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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이겨낸 김방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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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13-04-17 18:09 조회2,4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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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이겨낸 김방경
김성철 관장의 유배로 읽는 한국사 32
 
[339호] 2013년 02월 28일 (목) 11:32:14 김성철 nhsd@hanmail.net
 

“방경이 아들 흔과 사위 조변 그리고 공유ㆍ나유ㆍ한희유ㆍ안사정 등 4백여 명과 함께 왕과 공주, 다루가치를 제거하고 강화로 들어가 점거하여 반역을 도모하고 있사옵니다.”

1277년 12월, 전 대장군 위득유와 중랑장 노진의 등은 원나라 흔도에게 김방경을 참소했다. 김방경은 삼별초를 진압한 공로와 일본정벌에 참여한 공로로 최고의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부하장수들이 모여 들고 그의 이름을 팔아 권력을 부리는 자가 많아지면서 시기를 받기 시작했다.

위득유는 동정군 좌군사 김 신의 부하로 김신이 물에 빠져 죽어갈 때 구하지 않은 죄로 파직당한 일에 앙심을 품고 있었다. 노진의 역시 삼별초군을 공격할 때 싸우지는 않고 남의 재산만 빼앗은 죄로 재물을 국고로 몰수한 일에 앙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참소가 허위사실로 밝혀져 김방경은 석방되고 한희유 등 12명은 갑옷을 숨겨 둔 죄로 곤장을 맞고 풀려났다.

하지만 점령군으로 와 있는 원나라 장군들에게 김방경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특히, 할아버지 홍대순 때부터 몽골에 귀순하여 몽골 침입의 길잡이 노릇을 한 아버지 김복원의 대를 이은 매국노 홍다구는 가혹한 고문을 통해 거짓자백을 받고자 했다.

1278년 1월, 혹독한 추위 속에 김방경은 발가벗긴 채 머리에 쇠줄을 감기고 매질을 당했다. 살과 피부가 얼어 시커멓게 멍이 들었지만 고문은 그치지 않았다.

“지난 번 흔도와 함께 국문을 이미 끝냈는데 어찌 다시 이리도 혹독하게 문초하느냐.”

충렬왕은 안타까워 홍다구를 말렸다. 하지만 홍다구에게 왕의 말은 공허했다. 그때 원나라에서 매를 잡으로 온 낭가대가 “내 곧 원나라로 돌아갈 것이다. 황제께서 고려의 사정을 물으면 듣고 본 대로 대답하겠다”고 해 홍다구는 문초를 그쳤다. 하지만 홍다구는 흔도와 함께 다시 김방경을 문초했다.

“소국은 상국을 하늘같이 받들고 어버이같이 사랑하는데, 어찌 하늘을 배반하고 어버이를 거역하여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겠는가. 차라리 억울하게 죽을지언정 거짓으로 자복할 수는 없다”

올곧은 성품의 김방경은 참혹한 고문으로 여러 번 숨이 끊어졌다 깨어나는 고통을 당했지만 백전노장의 기개는 버릴 수 없었다. 자존심이 상한 홍다구는 충렬왕 측근들에게 김방경이 자복하면 정배에 그치고 고려에 피해가 없을 것이라고 회유했다. 충렬왕은 김방경의 고통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경이 자복하더라도 천자께서 어질고 훌륭하시니 장차 역모가 사실인지 아닌지를 밝힐 것이며, 사형에 처하지는 않을 것인데, 어찌하여 스스로 이렇게까지 고통을 당하는가”

“주상께서 이러실 줄은 몰랐습니다. 신은 군인 출신으로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으니, 몸이 죽어 없어질지라도 나라에 다 보답할 수 없는데, 어찌 한 몸을 아껴 없는 죄를 자복해서 사직을 저버리겠습니까”

“나를 죽이려거든 지금 죽여라. 나는 불의에 굴복하지 않겠다”

홍다구는 김방경의 자복을 받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결국 갑옷을 감추었다는 죄명으로 대청도로 유배 보냈다. 그리고 아들 흔은 백령도로 귀양 보내는 선에서 김방경 역모사건은 마무리 되었다.

충렬왕은 장군 인후를 보내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에게 김방경을 귀양 보낸 일을 알렸다. 쿠빌라이는 무고임을 알아차리고 김방경 부자와 위득유, 노진의를 대질시키기 위해 원나라로 불렀다. 하지만 원나라로 가는 도중 노진의는 혀가 짖물려 죽으면서 위득유를 원망했다. 얼마 후 위득유도 병들어 죽자 백성들은 천벌을 받아 죽은 것이라고 손가락질 했다.

1278년 7월, 충렬왕은 쿠빌라이에게 김방경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쿠빌라이 역시 김방경을 고발한 자들이 죽어 대질할 수 없었고, 그의 원통한 사정을 알고 유배형을 풀었다. 그리고 흔도와 홍다구를 원으로 송환하였다.

위득유, 노진의와 함께 김방경의 죄를 날조한 이분희는 백령도, 동생 이습은 조홀도에 귀양 보낸 후 바다에 빠뜨려 죽였다. <다음호에 계속>

   
▲ 김 성 철
남해유배문학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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