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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곡 김득신 선조님 묘소와 김득신 문학길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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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13-09-13 12:52 조회4,5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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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증평 지역의 한 분이 운영하고 있는 블로그(증평 지역의 새벽을 열며-http://blog.daum.net/8385114/15702170)입니다

여기에는 백곡 선조님의 묘소와 그 주변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백곡 선조님을 김해김씨 후손인 김유신 장군의 후손으로 잘못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해당 블로그에 댓글로 수정을 요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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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 율리 좌구산 둘레길 4 - 김득신 문학길

김득신문학길

 

 

 

김득신 문학길은 율리삼거리에서 백곡 김득신(1604~1684)의 묘소에 이르는 짧은 구간이다. 삼거리에서 마을회관 앞 이정표가 가리키는 마을길로 들어서서 마을의 뒷산 언덕으로 오르면 백곡의 시비공원과 함께 그의 묘가 위치하고 있는 묘역에 이를 수 있다. 백곡의 아버지 김치가 이주하여 마을을 연 밤티는 백곡의 고향. 그의 사후 밤티마을 뒷산 구석산 자락 현재의 자리에 묘를 써 잠들었다.

백곡의 묘소는 아버지 김치의 묘 아래 비석과 동자석이 있는 묘이다. 묘의 서남쪽에는 그의 생애와 작품을 기리는 마음으로 시비공원이 마련되어 있다. 이 공원의 시비에는 백곡이 노래한 '율협'(栗峽·밤티골)이란 제목의 칠언율시가 새겨져 있다. 백곡의 묘에 서나 시비공원에 서나 한눈에 율리가 바라다 보인다.

백곡 김득신은 금방 배운 것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둔재였다. 백곡은 그런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고자 공부해야 할 것은 읽고 또 읽어 마침내 자기 것으로 만들고 마는 노력파였다. 책 한권을 11만 3,000번이나 읽었다는 점만 보더라도 그의 노력이 어땠는지 알 수 있다. 시문이 뛰어나 조선효종이 극찬했고, 당대의 문장가들도 칭송했던 백곡은 그 노력 끝에서야 주옥같은 시문을 창작하는 천재가 된 것이다.

율리 삼거리에서 고샅길로 접어들어 뒷산으로 난 길을 이용하여 묘를 찾아 가는 동안 사마천의 사기 백이전을 11만 3,000번이나 읽은 것으로 유명한 백곡을 생각해 볼 일이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대기만성형 인물이었음을 말이다.

찾아가는 길
  • 차량용 내비게이터 입력 주소 : 충북 증평군 증평읍 율1리
  • 자가용 이용안내 : 중부고속도로 증평IC를 통과하여 사거리에서 9시방향 우회전 후 계속 직진하면 6.3km 전방 연탄사거리에 닿는다. 이곳에서 우회전 후 다리를 건너자마자 좌회전 후 직진하면 군청사거리.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계속 직진, 1.8km 전방 증천교삼거리에서 미원방면으로 우회전 후 계속 직진하여 6.0km 전방 율리삼거리 마을회관 앞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문화재 안내
  • 종 목 : 증평군 향토유적 제6호
  • 지정일 : 2004. 4. 30
  • 소재지 : 충북 증평군 증평읍 율리 산8-1
  • 시 대 : 조선시대

백곡 김득신(1604~1684)은 조선중기의 대시인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자공, 호는 백곡 또는 구석산인이다. 진주목사 김시민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김치의 아들이다. 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가선대부에 올라 안풍군에 봉해졌고, 문보다는 시, 특히 오언절구를 잘지었다.

당대 한문 사대가인 이식으로부터 “그대의 시문이 당금의 제일”이라는 평을 들음으로써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한권의 책을 수만번 읽는 것으로 유명하며 특히, 백이전을 억만번이나 읽었다하여 자기의 서재를 ‘억만재’라 하였다. 묘소에는 비문과 동자석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아버지 김치의 묘아래 안치되어 있다.

신라 장군 김유신 후손의 집성촌, 밤나무가 많아서 밤티

김득신 묘소가 위치하고 있는 율리는 점촌, 밤티, 삼기 등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는 증평의 산골이다. 이들 마을 중 밤티는 신라장군 김유신의 후손들이 모여살기를 250여년. 안동김씨의 집성촌이다. 세월의 변천에 따라 대처로 떠나간 안동김씨의 자리를 메우며 지금은 상주박씨를 비롯한 타 성씨들이 터줏대감 안동김씨와 함께 오순도순 살고 있다.

 

 

김유신 장군의 자손이자 백곡의 아버지 김치의 13대손까지 내려와 대대로 살고 있는 ‘밤티’의 전통지명은 250여년 전 김치가이주할 당시 밤나무가 숲을 이루는 곳이었던 데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김치가 이주하면서 부터 산자락을 개간하여 논밭을 일구고 살아 온 이 마을의 밤나무는 옛날처럼 온 산을 뒤덮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 마을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나무가 밤나무로 옛지명의 유래를 오늘에 전하고 있다.

 

삼거리에서 마을회관 앞 이정표가 가리키는 마을길로 들어서서 마을의 뒷산 언덕으로 오르면 백곡의 시비공원과 함께 그의 묘가 위치하고 있는 묘역에 이를 수 있다. 백곡의 아버지 김치가 이주하여 마을을 연 밤티는 백곡의 고향. 그의 사후 밤티마을 뒷산 구석산 자락 현재의 자리에 묘를 써 잠들었다.

 

 

 

 

 

 

 

 

 

사자와의 소통, 김득신 묘소 일원의 석물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 숱한 세상과의 이별이 있어도 사후의 세계는 모든 이들에게 언제나 신비롭고, 두렵다. 산자가 죽은자와의 소통을 위하여 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 묘지의 석물이 아닐까. 아버지 김치의 묘와 그 아래 김득신 묘 일원을 살피다 보면 조선시대 장묘문화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앞에는 죽은 자의 혼이 나와 노는 혼유석이 놓여지고, 북망산천 갔다가 오는 길 잊지 말라며 세운 망주석, 문관을 지낸 고관의 무덤을 지키는 문인상, 동자상 등의 석물은 살펴보며 사유해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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