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안사연 하계 답사 보고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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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14-06-03 05:55 조회3,577회 댓글0건본문
2014년 안사연 하계 답사 보고 01
■ 일시 : 2014년 5월 25일(일)
■ 장소 : 시흥ㆍ안산ㆍ수원지역 익원공파 대사헌공(휘 성동)종중 및 참의공(휘 언침)종중 선영,
강희맹 선생ㆍ성호 이익 선생 묘소 및 기념관ㆍ안성이씨 이숙번 선생 묘역,
■ 참석 : 34명(無順, 경칭 생략)
◇ 서울ㆍ수도권(17명) : 봉회(대종회장), 영국(전 문온공파 회장), 재광(전 문영공종회 회장),
英桓(익, 植항), 용태(문), 대진(익, 敎항), 영환(안사연 회장), 상석, 윤만, 진회, 우회,
은회, 발용, 태우, 태영(안사연 부회장), 윤식, 용주
◇ 수원 참의공종중(13명) : 재용(在瑢 : 전 익원공파종회장), 재영(在永), 재권(在權), 영회(永會),
덕회(德會), 진회(珍會), 태용(泰龍), 수선(洙先), 태철(泰喆), 태홍(泰弘), 춘식(春植),
순식(淳植), 경식(敬植)
◇ 안산 이목종중(1명) : 형식(亨植)
◇ 관찰사공(휘 億齡)종중(3명) : 두식(斗植) 회장 등 3명
2014년 5월 25일(일요일) 안사연 2/4분기 정기모임 행사로 시흥ㆍ안산ㆍ수원지역 익원공파 선영, 강희맹 선생ㆍ성호 이익 선생 등 역사인물을 찾아가는 답사가 시행되었습니다. 지난 밤 가랑비가 내렸는지 도로에 잘박잘박하게 물이 괴었습니다. 그래도 하늘은 맑게 갠 상태라 안심했건만, 08:20분경 약속장소인 잠실종합운동장에 도착하니 하늘이 잔뜩 찌푸린 상태입니다. 새벽 이른 시간부터 봉회 대종회장을 비롯한 문중 어르신들께서 귀한 걸음을 해 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말씀 올립니다. 08:30분경 참가자들이 모두 도착해 08:40분 답사지역으로 출발합니다. 오늘 답사지역은 아래와 같습니다.
◇ 대사헌공(휘 誠童) 묘역
◇ 강희맹(姜希孟) 선생 묘역 : 대사헌공의 장인
◇ 안성이씨 이숙번(李叔蕃) 선생 묘역
◇ 관찰사공(휘 億齡) 묘역
◇ 성호 이익(李瀷) 선생 묘소 및 기념관
◇ 참의공(휘 彦沉) 및 판결사공(휘 孝建) 묘역
◇ 효헌공(휘 瓚) 묘소
▲ 출발 장소인 잠실종합운동장역에 모인 참가자들. 한동안 만나지 못해 여느 때보다 화기애애한 정담을 나눈다.
08:50분경 답사지역으로 향하는 전세버스에서 태영 안사연 부회장이 행사 개요 및 일정을 설명하고, 영환 안사연 회장이 인사말에서 답사 취지와 더불어 참석 종인들을 소개합니다. 이어 봉회 대종회장께서는 안사연에서 뜻깊은 행사를 마련한 데 대해 치하하고, 안사연이 주축이 되어 우리 문중 발전에 더욱 심혈을 기울여 줄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또한 재광 전 문영공종회장께서는 익원공파 동추공(휘 宗淑) 재실인 구경재(俱慶齋)에 담긴 뜻과 재실 건립 과정을 들려주십니다. 그러는 사이 09:20분경 시흥의 대사헌공(휘 성동) 묘역에 도착했습니다. 절기도 어느덧 여름으로 접어들어 짙푸른 녹음이 우거졌습니다. 흐르는 세월 따라 강산이 변하듯 묘역 아래 연성동 마을이 예전과 몰라보게 달라졌습니다. 한적한 시골 마을이 이제는 혼잡한 도시로 변모해 가는 중입니다. 묘역 아래까지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서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오솔길을 따라 묘역으로 올라서니 그제야 눈에 익은 선영이 나타납니다.
