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문과급제 상세정보-김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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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4-02-24 11:41 조회2,689회 댓글0건본문
김영돈(金永旽)
[고려문과] 충렬왕(忠烈王) 31년(1305) 을사(乙巳) 을사방(乙巳榜) 병과(丙科) 1위(4/33)
일명 김영돈(金永暾) 호 균헌(筠軒)
졸년 1348년(충목왕 4)
본관 안동(安東[舊])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사전
[이력사항]
선발인원 33
관직 좌정승(左政丞)
[가족사항]
[부] 성명 : 김순(金恂)
[조부] 성명 : 김방경(金方慶)
[증조부] 성명 : 김효인(金孝印)
[외조부] 성명 : 허공(許珙)
[출전]《등과록 전편(登科錄前編)》(하버드옌칭도서관[K 2291.7 1747.4a])
동년
장자빈(張子贇) ? ~ ? 미상(未詳) 을과(乙科) 1[壯元]위
김광철(金光轍) 중신(仲申) 둔재(鈍齋) 1289 ~1349 광산(光山)을과(乙科)2위*父 김태현(金台鉉)
한종유(韓宗愈) 사고(師古) 복재(復齋) 1287 ~ 1354 한양(漢陽) 을과(乙科) 3위
김영돈(金永旽) 균헌(筠軒) ? ~ 1348 안동(安東[舊]) 병과(丙科) 1위
장계(張桂) ? ~ ? 인동(仁同[2]) 병과(丙科) 2위
인물사전
한자 金永旽
분야 역사/고려시대사
유형 인물
시대 고려
성격 무신
성별 남
생년 미상
몰년 1348년(충목왕 4)
본관 안동(安東)
관련사건 조적의 난
대표관직(경력) 강릉부녹사|지공거|정치도감 판사
집필자 진성규
[정의]
?∼1348(충목왕 4). 고려 후기의 무신.
[내용]
본관은 안동(安東). 할아버지는 방경(方慶)이다.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강릉부녹사(江陵府錄事)가 되었으며, 1340년(충혜왕 복위 1)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공수(李公遂) 등을 시취(試取)하였다.
조적(曺頔)의 난 때 시종한 공로로 1342년에 일등공신이 되어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346년(충목왕 2)에 찬성사(贊成事)로 원나라에 가서 의복·음식 등을 보내준 데 대해 사례하였다.
이듬해 왕후(王煦)와 함께 귀국하여 원나라에서 왕의 실덕을 묻자 소인들의 장난이라 변명하니 이를 정리하라는 원나라의 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정치도감을 설치하고 판사가 되어 폐정을 시정하던 도중, 불법행위를 하던 기삼만(奇三萬)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어 죽게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일로 원나라로부터는 치하를 받았으나,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의 심한 반발에 부닥쳐 구금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의 지지로 곧 석방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사 열전 김방경 附 김영돈
김영돈(金永旽)1)은 어릴 때 자가 나해(那海)였다. 충렬왕(忠烈王) 말엽에 과거에 급제2)해 처음 강릉부녹사(江陵府錄事)로 임명되었다. 조적(曺頔)의 난3) 때 왕을 호종했던 공로로 일등공신이 되었으며 추성병의익찬(推誠秉義翊贊)의 호를 하사받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졌다. 뒤에 충혜왕(忠惠王)이 원나라에 잡혀가자 재상과 국가의 원로들이 황제에게 글을 올려 왕의 죄를 사면해 줄 것을 청하려 했지만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다. 김영돈이, 왕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 법이니 급히 사면을 요청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당시의 사정은 「김윤전(金倫傳)」에 실려 있다.
충목왕 때 좌정승(左政丞)에 올라 왕후(王煦) 등과 함께 판정치도감사(判整治都監事)가 되었다. 당시 기삼만(奇三萬)이 죽은 일4) 때문에 행성 이문소(行省理問所)에서 정치관(整治官)인 서호(徐浩)와 전녹생(田祿生) 등을 수감하자 김영돈이 왕에게 왜 정치관을 수감하느냐고 항의했다. 왕이, 기삼만이 남의 밭 다섯 결(結)을 빼앗았다고 어찌 죽게까지 했는가하고 힐문하자 김영돈은, 기삼만은 권세를 믿고 제멋대로 굴었으니 어찌 밭 다섯 결만 빼앗았겠느냐고 반문했다. 왕이 이문(理問)5) 하유원(河有源)을 불러 그 일에 대해 묻자 김영돈은,
“우리는 직접 황제의 명을 받들고 먼저 원흉을 치죄한 것이니 서호와 전녹생이 무슨 죄이겠습니까?”
하고는 제 발로 행성(行省)의 옥에 들어갔으나 왕이 내보내게 하였다. 이 사건의 시말은 「왕후전(王煦傳)」에 수록되어 있다. 충목왕 4년(1348)에 죽었다.
고려사 열전 김방경 附 김영돈
고려사 열전 김방경 附 김영돈
1 김영돈(1285~1348) : 조부는 김방경(金方慶)이며, 부친은 김순(金恂)이고, 모친은 양천 허씨(陽川許氏) 문경공(文敬公) 허공(許珙)의 딸이다. 어릴 때 이름은 나해(那海)이고, 자는 휘곡(暉谷)이다. 강릉부녹사(江陵府錄事)·가순부승(嘉順府丞)·소부판사(小府判事)·찬성사 등을 역임하였다. 충혜왕 복위 1년(1340)에 지공거로서 동지공거 안축(安軸)과 함께 과거를 주관하여 이공수(李公遂) 등을 선발했다. 충숙왕 3년(1316)에는 원나라에서 충숙왕의 가례를 청하여 복국장공주(濮國長公主)를 맞이한 공으로 일등공신에 책봉되었으며, 또 충숙왕 후8년(1339) 조적(曺頔)의 난 때 시종한 공로로 일등공신이 되어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졌다. 충목왕 2년(1346) 원나라에 사례하였고, 왕후(王煦)와 함께 원나라 황제의 명을 받아 정치도감(整治都監)을 설치하고 판정치도감사(判整治都監事)가 되었다. 그 후 벽상삼한(壁上三韓)·삼중대광(三重大匡)·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책봉되었다. 한종유(韓宗愈)와 함께 청하군(淸河君) 정해(鄭瑎)의 문인이다. 부인은 판도사랑(版圖仕郞) 신여강(申汝岡)의 딸로 이천군(利川郡)에 봉해졌다. 1남 2녀를 두었는데 장녀는 통례문판관 오원경(吳元敬)에게, 차녀는 삼사판관 윤식(尹湜)에게 시집갔다. 아들은 김진(金縝)으로, 공민왕대 장복직장(掌服直長)·형부상서(刑部尙書)·경상도 원수(慶尙道元帥) 겸 도체찰사(都體察使) 등을 역임하였고, 홍건적의 침입 때 서경(西京)에서 적을 물리치기도 하였다. 문화 유씨 우대언 유보발(柳甫發)의 딸과 결혼했다. 그러나 「유보발 묘지명」에는 딸의 혼인관계에 김진과 관련된 내용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고려사』 권73, 지27, 선거, 과목 선장(選場).
『동문선』 권100, 정씨가전(鄭氏家傳).
김용선 편, 「김영돈(金永暾) 묘지명」·「유보발(柳甫發) 묘지명」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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