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倍達民族之起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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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근 작성일13-07-09 11:57 조회2,541회 댓글0건본문
倍達民族(배달민족)의 起源(기원)
지금 앞에서 擧揭(거게)한 倍達(즉 韓族이 檀木을 倍達이라 부른다)의 起源은 檀君의 開化로부터이고 韓中 兩族의 關聯된 歷史가 始作된다. 이 倍達族은 上古에 瀛海(영해)(濟州) 以北에서 小海(黑龍州)의 以南까지 九夷(「夷」는 大弓을 뜻하는데 韓族은 大弓을 잘 쏘는 民族이라는 뜻이다)로 分散(분산)해 살았다.
伏羲氏(복희씨)와 虞의 舜임금도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神檀記①에는 記載되어 있다.
4390餘年 前 神人이 太白山 檀木 밑에 天符三印을 갖고 사람과 萬物을 化育하시며 道를 펴시고 가르침을 세워 都邑을 建設하여 開國하니 國號를 朝鮮이라 했다.(朝鮮의 뜻은 朝日鮮明에서 由來한다)
五事(穀食⋅生命⋅疾病⋅刑罰⋅善惡)을 主管하시며 人間의 366事를 다스리시고 男女⋅父子⋅君臣⋅飮食⋅衣服⋅居處⋅編髮과 蓋首(女子가 婚禮 때 쓰는 帽子)의 制度를 制定하시었다(神人이 降生해서부터 建國하기까지 124年을 神市時代②라 稱한다)
匪西岬神后는 紡織하는 技術을 처음으로 勸獎 했으며, 太子 扶婁는 陶瓷器 굽는 일과 鑄物만드는 일을 맡아 그릇이나 道具를 만들었으며, 아들 扶蘇는 病⋅藥을 治하고 아들 扶虞는 狩獵과 驅獸(구수)의 일을 맡았으며 아들 扶餘는 禮俗(예속)을 管掌(관장)하였고, 元輔(領議政의 官稱)彰虞(창우)는 山川과 土地를 保護 管理하는 일을 맡았는데 後世人들은 彰虞를 仙王이라고 불렀다. [普通 峻嶺通路에 祠堂을 짓고 聚石을 한 다음 官民이 通過 할 때 반듯이 致誠을 드리는 風俗이 있는 바, 이를 仙王堂 이라 한다. 이는 彰虞 卽 仙王을 기리는 뜻이다.]
또 史官인 神誌(신지)는 書契(서글)을 撰述하는 일을 맡았으며, 農官인 高矢는 밭農事를 管掌하다[한족 풍속에 들이나 밭에서 음식을 먹을 때 먼저 밥 한술을 떠서 던지면서 高矢氏「고시레⋅고수레」 하였고 부르는데 이는 農官 高矢氏를 잊지 않는 때문인 것이다.]
또 藥官인 提持는 歌舞를 管掌하였고 君長(官名)이 余守己와 上長(官名)인 裶天生은 各各 民産品을 掌握하였으며 肅愼氏(숙신씨)는 弓矢를 만들고 沃沮氏는 斧矛(부모)를 만들고 檀君의 세 아들에게 命하여 穴口(江華府에 그 城이 있는데 俗稱 「三郞城」이라 한다)에 築城을 하게 하였다. 또 摩尼山(만리산⋅마니산)에 石壇을 쌓게 하여 하늘에 祭祀지내고 하늘과 祖上의 恩惠에 報答하는 本을 보여 주도록 하셨다.
在位 93年되는 庚子 3월에 檀君께서는 阿斯達(九月山)에 드시어 神으로 化하시어 御天하시니 때의 御世가 大略 216년이셨다.(九月山에는 御天石臺가 지금도 뚜렷이 남아 있다).
그 後 子孫들이 分居하여 繁盛하였는데 扶餘는 다시 갈라져서 東扶餘⋅北扶餘⋅卒本扶餘 ⋅徐苑扶餘⋅南扶餘가 되고 그 支派가 濊(예)⋅貊(맥)⋅沃沮(옥저)⋅肅愼(숙신)이 되었다. 徐苑扶餘는 그 後에 新羅(BC 57~AD 935), 高麗(918~1392), 朝鮮(1392~1897), 韓 (1897~1910)으로 이어진다.
卒本扶餘는 그 後 高句麗(BC 37~ AD 669), 渤海(699~926), 女眞(東西女眞이 있다)이다. 東女眞의 後孫은 金(125~1234), 滿淸(1616~1911)이며 南扶餘의 後裔는 百濟(BC 18~ AD 660)이고 箕氏朝鮮의 後孫은 馬韓이며 濊의 後孫은 徐濊⋅東濊⋅不耐濊이고, 徐濊의 後孫은 徐國이라 한다.
徐國은 濊의 初期에 殷나라 小乙(BC 1349~1339)王이 衰弱해진 때를 맞이하여 南쪽 徐州(安徽省 泗縣의 北쪽에 故域이 있다)地方에 雄據하였는데 疆城(강성)을 널리 開拓한 뒤에 國號를 마침 徐國이라 하였다. 마침 周나라 穆王(BC 1023~ 982) 때에는 徐國이 周나라 軍師를 黃河(舊黃河를 뜻 한다 지금의 安徽省 北端을 흐른다)의 沿岸에서 크게 破하니 周나라 穆王은 降伏하여 周나라와 徐나라 兩國間의 國境을 定하였는데 西쪽은 周나라가 東쪽은 徐國이 차지하였다.