◆ 대사헌공종중의 발원지, 대사헌공(휘 誠童) 묘소
대사헌공 묘소에는 수원 참의공종중과 안산 이목종중 종인들께서 손님맞이 준비를 마치고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십니다. 재용 판결사공종중 회장께서 대종회장 등 문중 원로분들과 안사연에서 대사헌공종중 및 참의공종중 선영을 참배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습니다.
대사헌공 묘소는 경기도 시흥시 하상동 350-4번지로 선영 맨 위쪽에 쌍분으로 모셔져 있는데, 묘비 2기(신ㆍ구 각 1기)를 비롯해 문인석 2쌍(신ㆍ구 각 1쌍), 장명등, 상석 등 석물이 조성돼 있습니다. 이 가운데 묘비와 문인석 각 1쌍은 2000년도에 비문을 개수하면서 종중에서 새로 세운 것입니다. 옛 묘갈 음기(陰記)는 풍화가 진행돼 속히 탁본을 떠서 비문을 보전할 필요성이 커 보였습니다. 기나긴 세월이 흘렀지만 육안으로 음기를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대사헌공 묘갈은 한성부윤 정사룡(鄭士龍) 선생이 짓고, 성균진사 김종수(金從壽) 선생이 글씨를 썼는데, 정사룡 선생 문집에 대사헌공 묘갈문이 전하지 않아 현재로서는 이 묘갈 음기가 유일합니다.
▲ 대사헌공 묘소. 배위 진주강씨와 쌍분으로 모셔져 있다.
▲ 대사헌공(휘 성동) 묘역을 설명하는 재영 회장. 바로 앞 아파트단지 연꽃마을은 이곳 지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 영환 회장의 헌작
▲ 태영 안사연 부회장이 대사헌공 관련 자료를 소개하고 있다.
▲ 대사헌공 묘비. 오른쪽 옛 묘비 이수의 조각이 보는 이들을 놀라게 만든다.
▲ 대사헌공 묘소 후경. 멀리 시원하게 내다보이던 들판이 아파트 건물로 가려져 못내 아쉽다.
대사헌공은 1452년(문종 2년) 문정공(휘 礩)의 넷째 아드님이자 영의정을 역임한 충정공(忠貞公) 정창손(鄭昌孫) 선생의 외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 대사헌공의 자(字)는 명보(明甫), 호(號)는 제계(蹄溪)입니다. 문음(門蔭)에 의해 의금부 도사로 관직에 나아가 사옹원(司饔院) 주부(主簿)와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로 승진한 뒤 1492년(성종 23년) 적성현령으로 재임 중 갑과 3등인 탐화랑으로 급제하여 당상관으로 승진하셨습니다. 이처럼 아버님 문정공의 뒤를 이어 대과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함으로써 문정공 후손 가계에서 무려 10대에 걸쳐 한 대도 빠지지 않고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워 가는 터전을 마련하였습니다.
▲ 갑과 제3등 탐화랑으로 급제한 대사헌공 문과방목 기록
대사헌공은 부평부사로 승진하신 뒤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을 받는 한편 조정에 치적이 보고되어 가선대부로 품계가 높아지셨습니다. 이처럼 뛰어난 인품과 치적 및 선정으로 조정 대신들과 선비들로부터 장차 나라의 재상감이라는 크나큰 기대를 모았으나, 1495년(연산군 1년) 향년 44세로 짧은 생애를 마치셨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성현(成俔) 선생이 지은 용재총화에는 대사헌공께서는 키가 아홉 자요, 성품이 침착하고 신중하다고 그 풍모를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남대문 밖 연지(蓮池) 인근에 사신 대사헌공께서는 종일토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셨으며, 관직에 나아가서는 일을 시원하게 처리하였으며, 백성들에게 조세를 독촉하지 않아 백성들이 부모처럼 여겼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대사헌공께서 돌아가시자 사림에서 비통해 마지않았다고 합니다. 배위 진주강씨는 문량공(文良公) 강희맹(姜希孟) 선생의 따님이십니다. 장인 강희맹 선생 묘소는 대사헌공 묘소 오른쪽 진주강씨 묘역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참배 일행이 대사헌공께 인사를 드리는 사이 꾸물거리던 하늘에서 마침내 투두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금방이라도 한 줄기 소나기가 쏟아질 기세였습니다. 우리 일행은 서둘러 바로 아래에 모신 부호군공(휘 濾) 묘소와 손자(휘 彦泌) 묘소로 옮겨 인사를 드립니다.
