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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단양등소백산기(遊丹陽登小白山記)-단양서 노닐며 소백산을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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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석 작성일14-05-28 00:51 조회2,514회 댓글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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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단양등소백산기(遊丹陽登小白山記)-단양서 노닐며 소백산을 오르다.

2014년 5월 어느날, 답답한 심경을 달래려 다인승 가마에 올라 희방사 코스 등산로 초입에서 내렸다. 오전 10:30, 폭포는 마른숨을 내쉬며 포말없이 직하했다. 오늘은 연화봉을 올라 죽령휴게소로 하산하는 코스를 잡아 정상에 오른다. 개인적으로 제일 지루하고 고단했던 산행이 월악산과 함께 소백산이었기에 벌써부터 아찔하다.

희방사를 지나 정상에서 물 한 모금으로 허기를 달래고 산 아래를 굽어본다. 강은 산을 넘지 않는다. 등고선 앞자락을 따라 유순한 곳을 골라 서해까지 나아가는 남한강이 보인다. 이천 년을 버티다 스러진 주목의 그루터기 아래서 솜다리(에델바이스)가 올라오고 있었다. 솜다리의 꽃말처럼 '잊을 수 없는 추억'을 간직한 죽령과 봉수로의 기억을 더듬으며 두 개의 산성을 눈에 넣었다.

◯온달산성(溫達山城)-단양 영춘에 있는 삼국시대 성곽(사적 제264호)으로 석회암과 사암으로 쌓았고 우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성 안의 물을 밖으로 빼는 배수시설인 수구(水口)가 북쪽 성벽에 있으며 긴 사다리꼴이다. 성 안에서 채집된 유물로 토기편, 기와편, 숫돌, 철화살촉 등이 있다. 광개토왕릉비문에 보이는 아단성(阿旦城)으로 비정(比定)하기도 하나 필자는 서울 아차(阿且)산성을 아단성으로 본다(단旦과 차且를 보라).

◯신라적성과 적성비가 현재 중앙고속도로 단양휴게소 위에 있다. 78년 발견되어 그 후 비각을 세우기 전, 필자가 고구마밭에서 뒹굴고 있던 것을 살피며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새롭다. 산 아래 마을의 경작지엔 단양의 특산물인 담배와 마늘, 고추들이 심어진 이랑들이 넘실대고 있었다.

석문과 도담삼봉, 정도전의 고향이다.

◈정도전(鄭道傳, 1342-1398)-조선을 개창했다. 이성계와는 군신관계가 아닌 동지였다. 「용비어천가」에서 말하는 해동육룡(목,익,도,환조,이성계,방원)에서 절대왕권을 꿈 꾼 태종에게 피살되었다. 호가 삼봉(三峰, 도담삼봉)이다. 공자의 탄생과 닮아 야합(野合)의 인과에 따른 출생의 비밀이 있고 제갈량처럼 주군을 받들어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고자 하였다(삼고초려는 각색이다 제갈량도 삼봉처럼 주군을 찾았다). 이곡(李穀)의 아들 색(穡)의 문하에서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김구용(金九容),박의중(朴宜中),윤소종(尹紹宗) 등과 함께 유학을 배웠다.

◈김구용(1338-1384, 대사성, 시 文溫) - 성리학을 일으키고 숭유억불의 선봉으로 사장(詞章)을 잘하였다. 문집으로 『척약재집(惕若齋集)』이 있으며 예천 물계서원(勿溪書院)과 남원 용장서원(龍章書院)에 배향되었다.

『척약재집(惕若齋集)』의 「서문」을 하륜과 정도전이 쓰고 「발문」을 이색이 쓰고 정몽주, 이숭인, 우현보(단양) 등과 시를 통해 교류를 하였다.

◈이곡 - 이색 - 이종선(권근의 사위) - 이계주 - 이개(李塏, 사육신)

권근-권제-권람

권제(權踶, 1387~1445, 諡 文景) - 정인지, 안지와 [용비어천가] 지음

권람(擥, 1416~1465) - 女 ♡ 남이(태종의 외손), 女 ♡ 김수형(양녕대군의 외손자), 女 ♡ 신수근(연산군의 처남, 중종장인)

서미성(권근의 사위) - 서거정(1420-1488, 권제의 생질)

서거정 - 김국광, 강희맹, 최항, 노사신 등과 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

강 건너에 지금의 적성(面)이 보인다. 내 고향이다. 고려조 우탁과 우현보가 태어난 곳이다.

