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탄신800주년기념 학술대회 기조강연-민현구-고대명예교수-3-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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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3-04-29 15:58 조회2,471회 댓글0건본문
4. 高麗으 駙馬國化와 難國 타개의 向方
(1)三別抄 抗爭의 진압과 高麗 . 蒙古 관계의 안정
三別抄 봉기 직후부터 고려 조정은 큰 혼란에 빠졌다. 많은 신료들의 가족이 붙잡혀 갔고, 삼별초의 활약과 위세가 컸기 때문이다. 즉시 金方慶을 逆賊追討使로 삼아 대치케 하는 동시에 세자를 몽고에 보내 사태의 진전 사항을 보고하게 했다. 얼마 뒤에 金方慶을 전라도추토사로 삼아 몽고 元帥 阿海와 함께 천명의 군사를 동원해 토벌케 했으나 珍島에서의 전투에서 阿海가 겁을 먹고 나서지 않아 김방경이 포위를 당해 위기에 빠지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삼별초는 제주를 함락시키고 남해안 각처를 공략하면서 기세를떨쳤다.
이 무렵 쿠빌라이는 일본 招諭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미 수차 使臣을 보냈다가 실패하자, 이번에는 임연이 타도된 고려로부터 造船과 徵兵의 도움을 받아 무력으로 정벌할 생각을 갖고, 전에 임연의 폐립사건 때 고려의 요청으로 진입한 몽고군 4천명과 증파된 2천명을 합친 6천명을 새로 설치된 屯田經略司에 소속시켜 필요할 때 곧 일본 원정에 나설 수 있게 하면서, 삼별초 토벌에는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무력 정벌에 앞서 최종적으로 다시 사신을 일본에 보내 타이르려 하였을 때, 삼별초가 서남해안의 制海權을 장악하여 왕래가 불가능하게 되었음을 알고 비로소 삼별초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1271년 5월 김방경과 蒙古元帥 忻都, 洪茶丘가 대군을 이끌고 진도를 공격해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삼별초가 왕으로 추도했던 承化侯 溫이 살해되었고, 裵仲孫을 행방불명이 되었으며, 남녀 1만 명 이상이 포로로 붙잡혔다. 그러나 삼별초의 남은 군사들은 金通精의 지휘아래 제주도로 갔다. 삼별초는 치명적 타격을 입었으나, 다시 제주를 근거지로 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진도에서 敗走한 삼별초는 약 6개월 뒤 ‘여러 섬과 浦口를 橫行한다’는 보고가 올라올 정도로 제주를 중심으로 재정비되었다. 이어서 삼별초가 漕船을 포획했다든지, 郡縣을 焚掠했다든지 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1272년 11월에는 合浦에 쳐들어가 戰艦 20척을 불사르고 몽고 烽卒 4명을 살해하고 달아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元은 제주도의 삼별초를 토벌할 군대를 뽑으라는 명령을 내렸고, 1273년 2월에는 지난 번 珍島에서 勝戰으로 中書侍郞平章事에 오른 金方慶을 中軍行營兵馬元帥로 삼아 몽고 원수 흔도와 함께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이 해 4월에 선박 160척과 水陸軍 1만여 명이 제주를 건너가 전투를 벌여 삼별초의 항쟁을 완전히 종식시켰다.
삼별초의 봉기가 진압되어 元帥 金方慶이 凱旋하자 왕은 특별히 포상을 내리고 侍中으로 임명했고, 그는 쿠빌라이의 招致를 받아 몽고로 가서 환대를 받기도 했다. 앞서 훑어본 대로 林衍의 廢立 사건이후 무신정권의 붕괴에 이르기까지 약 8개월간 추이는 긴박했지만, 정작 무신정권의 붕괴 직후 약 1년 6개월 동안 고려와 몽고의 관계는 매우 불편했다. 쿠빌라이는 무신정권 붕괴로 고려가 완전히 손아귀에 들어와 그의 일본 원정이나 宋 정벌에 십분 협력을 받게 되리라 기대했지만, 고려는 피폐된 국력, 몽고 진주군의 작폐와 부담, 혼란기를 틈탄 반역자들의 作奸 등으로 더할 나위 없는 혼란을 당 하는데다가 삼별초의 봉기로 큰 부담을 지는 형편이어서 고통과 불만이 컸다. 이 기간의 역사 기록 가운데에는 고려국왕의 진정과 쿠빌라이의 질책이 왕복되는 대목이 많이 나타나는데, 이러한 냉랭한 양국관계는 1272년 6월 高麗 世子 諶이 주요 관료 20인을 이끌고 새삼스럽게 인질로 몽고에 入朝하는 사태로 발전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김방경의 진도 및 제주에서의 삼별초 진압은 고려와 몽고의 관계를 호전시키고 쿠빌라이의 태도를 완화시키는 데 큰 작용을 했다.