대사헌공의 둘째 아드님이신 부호군공은 자(字)가 청지(淸之)이며, 성품이 활달하신 까닭이신지 충의위(忠義衛)에 들어가 어모장군(禦侮將軍) 행충좌위부호군(行忠佐衛副護軍)에 오르셨습니다. 아버님 대사헌공의 풍채와 성품을 이어받아 기개가 뛰어나고 도량이 넓어 장자(長者)의 풍모가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향년 66세인 1550년(명종 5년)에 돌아가셨는데, 손자 효헌공(孝獻公 : 휘 瓚)의 존귀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曺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습니다. 배위 단양우씨는 성균 사예(成均司藝) 우읍(禹揖) 선생의 따님이며, 합장으로 모셨습니다.
부호군공께서는 휘 언필(彦泌), 언부(彦溥), 언침(彦沉), 언함(彦涵), 언상(彦湘) 등 아드님 다섯 분을 두셨는데, 큰아드님(휘 彦泌) 묘소가 부호군공 바로 아래 모셔져 있습니다. 묘갈문은 강극성(姜克成) 선생이 짓고, 여성군(勵城君) 송인(宋寅) 선생이 글씨를 썼습니다. 그러나 부호군공 묘갈문 역시 오랜 세월의 흔적으로 음기를 알아볼 수 없는데, 강극성 선생 문집에 묘갈문이 전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실전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참의공문중에 전해지는 문서에 의하면 휘 언필 공께서 아드님을 두지 못하고 일찍 돌아가시자 아우 참의공(휘 언침)께서 홀로 되신 형수님(휘 언침의 배위)을 지극정성으로 모셨으며, 외직으로 나가실 때에는 형님의 신주를 모시고 다닐 정도로 우애가 깊었다고 전합니다. 그 이후 참의공문중에서 근 500년간 휘 언필 공 묘소에 세향을 올리고 있으니 그 정성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아래쪽으로 안산 이목종중의 첨정공(휘 璙)과 찬성공(휘 以鏡) 묘소가 모셔져 있습니다. 두 분은 대사헌공의 셋째 아드님 판결사공(휘 언)의 손자와 증손자이십니다. 계대는 아래와 같습니다.
대사헌공(휘 誠童) → 3子 판결사공(휘 漹) → 3子 승지공(휘 百齡) → 첨정공(휘 璙) → 1子 찬성공(휘 以鏡)
승지공(휘 百齡)은 우리 문중의 현존하는 최초 족보인 경진보(庚辰譜) 간행에 지대한 공을 세우신 관찰사공(휘 億齡)의 아우님이십니다. 잠시 묘역에 들러 인사를 드리고 강희맹 선생 묘역으로 이동합니다. 그 새 날씨가 더욱 꾸물거리더니 제법 굵은 빗줄기가 떨어집니다.
◆ 혼맥으로 이어진 인연, 강희맹 선생 묘역
강희맹(姜希孟) 선생은 본관은 진주(晋州), 자(字)는 경순(景醇), 호(號)는 사숙재(私淑齋)ㆍ운송거사(雲松居士)ㆍ국오(菊塢)ㆍ만송강(萬松岡)입니다. 세종대왕의 이질(姨姪)이자 시ㆍ글씨ㆍ그림으로 널리 알려진 강희안(姜希顔) 선생의 아우이기도 합니다.
