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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팝나무 그늘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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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석 작성일14-05-20 22:05 조회2,2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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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팝나무 아래서(시흥시 일부의 가로수) 초하에------

 난 오늘 저 흰쌀밥을 연두의 어린 잎새가 서러운 오월의 하늘로 수북한 고봉밥을 만들어 치켜 올린 모양을 한 커다란 한 송이의 가로수를 바라보며, 한 그루를 꺾어 여말부터 세간에서 "이밥"을 부르며 침을 삼킨 이들의 밥상에 탈탈 털어주고 싶어 안달이 났다. 땅에 떨어지기 전에 얼른 주어 담기라도 하려는 양이다.
 이팝나무는 이(李)밥, 입쌀(멥쌀)밥, 흰밥, 쌀밥, 곤밥(고운밥, 제주방언) 등의 쌀밥(백반)에 관한 어원과 함께 24절기(태양력) 중 입하(立夏)무렵에 그 꽃이 핀다(보릿고개, 춘궁기)하여 "입하목"이라는 두 가지 설이 공존한다.
 이(李)밥의 해석은 이(李)씨가 나눠주는 밥이란 의미로, 공양왕(恭讓, 공손하게 양위한 왕) 때 조준과 정도전(혁명파라 하자) 등이 임금과 왕족, 지배층(구가세족, 목은 이색파)들과 절충한 토지개혁안을 접하고 백성들이 앞으로는 좀 덜 빼앗기고 "이(李, 이성계 일파) 씨" 덕분에 쌀밥을 구경할 수도 있다는 희망의 한 끼 식사에 대한 기대와 모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조선이 개창되고 한참, 아니 망할 때(경술국치)까지도 제삿날이나 되어야 또 그나마도 (구경?)할 수 있을까 하는 귀한 것이었다.
 고려조 내내 18자(十八子)득국이니, 목자(木子)득국이니 하는 설에 시달렸던 왕실은 오얏(李)나무를 베는 벌리사까지 동원하다가 결국, 조선조 최초로 충무공 시호를 받는 조영무(좌정승)가 정몽주를 개성 어느 돌다리(선죽교)에서 격살한 후 패망하여 성(姓)을 바꾸며 청야작전에 들어간다.
 왕(王) 씨는 점(点)을 하나 찍어 옥(玉) 씨가 되고, 먹물을 죽이며 획을 두 획 더 보태는 수고로 전(全) 씨가 되기도 하였다.
 한양(고려조 남경) 동쪽 지기가 약해 흥인지문(보물 1호, 之:어조사로 ~의로 쓰임)은 네 글자로 하고, 숭례문의 현판은 관악산의 화기를 막는다며 방패모양의 세로로 세운 조선은, 왕 씨들이 잘 보이지 않자 눈에 띄지 않아 두려운 금(金) 씨들의 처리를 놓고 또 고민에 빠지고 만다.
 금 씨들은 "농자천하지대본"이라 기치를 내세운 조선이 "사농공상"으로 그 순서를 혼동하던 시기동안 인구 점유율이 높다는 까닭으로 그냥, 부를 때에는 "김이라고 하라!" 했다.('군관민'이 '민관군'으로 바뀐 요즘)
 이 까닭은, 음양오행설에서 상극과 상생이 존재하는데 예를 들면 물이 물을 당기는 성질(마중물), 화전농의 진화(맞불) 등이 그것이다.
 "금목수화토"에서, 물이 불을 끄고 불이 쇠를 녹이고 쇠가 나무를 이기는 형국(현상)을 접목하여 금(金) 씨가 이(李) 씨의 목(木)을 누르니 그리 되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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