(2) 駙馬國으로의 전환과 日本遠征에의 참가
1274년 5월 고려 世子(뒤에 忠烈王)과 쿠빌라이의 딸 忽都魯揭里迷失의 결혼식이 燕京에서 거행되었다. 당초 이 혼인은 1269년 2월 元宗이 燕京에서 쿠빌라이를 만나 請兵을 요구할 때 함께 요청했고, 이 청혼의 문제는 별도로 거론될 중대한 사안이라는 응답을 받자 이듬해 1월 사신을 통해 請婚表를 올렸던 것인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1271년 10월 쿠빌라이의 혼인 승낙의 소식이 전해졌고, 다시 그로부터 2년 7개월 뒤에 혼례가 이루어졌다. 공식적으로 고려가 처음 요청한때부터 따지면 5년 3개월 만에 이 혼인이 이루어진 셈이다.
그동안 복잡한 상황을 겪으면서 三別抄의 抗爭이 珍島에서의 토벌이 일단락된 뒤에 혼인이 허락되었고, 제주의 삼별초를 완전히 진압한 다음, 뒤에서 서술한 제1차 일본원정을 앞두고 이 결혼이 마무리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 혼인이 물론 政略結婚이었다. 혼례를 올릴 때 세자는 이미 정식 부인과 아들이 있는 38세의 장년이요, 몽고 공주는 15세의 처녀였다는 점이 그것을 얘기해 준다. 왕실 간 혼인관계를 통해 고려를 달래고 견제하려는 몽고의 입장과 몽고의 압력을 누그러뜨리고, 그 권위를 빌어 대내적 권위를 높이려는 고려의 입장이 함께 작용했던 것디다. 결혼이 이루어진 다음 달에 元宗이 病死하고 세자가 귀국해 즉위함으로써 忠烈王代가 개막되었고, 이제 고려는 몽고 황제의 사위가 다스리는 나라, 곧 駙馬國이 되었다. 駙馬國化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닌 채 고려가 새 출발하는 것을 뜻하며, 이런 큰 변화 가운데에 金方慶이 首相으로서 서 있었다.
1274년 10월, 충렬왕이 즉위한 후 2개월이 지난 시점에 侍中인 김방경을 都督使로 하는 고려군 8천명이 都元帥 忽敦과 右副元帥 洪茶丘 등이 지휘하는 蒙漢軍 2만 5천명과 연합하여 戰艦 9백 여 척을 이끌고, 合浦를 출발하는 일본원정의 길에 나섰다. 몽고 제국의 세계정복을 향한 새로운 출정이요, 쿠빌라이가 큰 집념을 갖고 8년간 끝없이 고려를 괴롭히면서 추진해 온 큰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이 제1차 일본원정은 널리 알려진 대로 태풍이라는 뜻밖의 변수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군을 중심으로 초반에는 상당한 戰果를 올렸으나 총체적으로는 막대한 인명과 선박의 손실을 가져온 커다란 敗退였다.
쿠빌라이는 담담한 태도를 보이면서 재차 일본원정을 벌이려 했다. 고려가 1275년 1월 戰場에서 돌아온 지 오래지 않은 김방경을 사신으로 파견해 고려의 피해와 어려움, 특히 再次 일본원정을 벌일 경우, 그에 부응할 국력이 없음을 호소하자 쿠빌라이는 그것을 경청하면서 김방경을 파격적으로 우대했다. 고려로서는 일단 일본원정이라는 큰 짐을 벗었으나, 그것이 재차 시도될 위험성이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새롭게 駙馬國으로 출발한 정치 현실을 고려의 국익에 알맞게 수용하고 몽고와의 관계를 원활하게 해 안정된 체제를 갖추어야 했고, 그것을 떠맡은 것이 충렬왕과 김방경이었다. 당시 고려는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데다가 일본원정으로 人的 物的 손실이 컸고, 상당한 몽고군이 주둔하여 그 군량과 馬料 공급의 부담이 컸다. 몽고의 요구로 매를 기르는 鷹彷이 설치되어 농촌을 피폐케 했다. 達魯花赤을 비롯해 洪茶丘 등 일본원정과 관련된 몽고인 유력자들이 체류하면서 고려 정치를 견제하고 파탄시키려 하고 있었다.
