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안사연 하계 답사 보고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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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14-06-05 11:35 조회3,400회 댓글0건본문
2014년 안사연 하계 답사 보고 02
◆ 경진보 간행 주역 중 한 분, 관찰사공(휘 億齡) 묘역
이숙번 선생 묘소에서 내려와 11:05분경 관찰사공(휘 億齡) 묘역으로 향합니다. 길이 까다로워 안내하는 이가 없으면 찾아가기 어렵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네비게이션 도움을 받아 시내로 들어가 ‘화정8교 사거리’에서 좌회전한 뒤 길을 따라 직진해서 지도에 표시한 ‘안산IC 인근’에서 9시 방향으로 좌회전하면 외길이 나타납니다. 이 길로 직진해서 관찰사공 묘역으로 향합니다. 11:25분경 묘하의 양상동 마을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네비게이션을 사용하실 때에는 목적지를 ‘상양대 경로당’이나 ‘버대길 189-3’으로 맞추시면 됩니다.
▲ 관찰사공(휘 억령) 묘소 가는 길
경로당 인근에 서경티엔에프주식회사와 리안물류가 있습니다. 리안물류 앞 도로 안내판이 보이는 곳에서 왼쪽 리안물류 담장을 끼고 첫 번째 골목길로 올라가면 소를 키우는 집이 있고, 그 집을 지나 산 끝의 집이 ‘버대길 189-3’입니다. 이 집 뒤에서 10여 미터쯤 더 가면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타납니다. 길이 끝나는 곳이 바로 관찰사공 묘역입니다.
여름에 들어서는 때라 풀이 벌써 길게 자라 올랐습니다. 참의공종중으로부터 안사연의 답사 소식을 전해들은 관찰사공종중에서는 전북 남원에 거주하시는 두식(斗植) 회장께서 종인 두 분과 함께 이틀 전인 5월 23일(금) 올라오셔서 묘역을 말끔하게 벌초해 놓으셨습니다. 묘역 입구에서 묘소까지 올라가는 길이 꽤 깁니다. 관찰사공종중 종인들 배려 덕분에 풀에 스치지 않고 그 길을 편히 올라가면서 관찰사공종중 종인들의 따뜻한 마음을 소중히 가슴에 담습니다. 관찰사공 묘소에 도착하자 어느새 시간이 11:40분입니다. 묘역에서는 두식(斗植) 회장께서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하십니다. 관찰사공 묘소에서는 봉회 대종회장께서 헌작하셨습니다. 간단한 음복 후에 주위를 둘러봅니다.
▲ 관찰사공(휘 억령) 묘소. 현존하는 우리 문중 최초 족보인 경진보를 펴내는 데 큰 역할을 하셨다.
▲ 헌작 준비를 하는 일행
▲ 봉회 대종회장의 헌작
▲ 태영 안사연 부회장의 묘역 소개
관찰사공(휘 億齡)은 현존하는 우리 문중 최초 족보인 경진보를 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신 분으로 경진보에 서문이 남아 있습니다. 대사헌공의 손자이신 관찰사공의 계대는 다음과 같습니다.
--------대사헌공(휘 誠童) → 3子 판결사공(휘 漹) → 2子 관찰사공(휘 億齡) → 子 록(琭), 탁(琢), 발(), 진(璡)
관찰사공은 1529년(중종 24년)에 태어나 1589년(선조 22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자(字)는 중노(仲老)이며, 사마시를 거쳐 1552년(명종 7년)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셨습니다. 청요직을 두루 거쳐 승정원 좌승지, 강원ㆍ황해ㆍ충청도 관찰사, 형조참의, 광주목사를 역임하시고 이조판서 겸 양관 대제학에 추증되셨습니다. 묘역 주위에는 기묘한 바위가 군데군데 솟아 있어 눈길을 끕니다. 관찰사공 묘소에는 상석과 근래에 세운 묘비, 망주석을 갖추고 있습니다. 특이하게도 망주석 바깥으로 동자석과 문인석을 배치했는데,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 관찰사공 문과 급제기록이 적힌 명종 7년 문과방목
▲ 관찰사공 묘소 전경
▲ 망주석 다음에 동자석과 문인석을 배치한 특이한 구조이다.
▲ 관찰사공종중 두식 회장(왼쪽)과 재용 회장. 남원에 거주하시는 두식 회장께서 이틀 전에 올라와 잔디를 깨끗하게 깎아 놓으셨다.