강희맹 선생 묘소와 신도비는 경기도 기념물 제87호로 시흥시 하상동 산2번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본래 이 지역은 강희맹 선생의 장인 한백당(寒栢堂) 안숭효(安崇孝) 선생에게서 물려받은 전답이며, 이로 인해 진주강씨가 이곳으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순흥안씨 안숭효 가문에서부터 진주강씨 가문을 거쳐 안동김씨 대사헌공 가문으로 이어진 인연을 보면 조선 중기까지만 하더라도 친가와 처가 모두 중요하고 대등하게 여겼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진주강씨 묘역 맨 위쪽이 강극성 선생 묘소이며, 그 아래가 강희맹 선생 묘소인데 드넓은 묘역의 잔디를 말끔하게 손질해 놓아 후손들이 지극정성으로 돌보고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선대를 흠모하고 그리워하는 후손들의 마음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묘소로 올라가는 초입에 자그마한 인공 연못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농학자(農學者)로서도 뛰어난 재능을 지닌 강희맹 선생은 1463년(세조 9년)에 진헌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올 당시 중국 남경에 있는 전당지에서 연꽃 씨앗을 가지고 들어와 지금의 시흥시 하중동에서 연꽃을 재배를 시작했는데, 이것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지역의 마을 이름이 연성동인 것도 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관곡지(시흥시 향토유적 제8호)는 지금도 연꽃으로 유명한데, 강희맹 선생의 사위 권만형(權曼衡) 선생 가문에서 대대로 관리해 오고 있으니, 그 오랜 연원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진주강씨 재실 이름 역시 ‘연성재’로 그 옛날 정취를 느끼게 합니다.
강희맹 선생 묘소로 올라가는 길은 제법 가파른데, 동쪽과 서쪽에 화강암으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묘소 앞에는 묘비와 문인석 1쌍이 배치돼 있습니다. 묘소에서 능선 약간 아래쪽에 신도비가 서 있는데, 본래 신도비는 종2품 이상의 공신이나 뛰어난 학자에게만 허용될 정도로 아무나 세울 수 없었다고 합니다. 비문은 서거정 선생이 짓고, 박증영 선생이 글씨를 써서 1488년(성종 19년)에 세웠습니다. 묘역 동쪽 주택가와 가까운 쪽에도 진중강씨문중 묘소가 있는데, 강희맹 선생의 형님 강희안 선생 묘소도 경기도 장단에서 천봉하여 이곳에 모셨다고 합니다.
▲ 진중강씨문중 재실의 정문 '연성문'
▲ 연성재 내부
▲ 진주강씨문중 묘역. 오른쪽 비각 안에 강희맹 선생 신도비가 있으며, 그 뒤쪽 계단으로 올라가면 강희맹 선생 묘소이다.
▲ 강희맹 선생 신도비각
▲ 강희맹 선생 신도비
▲ 강희맹 선생 묘소를 답사하는 일행
▲ 강희맹 선생 묘소
▲ 강희맹 선생 묘소 후경. 아파트 너머로 기름진 논밭이 펼쳐져 있다.
▲ 강희맹 선생 묘소 전경. 바로 앞 묘소가 아니라 그 위쪽 좌우로 계단을 설치한 곳이 선생의 묘소이다.
▲ 강희안 선생 묘소. 비무장지대인 경기도 장단면에서 1987년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 관곡지의 안동권씨 화천군파종중 재실. 관곡지는 강희맹 선생의 사위 권만형 선생 가문에서 대대로 관리해 오고 있다.