충렬왕이 즉위한 이듬해 가을에 몽고는 사신을 보내 고려가 종전에 太子, 聖旨 등 왕실에서 몽고 朝廷에서와 格이 같은 用語를 사용해 온 점을 문제 삼는 동시에 고려 왕실에서의 同姓혼인을 비판하며 몽고와의 通婚을 요청하고, 美女의 貢納, 즉 貢女도 강요했다. 이에 따라서 고려는 즉시 왕실 용어 뿐 아니라 모든 官制를 부마국의 체제에 맞추어 格下시키는 개혁을 단행했고, 貢女라는 새로운 부담을 지기 시작했다. 그러한 가운데 새로이 시집와서 왕비의 자리를 차지한 齊國大長公主는 곧 王世子 謜(훗날 忠宣王)을 낳음으로써 왕실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충렬왕대 초기의 소강상태는 1276년 12월과 이듬해 12월의 두 번에 걸친 김방경 誣告사건으로 크게 흔들렸다. 제1차의 것은 達魯花赤 관사에 온 익명의 투서로 제기되었는데, 齊國大長公主 때문에 왕비 자리에서 물러난 貞和公主가 齊國大長公主를 저주하였고, 왕실의 齊安公 淑과 김방경 등 43명이 반역을 꾀하였다는 내용이었다. 왕은 당사자들을 일단 가두고 조사하는 한편, 원로 재상 柳璥이 齊國大長公主에게 泣訴해 이 사건이 誣告임을 밝혀 관련자들을 석방하였다. 뒤이어 몽고에 사신을 보내어 경과를 보고함으로써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제2차의 것은 前大將軍 韋得儒 中郞將 盧進義 등이 김방경이 반역을 음모한다고 고소한 것으로, 김방경의 전 부하였던 그들이 김방경이 그 아들과 사위를 비롯한 400여명과 더불어 왕, 공주 및 達魯花赤을 제거하고 江華로 들어가 반역하기로 모의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서도 왕이 고려 측 高官과 몽고 측 유력자들이 함께 조사 심문케 하여 무고임을 밝히고 연루자들을 석방시킴으로써 일단 마무리 지었다. 그런데, 약 1개월 뒤에 홍다구가 이 소식을 듣고 몽고 中書省에 문제 제기를 하여, 고려로 나온 홍다구와 흔도가 王도 臨席한 가운데 김방경과 아들 金忻을 다시 鞠問하기에 이르렀다.
1월과 2월에 각기 奉恩寺에서 이루어진 두 차례 국문은 김방경에게 自服을 강요하면서 더할 나위 없이 참혹한 고문을 가하는 것이었다. 66세의 老宰相을 한 겨울에 알몸으로 쇠줄을 머리에 두르게 하고 못을 박을 듯이 위협하면서 머리를 내리치게 해서 몸에 온전한 살갗이 없고 여러 번 혼절하였다가 깨어나는 지경에 이르게 했으나 끝내 자복을 받아내지 못했다. 왕은 김방경이 심한 고초를 받는 것이 안타까워 몽고 황제의 人德을 믿고 우선 거짓이라도 자복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그는 자기 한 몸을 아끼기 위해 거짓 자백으로 나라를 저버릴 수 없다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김방경은 홍다구에게 ‘죽이려거든 죽이시오, 나는 不義에 굴하지 않겠소(欲殺便殺 我不以不義屈)’라고 끝까지 결연한 태도를 보였다. 김방경 父子를 섬에 유배시키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1278년 4월 忠烈王은 공주와 세자를 데리고 몽고에 入朝하였다. 왕은 결혼 후 첫 번째 입조였고, 공주도 갓난 아들을 데리고 처음 친정에 가는 나들이었다. 왕은 ‘事親之禮’를 들어 입조를 신청했지만, 김방경 사건의 마무리와 일본원정 등 여러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다. 왕복 5개월이 걸린 이번 입조는 고려에게 예상 밖의 큰 성과를 안겨주었다. 쿠빌라이로서는 3년전 宋을 사실상 무너뜨려, 온 중국을 통일시킨 자긍심과 여유를 지닐 수 있었고, 딸과 외손자를 만나 인간적으로 육친의 정을 느꼈을 터이고, 장차 실행에 옮길 일본원정에 고려의 전폭적 협조를 얻고 싶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번에 김방경의 무혐의를 확인시키고 홍다구를 다시 고려에 나가지 못하게 하면서, 고려에 주둔하는 達魯花赤, 元帥 및 주둔군 일체를 철수시켰다. 고려의 부담을 경감시키고, 부마국으로서의 자율권을 신장시켜 주었던 것이다.
