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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난 논쟁-문온공 시호와 처부에 대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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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3-05-22 11:29 조회3,08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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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서 제가 다시 수정요청을 하였습니다.

No. 10672 [수정요청] 10415 김제민 처부2 자료수정
이름 : 김영환 등록일 : 2013-05-10 조회수 : 99
10415번 김제민의 처부2에 대하여...
 
원래 대로 처부1 홍의원 처부2=윤진 이 맞습니다.
 
10414번 김제민의 시호에대하여..
 
김제민(개명 김구용)의 시호는 文溫이 맞습니다.
 
확실한 근거도 없이 주장한것에 대하여 확인하지 않고 수정하였습니다.
 
원래대로 회복하여 주십시요
 
근거자료
 
김제민(개명 김구용)은 처가 두명이다.
 
초배는 해평윤씨 윤진의 딸- 자녀 없음
 
계배는 남양홍씨 홍의원의 딸 자녀 삼남(명선, 명리, 명윤)
 
처부2=윤진이라는 자료
 
증거;1. 안동김씨 문온공파보(1992년) 배;해평군부인 윤씨 부 찬성사 珍 배; 남양군부인 홍씨 부 예의정랑 義元.
 
윤지표묘지명- 윤지표의 아들 윤진- 윤진의 사위 김구용
 
윤지표묘지명(尹之彪墓地銘)...전략 해평군(海平君 : 珎)의 아들 창(彰)은 지금 전리좌랑(典理佐郞)이고, 다음은 신(莘)으로 지금 덕창부사인(德昌府舍人)이고, 다음은 수(須)로 지금 춘추검열(春秋檢閱)이다. 장녀는 판사(判事) 김구용(金九容)에게, ..하략
 
김구용(김제민)의 시호자료
 
근거; 문헌비고 권지 240 홍문관 찬집 직관고 27 시호 2 역대명신 시호 1 문온공 삼사좌윤 김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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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반론입니다.

No. 10673 [수정요청] 김제민의 처부 해평윤씨에 대해
이름 : 이정환 등록일 : 2013-05-10 조회수 : 120
김제민의 문집 惕若齋學吟集에서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M&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M&seojiId=kc_mm_a026&gunchaId=as002&muncheId=01&finId=001&NodeId=&setid=2846634&Pos=0&TotalCount=1&searchUrl=ok
 
윤진에 대한 언급이 전혀없습니다.
 
특히, 이 내용은 김제민의 아들 김명리가 지었다고 []에 들어있는데, 아버지의 부인이 2분이었는데 한분은 빼고 지었다는건 더욱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또한 김명리이라는 분은 지식이 없는 분도 아니였던 것 같습니다.
 
http://andongkimc.kr/kimmyunglee.htm
 
시호 또한 김제민의 외조부와 외손이 똑같다는게 신기합니다. 현재 문집에서 김제민의 시호는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김제민은 1384년에 졸하였고, 惕若齋學吟集은 1401년에 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여 전해집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cid=1615&docId=562976&mobile&categoryId=1615
 
만약 시호가 있다면, 위 내용으로 볼때 고려시대에 살고 고려시대에 죽은사람이 사후 16년이상의 시간이 흐른 조선조에 이르러 시호가 없었던 분이 갑자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시호를 받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도 시호의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8760
 
후대에 바른 내용을 전해주는 것도 좋지만, 납득이 안 되는 자료가 있으면 그에 대한 반론을 적어 충분히 납득 할 만한 각주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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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재 반론입니다.

No. 10688 [수정요청] 김제민 처부2, 시호에 대하여 명확한 근거를 제시합니다.
이름 : 김영환 등록일 : 2013-05-13 조회수 : 65
김제민(개명 김구용)의 처부에 대한 자료 감사합니다.
 
김제민의 처에 대한 기록은 안동김씨족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초배. 윤진의 딸 계배 홍의원의 딸
 
족보도 후대에 만든 것(안동김씨족보 1582년 경진보)이 틀릴수도 있다고 주장하실 수 있습니다만,
 
양쪽(안동김씨, 해평윤씨)에 기록이 모두 있다면 믿어야겠지요.
 
그것도 믿을 수 없다면 할 수 없지만, 또 다른 자료가 있습니다.
 
당시에 쓴 윤진의 아버지 윤지표묘지명(1382년 목은 이색이 지었음-목은집 확인, 한국금석문종합영상시스템에서 확인하시면 됩니다.)에 윤지표의 아들은 윤진이며 윤진의 사위는 김구용이라고 분명히 나옵니다.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1668
 
김제민의 시호에 대하여..
 
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김제민의 아들인 김명리가 편찬한 척약재학음집에 시호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만, 홍문관에서 지은 문헌비고에 분명히 문온공 삼사좌윤 김구용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문헌비고는 개인이 지은 것이 아니고 홍문관이라는 국가기관에서 지은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언제 시호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슴니다만, 홍문관기록을 자료가 없이 썼으리라도는 믿을 수 없습니다.
 
님의 말씀 대로 후대에 바로 전해지려면 그 명확한 자료가 있어야 합니다.
 
김제민의 처부2에 대해서도 각주에 근거자료(윤지표묘지명-이색 찬, 안동김씨족보)를 명기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시호에 대해서도 출처-문헌비고 권지 240 홍문관 찬집 직관고 27 시호 2 역대명신 시호 1 문온공-를 밝히는 것이 후대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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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이정한 님)의 반론입니다.