▲ 관곡지 풍경 중 일부
◆ 보라빛 붓꽃의 향연, 판결사공(휘 漹) 묘역
진주강씨 묘역에서 내려와 10:25분경 다시 익원공파 선영의 판결사공(휘 漹) 묘역으로 향합니다. 비는 오락가락하면서 금방이라도 퍼부을 듯하다가는 이내 그치기를 반복해 종잡을 수 없습니다. 오늘 참배가 끝날 때까지 조상님들 음덕으로 쏟아지지 않기만을 빌어 봅니다.
판결사공 묘소에는 이목종중의 형식 씨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묘소는 대사헌공 묘소를 바라보고 그 왼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아래에 승지공(휘 백령) 묘소가 있습니다. 봉분 바로 앞에는 방부(方趺) 위에 묘갈 형태의 비신을 얹은 묘비가 자리하고 있는데, 방부는 연꽃과 당초문으로 장식해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 위의 묘갈은 흰 대리석인데 세월의 풍파로 비문이 거의 마멸돼 글자를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비문은 대제학 박계현 선생이 짓고, 심충겸 선생이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묘갈 위쪽 전액(篆額)에 ‘金公神道碑銘’으로 적혀 있어 묘갈이 아니라 신도비라는 명칭을 쓰고 있어 이채롭습니다.
판결사공 묘소에 인사를 드리고 다 함께 사진을 찍습니다. 묘역에 붓꽃들이 만개했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초록색 융단에 보라색 물감을 점점이 뿌려 놓은 듯한데, 그 오묘한 배색이 간간히 흩날리는 빗방울과 함께 번져나가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가 그린 ‘수련’과 ‘붓꽃’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 이목종중의 판결사공 묘역을 답사하는 일행
▲ 판결사공 묘소 앞에서 기념촬영
판결사공 묘소 바로 아래쪽에 승지공(휘 백령) 묘소가 있습니다. 승지공은 1567년(명종 22년)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불과 29세로 요절하여 안타까움이 더합니다. 중형(仲兄)이신 관찰사공(휘 億齡)께서 애절한 묘갈문을 짓고, 민인서(閔麟瑞) 선생이 글씨를 썼습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10:40분이 되었습니다. 인원 점검을 한 뒤 안성이씨 이숙번 선생 묘소로 향합니다.
◆ 안성이씨 이숙번 선생 묘역 답사
이숙번 선생 묘역은 대사헌공 묘역에서 자동차로 불과 10여 분 거리인 물왕저수지 인근입니다(지도 참조). 전세버스에 올라탄 일행들은 최근 보물로 지정된 도평의공파의 만취당과 문온공파 부사공(휘 明理) 묘지호에 관한 이야기로 즐거운 시간을 갖습니다. 만취당은 1582년(선조 15년)에 지어진 누각 형태의 건물로 정면5칸×측면 1칸의 팔작지붕인데, 도평의공파 집성촌인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207번지에 있습니다. 만취당 현판은 한석봉 선생의 필적으로 유명하며, 얼마 전까지 서애 유성룡 선생의 어머니 안동김씨께서 사용하신 가마틀이 보관돼 있었습니다. 현재 만취당은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문온공(휘 九容)의 둘째 아드님인 부사공(휘 明理) 묘지호는 정식 명칭이 ‘분청사기 상감 정통4년명 김명리 묘지(粉靑沙器象嵌正統4年銘金明理墓誌)’로 성천도호부(成川都護府) 부사(副使)를 역임한 부사공의 가계(家系)와 행적을 기록한 묘지(墓誌)입니다.