徐國의 偃王(언왕)(BC 10世紀頃)은 仁德으로 나라를 다스리니 來朝하여 朝貢하는 나라가 50餘國에 이르렀다.
周나라가 末葉에는 楚나라 靈王(BC 572~544)과 申 (春秋때의 나라 稱號 姜城이며 故城은 河南省 南陽縣의 北方)에서 會盟하였고 後에 瑯瑯(山東省 諸城縣의 東南)으로 都邑을 옮겼다가 楚나라에 의하여 滅亡하였다. 徐國의 亨國年間이 約 1000年間이나 繼續되었다.
舊來에 傳하는 바에 依하면, 徐國은 浙江省(절강성) 紹興郡(소흥군)을 中心으로 그 周圍에 三千里의 땅을 統治하고 있었다고 하며 또 崔致遠(858~?)이 唐나라 宰相에게 보낸 回答書에는 百濟國이 中國의 江蘇省과 浙江省 一帶를 占領 했다는 말이 있고 또 兩省의 土音은 우리나라 말과 같이 쓰는 사람이 많으며 구 遺音이 아직까지 存在하는 理由를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예국의 후예는 北濊(북예)⋅胡貊(호맥)⋅梁貊(양맥)⋅句麗貊(구려맥)⋅小水貊(소수맥)⋅濊貊(예맥)⋅牛首貊(우수맥)이며 그 中에서 最强族은 北貊(북맥)⋅鮮卑(선비)⋅契丹(글란)⋅遼(요)이다. 沃沮(옥저)의 後裔(후예)는 東沃沮⋅北沃沮이며 肅愼(숙신)의 後裔는 勿吉(물길)⋅靺鞨(말갈)⋅女眞(여진)⋅黑哲(흑철)이라한다.
[註 1] 金敎獻91868~1923)이 지은 『神壇實記』나 이외 별본을 지칭 한 듯하다.
[註 2] 『124年의 神市時代』 이는 大倧敎의 敎理에서 緣由된 것이다.
[原文]
倍達民族之起源.
今先擧倍達族(卽韓族檀木謂之倍達也)之起源. 與檀君之開化. 及兩民族之歷來關聯. 上古瀛海(濟州)以北. 小海(黑龍江)以南. 九夷(夷大弓東人善弓)分居. (伏羲虞舜幷生於此. 載神檀記)四千三百九十年前. 有神人降于太白山檀木下. 持天符三印. 化育人物. 宣道設敎. 建都開國曰朝鮮. (朝日鮮明之意)主五事.(穀, 命, 病, 刑, 善惡)治人間三百六十六事. 以定男女. 父子, 君臣, 飮食, 衣服, 居處, 編髮蓋首之制. (自神人降生至建國之前. 百二十四年. 謂之神市時代). 匪西岬神后肇勤紡織. 太子扶婁陶冶備器. 子扶蘇嘗藥治病. 子扶虞掌獵驅獸. 子扶餘掌禮厚俗. 元輔彭虞奠山川土地. 後世稱彭虞仙王. (凡峻嶺通路. 皆建堂聚石. 官民過必致敬. 俗稱仙王堂)史官神誌撰書契. 農官高矢治田. (韓俗鎑畝. 必先呼高矢氏. 不忘其本)樂官提持協和歌舞. 君子余守己. 上長裶天生各製民産. 肅愼氏作弓矢. 沃沮氏造斧矛. 命三子築城於穴口. (江華府, 俗稱三郞城)又築石壇於摩尼山. (江華府)以垂祭天報本之義. 在位九十三年之歲庚子三月. 入阿斯達山. (九月山)化神御天. 在世二百十六年. (九月山御天石臺. 今尙巍然)其後子孫分居繁殖. 曰扶餘. 再分曰東扶餘, 北扶餘, 卒本扶餘, 徐菀扶餘, 南扶餘. 其支派曰濊, 貊, 沃沮, 肅愼. 徐菀扶餘之後曰新羅. 曰高麗, 曰朝鮮,韓.
卒本扶餘之後曰高句麗, 曰渤海, 曰女眞. (東海)東女眞之後曰金, 曰滿淸, 南扶餘之後曰百濟. 箕氏朝鮮之後曰馬韓. 濊之後曰徐濊. 東濊, 不耐濊. 徐濊之後曰徐國. 徐偃干在殷小乙之衰也. 南據徐州. 廣拓彊宇. 國號曰徐. 及周穆王侵伐徐屬. 徐大破周師於河上. 穆王請和分界. 西屬於周. 東屬於徐. 偃王有仁德之化. 來朝之國有五十餘. 周末與楚靈王會盟于申. 後移都瑯瑯. 爲楚所敗. 徐之立國千餘年. 舊傳徐國有環紹興三千里地. 又崔致遠答唐朝宰相書. 有百濟占領江浙之事. 今江浙土音. 與韓語同者多. 其遺音未知尙存也. 貊國之後曰北貊, 胡貊, 梁貊 句麗貊 小水貊., 濊貊, 牛首貊⋅其中北貊最强. 曰鮮卑. 曰契丹. 曰遼. 沃沮之後曰東沃沮, 北沃沮, 肅愼之後曰勿吉, 靺鞨, 曰女眞, 黑哲.
出典 : 感時漫語 (省齋 李始榮 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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