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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괴산희양산 우음(立槐山曦陽山 偶吟)-괴산희양산에 서서 우연히 읊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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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석 작성일14-06-07 00:22 조회2,396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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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괴산희양산 우음(立槐山曦陽山 偶吟)-괴산희양산에 서서 우연히 읊조리다.

 2014년 6월 초하루, 새벽을 틈내 중부내륙고속도로로 접어들어 충주를 지나 이화령 아래, 오붓한 곳 괴산 연풍에 닿았다. 아직, 벽지의 아침을 깨우는 안개가 습하다.

 해가 번들거리는 희양산(曦陽山)은 괴산과 문경에 걸쳐 있는 산이다. 붉은 태양의 고을(丹陽)에 버금가는 괴산 그리고 속현 연풍, 좁은 골목엔 단원(김홍도)의 그림자가 선하다. 1791년, 어용화사로 선발되어 정조(이산)의 어진제작에 참여한 공으로 그해 겨울 연풍 현감에 제수되어 1795년 정월까지 봉직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원근의 산수를 도려내어 솜씨를 부렸고 대장간이며 학동들의 글방까지 찾아가 그가 살았던 생애의 공간들을 끌어와 화선지에 담았다. 사랑의 대화를 관찰하고 남긴 몇 점의 춘화(春畵)에는 시공을 초월하여 음양의 조화가 간결하다. 현감(종6품) 퇴임 후 만년의 졸기가 애석하게도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선계로 들어 간 듯하다.

 산에 오를 적에 신라말 고려초, 구산문(九山門)의 하나였던 희양산문(曦陽山門)의 봉암사 경내를 지나 화강암 능선을 타고 정상에 오르니 표지석이 없다. 대여섯 자(尺) 모자라는 해발 1,000미터의 산. 허물어져가는 산성의 흔적에서 진훤(견훤)의 발자국에 내 발바닥을 포개어보았다. 진훤은 사벌주(상주) 가선현(가은)의 아버지 아자개(阿慈介)의 턱밑까지 조여와 영역표시를 하였다.

 신라 후기의 경계에서, 아자개는 왕건에게 투항했고 고려개국공신 여럿은 조령을 넘어 수안보에서 전장의 비린내를 씻고 돌아갔다.

 조령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어떤 이가 금(琴)을 어깨에 둘러맨 종자를 데리고 충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가야에서 왔다고 하는데 몸에서 향이 났다. 가야의 능선에서 순장하는 마지막 여인을 위해 향을 살랐다. 먼저 죽은 왕의 무덤에서 천상을 향해 함께 걸어가야 할 운명의 여자들 중 하나였다. 금을 탈 때 무서워 지린 여인의 마지막 오줌이 석관을 적실 때 그의 가락이 멈추었다. 며칠이 지나 신라로 망명하여 충주에서 살다가 죽었다.

 열두 줄의 가야금(加耶琴), 최초로 원산지가 증명되는 악기다. 일 년이 열두 달 365일, 인간의 체온이 36.5도, 열두 곡을 작곡한 우륵(于勒)이 삼국의 나라가 아닌, 가야의 땅에서 자신의 이름처럼 굴레를 벗어나 탄금대(彈琴臺)에 국립음악학원을 차렸다.

 우륵이 금을 탄 곳이 탄금대다. 우륵의 자진모리가 여울과 개활지에서 여음으로 징징거리던 1592년(임진년)의 조일전쟁 때, 조총소리가 가득했고 신립이 이곳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여물이 간곡하게 새재(조령)로 나아가 진을 치자고 했으나 결국 달천을 등지고(배수진) 싸우다 이곳에서 함께 죽었다. 그들의 자식들이 인조반정의 주역들이다. 인근 원주에서 병장기와 군졸을 탄금대로 지원한 후 치악산 영원산성서 농기구로 항전하던 백성과 함께 원주목사 김제갑과 부인 이씨(임영대군 고손녀)와 아들 시백이 함께 순절하였다.

 조일전쟁이 있기 전에 조정에서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왔지만 아래와 같은 일이 발목을 잡았고, 도성을 버리고 멀리(의주) 간 임금의 어가가 희미할 때 백성들이 궁을 태우며 비루먹은 말들을 잡아먹었다.

◯황윤길(서인)은 1590년 조일전쟁(임란)을 앞두고 부사 김성일(동인), 서장관 허성과 함께 일본 통신사로 다녀와 곧 전쟁이 일어날 거라 보고하지만 동인의 세에 밀려 채택되지 않았다. 반면 같은 동인으로서 황윤길의 편에 선, 허성은 탄핵되고 후에 전쟁이 나자 선조는 크게 후회한다. 율곡(이이)이 죽음을 앞두고 병판으로 있을 때, 의재(김제갑)와 하곡(허봉, 許篈, 1551-1588, 허성의 아우) 등이 병판을 탄핵했다. 선조가 하곡을 멀리 귀양 보냈다.