대사헌공 묘역에서 출발, 연성초등학교를 지나 나분들교차로에서 좌회전한 다음 3분 거리(약 800미터)인 물왕교차로에서 다시 우회전하면 물왕저수지가 나타납니다. 이 길은 약간 오르막길인데, 역시 3분 거리(약 800미터)인 오르막길 끝 산을 절개한 곳에 이숙번 선생의 묘소가 있습니다. 본래 오르막길 끝 부분은 수원 참의공종중 현감공(휘 瑾)의 첫 배위 밀양박씨 묘가 있던 안산(安山) 직곳리(職串里) 무랑동(茂郞洞)인데, 이 길이 나면서 2000년 봄에 박씨부인 묘를 수원시 이의동 현감공 묘역으로 천봉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수원 참의공종중 선영을 소개하면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숙번 선생 묘소는 시흥시 산현동 산71번지로, 입구에 안성이씨 재실이 있습니다. 재실 현관에 ‘안성이씨 충정공재실’이라는 현판을 비롯해 ‘안성이씨 충숙공재실’과 ‘안성이씨 이부시랑공재실’이라고 적은 현판이 나란히 걸려 있어 비교적 찾기 쉽습니다. 재실 관리인에게 방문 목적을 알리고 가파른 절개지 위로 난 목재 계단을 걸어 올라갑니다.
이숙번 선생은 1393년(태조 2년) 문과에 급제한 뒤 1398년 지안산군사로 있으면서 제1차 왕자의 난 당시 태종을 도와 정사공신에 책록되었습니다. 태종 즉위 후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좌명공신이 되어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고위직으로 승진하였으나, 자신의 공에 자만하다가 탄핵을 받아 1417년(태종 17년)에 경상도 함양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세종 때 용비어천가를 지을 당시 선대 왕의 사실을 잘 알고 있어 세종대왕이 잠시 불러 용비어천가 편찬에 참여토록 했으나, 편찬작업이 끝나자 다시 유배지로 보내져 그곳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묘소에는 문인석 4기, 장명등 1기와 묘비가 서 있습니다. 묘비 앞면에 ‘유명조선국 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 안성군 시충숙공 안성이공 휘 숙번지묘 배부부인 서원정씨 부우(有明朝鮮國 輔國崇祿大夫 議政府左贊成 安城君 諡忠肅公 安城李公 諱 叔蕃之墓 配府夫人 西原鄭氏 祔右)’라 적고, 음기에 작은 글자로 행적을 적었습니다. 이 묘는 여말선초 묘제양식인 사각형태 무덤으로 시흥시에서는 유일하다고 합니다. 후손들이 개보수하는 과정에서 일부 원형을 잃었으나 2006년에 정밀발굴조사를 하여 원형을 회복하였다고 합니다. 봉분 앞에 널찍한 상석이 있고, 그 앞에 상당히 큰 장명등을 놓았는데, 제전이 아니라 중계(中階)에 배치한 점이 특이합니다. 장명등은 사면에 장식을 베풀어 매우 아름다운데, 옥개석이 없어져 새로 만들어 올려놓았습니다.
▲ 이숙번 선생 묘역 입구의 안성이씨 재실
▲ 묘역 입구의 이숙번 선생 묘비와 안내문을 살펴보는 일행
▲ 이숙번 선생 묘비
▲ 묘역으로 올라가는 일행. 지난 2000년도에 2차선 도로가 나면서 묘역 앞부분이 잘려 나갔다.
▲ 이숙번 선생 묘소. 봉분이 여말선초 묘제양식인 사각형 형태이다.
▲ 장명등을 살펴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일행
▲ 이숙번 선생 선대 단소. 앞에서부터 부친 이경 선생, 조부 이사정 선생, 증조부 이희 선생 단소이다.
▲ 이숙번 선생 묘소 후경. 사진에는 보이지 않으나 왼쪽에 물왕저수지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이숙번 선생 묘소 뒤로 부친 이경(李坰) 선생 등 선대의 설단을 조성해 놓았는데, 선생의 조부 이사정(李思正) 선생의 마지막 글자가 특이합니다. 재용 회장께서 무슨 글자냐고 묻자 어느 분이 ‘바를 正’자라고 하시는데, 처음 보는 글자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해서(楷書)로 적은 음기를 보니 ‘바를 正’자가 맞습니다. 집에 돌아와 이체자 사전과 중국 사이트 등에서 찾아보았으나, 워낙 특이한 글자인 탓에 어느 곳에도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배우고 또 배워도 늘 모자라는 것이 사람의 숙명인가 봅니다.
<계속>
글 윤식/사진 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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