◈우탁(禹倬, 1263-1342)-고려후기 학자. 본관은 단양(丹陽). 호는 역동선생(易東先生)이다. 1308년(충선왕 즉위) 감찰규정(監察糾正)으로 있을 때 충선왕이 부왕(충렬왕)의 후궁인 숙창원비(淑昌院妃, 김취려의 증손녀)와 밀통하자 죽음을 무릅쓰고 극간했다. 단양팔경 중 사인암은 우탁이 사인(舍人) 재직 시 이곳에서 머물렀다는 사연이 있어 조선 성종 때 단양군수였던 임재광이 사인암이라 명명했고 암벽에는 우탁의 글이 남아 전한다.

한 손에 막대 잡고 - 우탁. 출전『청구 영언』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싀 쥐고

늙난 길 가싀로 막고 오난 백발(白髮) 막대로 치려터니

백발(白髮)이 졔 몬져 알고 즈럼길노 오더라.

*사인암은 추사(김정희)선생이 "하늘에서 내려온 한 폭 그림과 같다"고 했고, 단원(김홍도)이 농담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병진년화첩(丙辰年畵帖)』에 담았다.

*안산의 단원구는 단원이 스승 강세황(당시 부곡동과 목감사이 거주)에게 배워 생긴 지명이다.

◈우현보(禹玄寶, 우탁의 손자, 1333-1400)-여말선초의 문신. 본관은 단양(丹陽). 문과에 급제하고 춘추관검열이 되었다.

삼봉 아래로 시가지가 길게 늘어섰고 증도(시루섬)아래에 햇볕을 받아 물비늘이 반짝거리는 여울에서 발가벗은 영장류가 직립보행을 하며 다가온다.

◯단양 수양개 유적(垂楊介 遺蹟)-사적(史蹟) 제398호, 후기 구석기문화를 대표하며 동북아의 좀돌날 제작기법의 확산과 전파과정을 밝히는데 매우 중요하다.

충주로 가는 물길을 따라 내려오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사또님을 옛시가지(구단양) 향교앞에서 만났다.

◈이황(李滉 1501-1570)- 1548년 단양 군수로 부임. 고을 관기 두향(묘는 적성)과의 인연.

계속해서 시인과 묵객들이 넘쳐나 주막문이 번들거리는 통에 대충 그 얼굴들만 살피다가 죽령휴게소로 하산하기로 하고 투덜투덜, 포장길에서 저무는 궁벽한 산촌을 바라보며 두 눈을 적시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김병연(삿갓)이 옥순봉을 노래했고 학봉(김성일)이 다녀간 흔적을 『학봉집』을 통해 알 수 있었고, 김일손과 성호(이익), 목은(이색)과 율곡(이이), 매계(정탁)와 주세붕, 허목, 백곡(김득신) 등이 시문을 남겼으며 군수는, 김구덕(태종의 빙장, 명빈父)과 사계(김장생)선생이 퇴계와 함께 선정을 베풀었다.

◈김득신(金得臣, 1604-1684)-조선조 시인. 호는 백곡(栢谷)이며 증조는 충갑, 조는 진주목사 시민(時敏), 부는 경상감사 치(緻)다. 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가선대부에 올랐다. 『백이전』을 가장 좋아하여 1억 1만 3,000번이나 읽어 자신의 서재를 '억만재'(취묵당, 괴산)라 하였다.

◈김충갑(1515-1575, 안악군수, 상락군) - 호는 구암,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서청주로 유배되었고 누차 요승보우를 벌할 것을 상소한 바 있으며 저서로 『구암집(龜巖集)』이 전한다. 구암(龜巖)은 지금 천안 병천에 있다.

충갑(상락군) - 시민(상락부원군, 진주대첩, 시 충무) - 치(안흥군) - 득신(안풍군) - 천주(화은군) - 가교(동은군)로 6대 봉군의 가계.

◈김치(金緻, 1577-1625년)-호는 남봉(南峰), 동래부사를 거쳐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어릴 적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경서(經書)에 통달하였고, 특히 점술을 연구하여 천문(天文)에 밝았으며 저서로 『심곡비결(深谷祕訣)』이 있다. 제주판관(종5품) 시 한라산을 여행 후 쓴 명문「유한라산기(기행문)」와 방선문에 5언절구의 시가 음각으로 남아 전한다.