No. 10692 [수정요청] 저의 생각
이름 : 이정환 등록일 : 2013-05-13 조회수 : 77
김제민의 친 아들이 아버지의 부인이 한 분이라고 말했는데, 후대에 지어진 자료에서 아무리 부인이 2사람이다 3사람이다해도 이를 믿어야 할지는 생각하는 사람의 견해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이 내용은 제 3자의 입장이거나 역사의 승리자가 쓴 것도 아닌 친 아들이 썼으며, 친 아들이 아버지의 부인에 대한 민감한 부분을 신중을 가하지 않고 집필을 하지도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 내용은 후대의 내용이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고 무조건 서비스를 하는 것을 떠나 본 내용은 아들이 친 아버지에 대한 설명이 후대의 내용과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서로 상반된 이유에 대해 명확히 설명하지 않은 채 서비스 한다면, 모든 역사는 후대에 지어진 것으로 집필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임금이 시호를 아무런 의미도 없이 내렸을 것으로 생각 되지는 않습니다.
 
조선시대에 많은 분들이 조상의 시호를 받고자 많은 글들을 올렸는데, 그 글들 중 통과가 되어 시호를 받은 분들은 극 소수에 불가합니다.
 
그래서 만약 받았다면, 어떠한 근거가 오늘날 전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앞서 말했지만, 김제민의 시호는 외조부와 외손이 같다는 것이 참으로 특이합니다.
 
시호를 받았다면, 고려시대에 살고 고려시대에 죽은 분이 뜬금없이 조선시대에 이르러 시호를 받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시호라는 건 집안으로써는 아주 명예로운 것인데, 제가 찾아 본 조선 초기 문집이나 문헌에서 김제민의 시호가 문온이라는 내용을 찾지를 못 했습니다.
 
중요한 내용일수록 그냥 전해지는 문헌이다, 자료다라고 말하기보다, 충분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를 든다면, 세종대왕이 역대 왕 중에서 최고의 왕이다. 이유는? 이유가 없다면 보는 이로 하여금 납득이 갈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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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반론입니다.

No. 10726 [수정요청] 민원담당자께
이름 : 김영환 등록일 : 2013-05-16 조회수 : 32
저의 생각입니다.
 
김제민의 처에 대해서 아들인 김명리가 편집한 문집에 전실어머니를 기록하지 않았으니 없는 것이다라는 주장이신데, 답변에서 말한데로 족보-물론 저도 족복를 100% 신빙하지 않습니다.-의 양쪽(안동김씨, 해평윤씨)기록이 정확합니다. 그보다도 더 신빙성이 있는 자료가 당시의 기록입니다. 김구용의 처부인 윤진의 아버지 윤지표의 묘지명을 목은 이색이 썼습니다. 목은과 김구용은 공민왕 -우왕대에 성리학을 수창한 유명한 성리학자이며, 이색이 김구용을 나의 벗(吾友)라고 칭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입니다. 그런 목은이 김구용의 없는 처를 써 넣었겠습니까? 목은집도 여러번 개간했으니 틀릴 수 있다고 한다면 할 수 없습니다만, 동문선에도 이글이 실려 있습니다. 김구용의 아들인 김명리가 어머니가 두분인 것을 안 썼느냐는 것은 알 수 없습미다만, 님과 같이 추정한다면, 김명리는 전실부인인 윤씨 소생이 아니고 (윤씨는 소생이 없이 혼인후 얼마 안되어 사망해서 후취부인 홍씨를 맞이했음)후취부인 홍씨소생입니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 어머니를 표현할 때 내 생모만 썼으리라 짐작됩니다. 이도 짐작일뿐 당사자(아들 김명리)가 아니니 모르는 것입니다. 안동김씨문중에서는 수백년동안 김구용과 그의 초배 해평윤씨, 후배 남양홍씨를 단묘에서 시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시제축문이 옛날 족보부터 내려오는데 여기에도 초배와 후배를 기록하였습니다.
 
시호가 외할아버지(급암 민사평)과 같으니 이상하다는 논리도 맞지 않습니다.
 
김제민의 고조(김방경)은 왕(충렬왕)과 같은 시호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처부와 시호에 대한 자료는 맨처음 올린 자료(허흥식의 자료)에 의거 하고 있습니다.
 
최조의 자료를 수정할 때는 이를 뛰어 넘는 자료가 있어야 하며 그 근거를 각주에 표시하여야 한다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허흥식의 자료도 물론 틀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김제민의 자료는 등과자료에서 뽑은 것이 틀림 없는 것이 동방급제한 33명의 자료가 자세히 있습니다. 이는 등과목록이나 이에 준하는 자료를 보기 않고는 쓸 수 없는 것입니다. 김제민의 처부2(해평윤씨)도 이런 자료없이 는 도저히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아들이 쓴 아버지, 어머니의 기록중 전실어머니의 기록이 없으니 전실 어머니는 없다라는 논리는 너무 비약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너무 논란이 되는 것 같아 이만 하겠습니다.
 
아울러 민원담당하시는 분은 여러가지 자료를 종합하여 확실하게 처리하여 주시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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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반론입니다.

No. 10727 [수정요청] 마지막으로 저도 글을 올립니다.
이름 : 이정환 등록일 : 2013-05-17 조회수 : 59
고려사열전과 고려 때 지어진 묘지명을 보면 부인 혹은 자녀가 한쪽에는 적혀있고, 한쪽에는 안 적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부분에서 자주 나타나는 특징이 바로 첩, 서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 예를들면, 1290년 과거에 합격한 김승인은 고려사에서 보면, 김구의 서자로 과거에 합격하여 대사성에 올랐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고려묘지명집성에 김구묘지명에서는 김승인에 대한 내용은 빠져있습니다.
 
따라서 후처라고 주장하는 부인이 후처가 아닌 첩이였을 가능성도 열어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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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막나가는 것 아닙니까?  참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처리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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