▲ 관찰사공 묘소 아래 남쪽으로 빙 둘러 모신 아드님과 손자분 묘소
봉분 주위에 안산시장 명의로 묘지 실태조사 안내문을 적은 자그마한 팻말이 꽂혀 있습니다. 안산시의 도시개발이 확장되면서 묘하의 양상동마을에 지역발전시설(地域發電施設)이 들어서는 계획이 수립되자 묘지 실태를 조사한 모양입니다. 관찰사공 묘소 아래에는 남향으로 아드님과 손자분들의 묘소가 빙 둘러 있습니다. 맨 오른쪽에는 커다란 상석과 제단비(祭壇碑)를 갖추어 놓은 것으로 보아 제단비에 적힌 선대 할아버님들의 합제(合祭)를 올리는 것 같습니다. 비석에는 ‘사대십선조배위시향합동제단비(四代十先祖配位時香合同祭壇碑)’라 적혀 있습니다. 음기에 세향을 올리는 선조님들 휘자가 적혀 있는데, 그분들 중에 낙흥부원군이신 낙서공(휘 自點)의 휘자도 적혀 있습니다. 낙흥부원군은 현감공(휘 탁)의 둘째 아드님이신데, 인조반정 공신으로 뒤에 영의정에 올라 권력의 정점에 섰던 분입니다. 낙서공은 안동의 충렬공 묘소 수호에도 막후에서 큰 역할을 하셨는데, 광산김씨문중의 계암일록(金坽 著)과 매원일기(金光繼 著)를 보면 당시 낙서공의 위상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충렬공김방경자료집성』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관찰사공 묘역에서 내려와 두식 회장 및 종인들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고, 12:10분경 성호 이익(李瀷) 선생 묘소로 향합니다. 불과 10분 남짓한 거리라 이내 성호 이익 선생 묘소에 도착했습니다.
◆ 근대화로 가는 길목에서, 성호 이익(李瀷) 선생 묘소
성호 이익(李瀷) 선생은 잘 아시다시피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실학자입니다. 묘소는 경기도 기념물 제40호로, 안산시 상록구 일동 555번지에 있습니다. 묘소 바로 앞에 ‘식물원로1길’이라고 적은 도로표지판이 있고, 그 옆에 성호기념관이 자리잡고 있으므로 찾아가기는 쉬운 편입니다.
▲ 관찰사공 묘역에서 성호 이익 선생 묘소로 가는 길
우리 일행이 성호기념관 인근에 도착하자 안사연의 상석 씨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답사 소식을 듣고 합류하였습니다. 한동안 소식을 듣지 못해 궁금했던 터라 더욱 반가웠습니다.
성호 이익 선생 묘소는 근래에 세운 묘비와 상석, 망주석만 있을 뿐 별다른 석물이 없습니다. 묘소 바로 옆에 성호 이익 선생 사당인 첨성사(瞻星祠)가 있습니다. 외삼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재실로 사용하는 경호재(景湖齋)가 있습니다. 정면 3칸×측면 1.5칸의 맞배지붕집입니다. 죽죽 그어 놓은 듯한 용마루의 시원시원한 선과 밑으로 내려오는 기왓골이 빚어내는 간결함. 맞배지붕의 그 간결한 직선이 질박한 흙벽담과 어울려 더욱 정겹게 다가옵니다. 그러면서도 꼿꼿한 선비의 기개는 전혀 잃지 않으니 자연스레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게다가 성호 이익 선생은 수원 판결사공(휘 孝建)종중에 전해지는 <경수감은록(慶壽感恩錄)>의 서문을 쓰신 분이라 감회가 더욱 각별합니다. 뿐만 아니라 선생의 문집 성호사설에는 판결사공을 비롯해 낙애공(휘 鍰)과 가족 여러 분들의 장수(長壽)에 관해 적은 <만달(晩達)>이라는 글이 실려 있기도 합니다.
1967년 5월 성호 선생 추모회에서 세운 묘비에 성호 선생 휘자(諱字)와 함께 배위 정부인 고령신씨와 정부인 사천목씨를 합장한 것으로 적혀 있습니다. 나머지 3면에는 빙 둘러 성호 이익 선생의 행적이 적혀 있습니다.
▲ 성호 이익 선생 묘소. 유명한 실학자 성호 선생은 경수감은록의 서문을 쓰기도 하였다.
▲ 재실 경호재
참배를 마치고 바로 옆 성호기념관으로 향합니다. 출입문 바로 앞에 책을 펼쳐 놓은 조각물이 잔디밭에 설치돼 있습니다. 제목이 ‘대두(大蠹)’로 적혀 있습니다. ‘커다란 좀벌레’라는 뜻인데, 집에 돌아와 성호 선생 문집을 찾아보니 실려 있지 않습니다. 2002년에 설립한 성호기념관에서는 마침 ‘새로 여는 하늘 땅, 세계’라는 제목으로 ‘성호 이익 서세 250년 기념 특별순회전시’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입구에 천문도 모형이 설치돼 있고, 내부에는 여러 소장자들의 도움을 받아 각종 자료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성호 선생 유물과 관련된 자료들이 한곳에 모여 있어 모처럼 즐거운 관람이었습니다. 관람실을 나오자 성호 선생 흉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 성호 이익 선생 묘소 인근의 기념관
▲ 기획 전시 중인 성호 이익 선생 유물
관람을 마친 뒤 13:00시경 인근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허기를 달래고, 13:40분경 마지막 답사지 수원 참의공종중 묘역으로 향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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