죄인의 몸으로 왕을 좇아 몽고에 갔던 金方慶은 사명을 받아 돌아와 즉시 首相인 中贊에 복직되었다. 왕은 여세를 몰아 김방경과 의논하여 홍다구의 협조자로서 고려 정치에서 중요하게 활동해 온 재상 급의 李汾禧와 그 동생 李槢을 제거해 죽이고, 그 밖의 홍다구 黨與 20명을 海道에 유배시켰다. 이 일로 왕은 귀국한 지 4개월 만에 쿠빌라이의 호출을 받고 다시 몽고에 입조해 추궁을 당하는 곤란을 당하고 돌아왔지만, 그 후 홍다구가 고려내 세력과 연계하여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고려의 국가적 존립을 위협할 여지는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충렬왕은 처음 입조했을 때 일본원정을 위해 선박과 양식을 마련할 용의가 있음을 쿠빌라이에게 밝혔다. 이것은 제1차 원정이 실패한 직후 김방경을 사신으로 파견해 호소한 내용과 상반되는 것으로서, 그 동안 고려의 형편이 썩 좋아지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이번에 적극적 태도를 보인 것은 쿠빌라이의 제2차 정벌의지가 확고해 그것이 이루어져 어차피 부담을 지게 될 처지라면, 先手를 쳐서 스스로 나서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것은 입조 중 좋은 분위기를 조성해 큰 성과를 거두는 데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었다. 그로부터 약 2년 뒤에 왕은 쿠빌라이의 요청으로 입조하여 일본원정과 관련해 참가하는 고려 군관에게 몽고군과 같은 지위를 부여하고, 자신이 合浦에 가서 軍馬를 사열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 등 몇 가지 건의를 하고 돌아왔다.
1281년 5월 管領高麗軍都元帥 김방경이 正軍 1만여명, 梢工 . 水手 1만 5천명, 병선 9백척의 고려군을 이끌고, 흔도와 홍다구는 4만 명의 몽고군을 이끌면서 함께 합포항을 출발해 제 2차 일본원정에 나셨다. 앞서 4월 중순에는 충렬왕이 합포에서 일본원정군의 사령관으로서 이들 원정군 즉 東路軍을 사열한 바 있다. 한편, 몽고에 항복한 宋에서 뽑힌 군대, 즉 江南軍 10만명은 范文虎가 이끌고 중국 강남에서 출발하여 壹歧에서 합류해 일본을 공격키로 했다. 강남군이 포함되어 병력이 훨씬 많아졌지만, 이번에도 역시 태풍 때문에 일본원정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패배의 소식은 8월에 행궁의 왕에게 전해졌다. 이렇게 해서 7년 만에 시도된 제2차 일본정벌은 참담한 결과를 낳았고, 몽고는 고려 연안에 일본의 침입에 대비해서 金州等處에 鎭邊萬戶府를 설치케 하였다.
(3) 독자적 藩邦으로의 存立
제2차 日本遠征으로 고려가 입은 人的 피해는, 동원된 正軍 9,960명, 梢工 . 水手 17,029명 도합 26,989명 가운데 생환자가 19,397명이어서 7,592명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붙잡힌 것으로 집계되었다. 그 밖에 많은 兵船이 침몰되고, 軍糧米의 소모가 컸으리라는 점을 따지면, 전체의 피해는 막대한 것이고, 지난 수년간 그 준비 때문에 입은 부담과 고통은 또 별도로 헤아릴 사항이었다. 쿠빌라이는 뒤에도 여러 번 일본원정을 시도했으나 더 이상 성사 되지는 않았다.
