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甲)질’도 적당히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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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13-05-28 12:37 조회2,575회 댓글0건본문
‘갑(甲)질’도 적당히 해야
요즘 들어 ‘갑(甲)의 횡포’, ‘을(乙)의 설움’이라는 말이 사회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오래전부터 있었던 말이지만, 그동안은 을이 마땅히 하소연할 길이 없었던 탓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갑’과 ‘을’의 관계가 무조건 일방적인 것은 아니다. ‘갑’의 프리미엄도 어느 정도는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문제는 ‘갑의 횡포’가 도를 넘어섰다는 것이다. 업무 협의를 하는 상대에 대한 무례함은 기본이고, 인격 모독적인 폭언, 무리한 요구까지도 서슴없이 해 댄다. 기업의 경우, 대리점이야 어찌 되든 무조건 상품을 밀어내기도 한다. 오죽하면 ‘갑(甲)질’이라는 말까지 생겼을까.
‘갑질’은 결국 인격의 문제이다. ‘갑질’에 익숙한 자가 그 배우자, 가족에게는 어떤 모습을 보일까? 유대인 랍비 조셉 텔루슈킨(Joseph Telushkin)은 말했다.
“배우자를 선택할 때 상대가 식당 종업원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살펴보라. 그것이 나중에 나를 대하는 태도일 것이다.”
도연명이 어느 날 자신이 데리고 있던 종을 아들이 있는 집으로 보내면서 당부한 말이, “이 자도 남의 소중한 자식이니, 함부로 대하지 말고 잘 대해주거라.” 철저한 신분 사회에서 종에게까지 이런 배려를 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갑질’의 원인은 대체로 ‘갑’으로서의 지위가 오래도록 지속될 것으로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음(陰)이 양(陽)이 되고 양이 음이 되듯이 만물은 늘 순환한다는 것이 이치이다. 오행(五行)의 상극(相克)은 서로서로 물려 있다. 금(金)이 목(木)을 이기지만, 목이 낳은 화(火)가 또 그 금을 이긴다. 당장은 ‘갑’일 수 있어도, 그 ‘을’이 자신의 ‘갑’의 ‘갑’일 수도 있는 것이다. 사마귀가 매미를 잡아먹으려고 노리고 있을 때, 그 사마귀의 뒤에는 참새가 노리고 있고, 또 그 참새의 뒤에는 사냥꾼이 노리고 있다는 고사가 있지 않은가?
‘갑’은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할 것이고, 마치 정글의 사자나 된 듯이 그 강함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 강한 자는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부드러운 사람이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비굴한 사람은 강자가 아니라 소인배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이른바 ‘갑(甲)질’을 하는 부류는 늘 중간치들이다. 권력이든 지위든 정점에 있는 사람은 차라리 여유가 있어서 관대한 반면, 그 아래 있는 사람들이 늘 각박하게 굴고, 권세를 부리려고 한다. 완장을 차고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것이다.
옛날 중국에 한 마부가 있었다. 그는 재상인 안영(晏嬰)의 전속 마부로서, 늘 기세가 등등하였다. 어느 날 그의 아내가 별안간 이혼을 요구했다. 까닭을 묻자 그의 아내는 말했다.
“재상께서는 6척도 안 되는 작은 몸으로 존귀한 지위에 올라, 온 천하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십니다. 그런데도 늘 겸손하십니다. 그에 비해 당신은 8척 거구의 몸으로 마부 노릇이나 하면서, 어찌 그리 오만한 것입니까?”
그날 이후로 마부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다고 한다.
최근에 마침 몇몇 경영자와 기업의 어처구니없는 행태 때문에 이른바 ‘갑질’이 사회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정부와 정치권에서도 이를 근절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그런 ‘갑질’이 어디 기업에서만 있는 것이던가? 예나 지금이나 등잔 밑은 늘 어두운 법이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그중에는 어버이날도 있다. ‘을’도 자신의 가정에서는 자랑스러운 어버이들이다. ‘갑’의 지위에 있는 자들이 자신의 어버이를 위해주는 마음으로, 다른 어버이의 눈물도 닦아 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권경열 :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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