◈심기원(器遠, 1587-1644, 좌의정) - 인조반정에 가담하였다.

인조반정을 앞둔 어느 날, 밤이 이슥해서 천문과 역학에 밝다고 장안에 소문이 자자한 선비를 찾아 용호(용산)로 가, 자신의 사주를 일러주었다. 선비가 이미 거사(반정)임을 알고 말하자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과연 선생께서는 소문 그대로라며 큰절로 예를 표했다. 이어 준비해 가지고 간 또 다른 사주를 내밀며 거사 날짜(3월 22일)까지 털어놓았다. 이에 선비는 이 사주의 주인공은 3월 12일에 기가 흥하니 거사 날을 바꾸라는 것이었다. 난감한 표정으로 돌아온 심기원은 동지들과의 밀회에서 선비의 묘책을 강력히 주장하여 결국 거사를 성공하게 되니 사주의 주인공은 바로 인조(능양군)였다. 거사가 끝나고 선비를 모셔 고명을 묻자, 김치(金緻)라고 했다고 한다.

참고문헌- 『청구야담(靑邱野談)』,『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국조방목(國朝榜目)』, 『전고대방(典故大方)』외

소백산 남쪽을 내려가면 풍기와 순흥땅이다.

◈안향(安珦, 1243-1306) - 초명은 유(裕), 뒤에 향(珦)으로 개명하였으나 조선조 문종의 이름과 같아 이를 피해 다시 유로 고쳐 부름.

◈주세붕(周世鵬, 1495-1554)- 풍기 군수로 있을 때, 한국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소수 서원)을 창설하였다.

부석사를 찾아가는 날이면 무량수전에서 뒷걸음질로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소백산 영봉을 보라! 남서진하며 펼쳐진 화려한 융단은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가을날 설악산 오세암 앞 근경과 함께 대자연이 주는 경관의 수려하고 장엄한 비경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칼칼하던 목구멍을 축이고 늦게 상경길에 올랐다. 퇴계와 안향이 지친 노구를 끌고 넘었던 죽령고개를 뒤로하고 중앙고속도를 접어드니, 저 멀리 금수산(▲1,016)이 보인다. 퇴계가 명명한 금수산(錦繡山), 아마 가을이 되면 단풍이 울긋불긋할 게다.

다리 아래로 남한강이 흐르고 있었다. 소금배가 서해의 기별을 안고 달려와 담배와 마늘을 싣고 되짚어 내려갔고, 임진년과 병자년엔 병방이 보낸 봉화의 신호 뒤로 파발들이 죽령을 넘어 배를 갈아타고 충주쪽으로 장계와 간찰들을 날랐다. 임금이 부르면 구담과 옥순봉을 지나 여주와 두물머리까지 생선처럼 나아가 용호(용산)에 닿았다. 고려조엔 벽란도와 강도(강화)까지 배를 몰았다. 강가의 얼음이 녹고 땅이 부풀면 어부와 사공들은 진과 포구에서 흘수 아래의 구멍을 살폈고, 서당과 향교, 서원의 학생들은 솜다리(에델바이스)의 꽃말처럼 '잊을 수 없는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스승을 모시고 천렵을 했다.

다음 달 초, 관찰사(감사)와 목사, 유수, (도호)부사, 사또를 그만두거나 임기가 다 되어 고향으로 간다기에 백성들이 모여 수군거리며 새로운 목민관에 대해 깨깨오독(悟讀)을 하느라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안산땅에 도착하니, 낙마한 이성계(이단)가 삼봉선생을 찾고 있었다.

함께하신 산우님들! 눈이 호사를 누렸습니다!

댓글목록

김상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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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遊丹陽登小白山記] 吾金의先祖님과 交遊하며 歷史와 登頂한 小白山길 感銘입니다 丹陽에 한번 놀러가고 싶네요. ks相根

김영윤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영윤
작성일

반갑습니다
제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오랜만에 낯익은 화려한 문장을 읽고 있습니다

김영환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영환
작성일

맛갈나는 글 솜씨 여전하십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종종 소식전해주십시요.

김윤식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윤식
작성일

대부님, 안사연 답사 때 뵐 수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가끔 안부 전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