이번 원정으로 막중한 피해를 입었으나, 이로써 고려는 몽고의 駙馬國으로 안정된 단계에 접어든다고 여겨진다. 쿠빌라이의 세계정복 욕구에 충실하게 부응했다는 점에서라기보다 어려움 가운데 충실히 원정을 준비하고, 노장 김방경 지휘 아래 군대를 체계적으로 지휘하여 태풍 속에서도 비교적 적은 피해를 냈다는 점 등이 고려 국가체제의 안정성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제 2차 일본원정 때, 군대를 이끌고 고려에 온 흔도와 홍다구를 불러 왕이 일을 의논키 위해 자리를 함께 하게 되자 忠烈王이 南面하고 흔도 등이 東面을 하게 되었다. 종전까지 왕과 그들은 東 . 西로 상대해 왔지만, 이제 흔도, 홍다구는 감히 왕에게 抗禮할 수 없게 되었음을 뜻하는 바로서, 이것을 보고 國人들이 크게 기뻐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바로 직전에 쿠빌라이는 충렬왕에게 ‘駙馬’의 2자를 추가해 관인을 내려주어 그 권위를 높여준 바 있다.
바로 3년 전 제 2차 김방경 무고사건 때 홍다구가 거짓으로 쿠빌라이에게 김방경이 반역을 꾀한다고 하면서, 開京 以南의 중요한 지역에 몽고군대를 배치해 방어케 하고, 州와 郡에 모두 達魯花赤을 설치하자고 건의해 쿠빌라이의 허락 아래 김방경을 가혹한 鞠問場으로 끌어내 自服을 강요하던 상황과 비교할 때, 고려의 위상은 많이 달라진 셈이다. 그것은 고려가 駙馬國化된 다음부터 蒙古帝國 중심의 새 국제질서에 순응하면서 그 藩邦으로서나마 國號, 宗廟, 社稷이 溫存되는 독립왕국으로 존속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김방경은 1283년 12월 上洛公으로 致仕하였다. 이미 1280년부터 퇴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왕이 여러 번 만류했다. 그리고 왕이 쿠빌라이에게 제 2차 일본원정의 고려군 지휘관으로 그를 추천했다. 쿠빌라이에게 나이에 걸맞지 않게 강건한 그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1280년 11월 賀正使로 몽고에 보내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는 69세에 都元帥로 일본원정에 出征해서 소임을 完遂할 수 있었다. 이제 72세의 김방경은 만 10년간 首相職에서 일하다가 물러나게 되었지만, 그의 소임, 즉 고려의 존망이 위협받는 난국 수습의 소임을 충분히 수행한 다음이었다.
5. 맺음말 ; 위기의 亂局의 담당자로서의 金方慶
지금까지 13세기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변화와 그에 조응하는 고려사회를 훑어보면서 그것을 김방경의 활동과 연견시켜 살피려 했다. 그리하여 먼저 몽고가 흥기하여 정복활동을 확대시켜, 끝내는 쿠빌라이의 대원제국 건설로 이어져 새로운 세계질서를 수립하게 되기까지의 사정을 살폈다. 그리고 당시 고려 무신정권이 몽고침입에 대적해 새로운 양상을 보여주다가 결국 그 駙馬國으로 떨어지고, 그것이 독자적인 藩邦으로 존속하가까지의 사정을 엿보면서, 그 흐름 속에서 金方慶의 구국활동을 이해하고자 했다.
김방경은 고려 무신정권의 쇠퇴기부터 50대 후반의 나이로 두드러진 활동을 시작하는데, 우선 무신정권이 붕괴되고 三別抄가 봉기하여 국가적 위기가 조성되었을 때 그것을 해결하였다는 점을 주목하였다. 그리고 고려가 부마국화 된 이후 두 번의 일본원정에 억지로 참가하면서 그 독자적 변방으로의 존속이 위협당하는 난국에 당하여 10년간 수상으로 재임하면서 그것을 감당해 나간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더불어 당시의 위기와 난관이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역사적 추이 속에서 훑어 보았다.
발표자는 역사 속에서 중요한 고비마다 그 난국의 감당자를 찾을 수 있다는 관점에서 김방경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3세기 동아시아 세계는 크게 요동치고 있었고, 고려사회는 무신정권의 추이와 국제정세의 변화가 맞물리면서 미증유의 위기와 난국에 봉착하는데, 특히 그것은 국가의 존망이 걸린 심각한 지경의 것이었고, 김방경이 바로 그것을 도맡아 감당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를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의 이순신과 비교되는 것도 유통할 것이다. 그럴 경우, 그를 특정 정파나 가문에 연결시켜 좁게 천착하기 보다는 출중한 식견, 굳센 의지, 강한 실천력, 깊은 충성심 등에 무게를 두고 인간성에 주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러한 접근이 비역사적 관점에서 흐르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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