종중의 협조를 얻어 8월말이나 9월초쯤 다녀올 예정입니다.  멀리 강진에서 오시기 어렵겠지만 참석하시면 반갑기 그지 없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