 

장수 황희(黃喜) - 치신(致身) - 사경(事敬) - 징(懲) - 윤길(允吉)

안동 김수형(壽亨) - 언홍(彦弘) - 곽(钁) - 녀 ♡ 장수 황윤길(黃允吉)

양천 허엽(許曄, 초당) - 허성(筬) - 허실(實) - 녀 ♡ 김휘(徽, 김시양의 子)

 

◯평산신씨

신립 - 신경진(인조반정)

◯순천(평양)김씨

김균정 - 헌안왕 - 궁예 - 신광 - 김총(金摠, 순김 시조)

김유정(21세) ♡ (권형의 次女) - 을재, 승주, 을귀

김 수(21세) - 종한, 종서, 종흥

김승주(金承霔, 1354~1424, 平陽君, 시 襄景) - 次女 ♡ 송복원

여산 송복원[세종의 8남 영응대군(묘소 시흥)의 빙장, 단종비 정순왕후의 조부]

김종서(金宗瑞, 1390~1453, 시 忠翼) - 女 ♡ 안동 김자정(自埥)

안동 김구용 - 김명리 - 김맹헌 - 김자정(自埥) - 김연수(延壽)

김승주 - - - 7세손 김여물(신립과 탄금대에서 전사, 묘소 안산) - 김류(인조반정)

◯안동김씨

김익달(태종 이방원 처남 민무회의 빙장)-고(顧)-맹렴(하연 영상의 사위)-철균(양녕대군 사위)-수형(권람의 사위, 남이장군과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의 장인인 신수근과 동서)-언묵(이문건의 빙장, 동서 박용이 인종비의 父)-석(처사촌이 기대승)-제갑(悌甲)-1子 시헌(時獻), 2子 시백(時伯)

 

김제갑(悌甲, 1525-1592) - 문신, 호는 의재(毅齋), 이황(퇴계)의 문인, 충청도 관찰사, 원주목사(原州牧使), 1670년(현종11) 원주 사우에 충렬이란 편액이 사액되었으며, 1711년(숙종37년)에 시 문숙(文肅), 증영의정. 묘소는 괴산, 충민사 경내의 구사우, 화암서원(華巖書院), 능촌리 제각에 제향(祭享) 되었고 원주 충렬사(忠烈祠) 경내 충효열(忠孝烈)각에 봉안되었다. 1966년 강원도 애국애족 부활위원회(江原道愛國愛族復活委 員會)에 의해 원주역 광장에 그의 충렬비(忠烈碑)가 세워졌다. 시문집 의재유고(毅齋遺稿)가 있다.

 

김시헌(1560-1613)- 1588년 식년문과 장원급제, 1597년 동부승지, 우부승지,·충청도관찰사, 대사성 등을 역임, 이때 소모관(召募官)으로 충청도에 파견되었다. 우승지, ·좌승지를 거쳐 복수사(復讐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신립(申砬)이 전사한 탄금대(彈琴臺)를 돌아보고 임진왜란 뒤 민심을 수습하였다.

 

◯성주이씨

성주 이조년 -포(褒) - 인임 - 사용(伺容) - 존성(存性, 영상 하연의 빙장)

성주 이계녕(李繼寧) -숙생(叔生) - 윤탁(允濯) - 문건(文楗, 김언묵 사위)

이문건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묘비문인 한글영비를 짓고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육아일기인 『양아록(養兒錄)』의 저자로 괴산 화암서원 배향.

◯행주기씨

행주 기찬(襸) ♡ 윤준원(俊元)의 녀 - 형(逈) - 녀 ♡ 영상공 김석(錫)

행주 기찬(襸) ♡ 김수형(壽亨)의 녀 - 진(進) - 대승(大升, 1527-1572)

기대승은 김석의 고종사촌 기진의 아들이자 처사촌이며 빙장의 조카다.

◯반남박씨

반남 박용(朴墉, 1468-1524)은 인종비 인성왕후(仁聖王后, 1514-1577)의 아버지다.

 산우님들과 두 달 만에 점심을 나눠먹으며 회포를 풀다가 갔던 길을 되짚어 내려와 단원마을로 귀가하니, 날이 어둑어둑했다. 투표가 코앞이지만 지역이 안산이라 고요했다. 충주서부터 주머니 속에 고이 간직했던 귀한 식물의 어린잎을 포개어 주인공에게 헌사하고 곤한 몸을 뒤척인다.

 오늘(6일)은 현충일이며 24절기의 망종(芒種)이다. 개인적으로는 생일이라, 작고하신 어머니의 산통과 함께 짧은 생애를 기억하며 넋을 기리는 시간을 갖고, 앞서간 역사의 흔적 속에 삶을 불태우신 선열들이 남기신 소중하고 거룩한 산야를 기억할 것이다. 오늘은 앵두가 다 익어 속살이 비칠 것이고 내일은 음력 10일이니, 태종우(太宗雨)가 내려 가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리라! 아! 오묘한 절기여! 심금을 울리는 우륵의 명주실이여-------

 사랑하는 산우님들! 감사합니다.

댓글목록

김봉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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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잘 보고 한 수 배우고 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