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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홍익한(삼학사중 한분) 묘비명-송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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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3-03-26 12:32 조회2,53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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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한의 묘갈명(墓碣銘)

저자 송시열(宋時烈)

 

명(明)나라 숭정(崇禎) 9년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에 금(金)나라 오랑캐가 (‘청(淸)’이라) 참호(僭號)하고는 몽고(蒙古)를 끼고 와서 우리나라에게 함께 황제로 받들기를 요구하였다. 이때 자(字)가 백승(伯升)인 화포(花浦) 홍익한(洪翼漢)공이 장령(掌令)으로 있으면서 상소하기를, “금한(金汗, 청 태종(淸太宗)임)이 황제를 일컫자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준(李浚)이 ‘하늘에는 두 해가 없다’면서 물리쳤으니, 신은 모르는 사이에 수없이 뛰면서 기뻐하였습니다. 신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대명 천자(大明天子)가 있다는 말만 들어왔으니, 오랑캐가 칭제(稱帝)한 후에야 어찌 노중련1)(魯仲連)처럼 죽어야하겠습니까? 내 귀로는 차마 그런 말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비록 바다 모퉁이에 있으나, 평소 천하에 예의(禮義)의 나라라 알려졌고 열성조(列聖朝)에서 대대로 번신(藩臣)의 직분을 정성스럽고 부지런히 닦아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오랑캐를 받들어 섬기어 혹 잠시 명(命)을 늘리더라도 조종(祖宗)에게 어떻겠으며 천하에는 어떻겠습니까? 묘당(廟堂)에서 높은 베개를 베고 깊은 잠을 자면서 군부(君父)가 모욕 당하는 것을 오(吳)ㆍ월(越) 사람처럼 예사로 본다면, 이는 오랑캐가 스스로 황제가 되는 게 아니라 바로 묘당에서 그들로 하여금 황제가 되도록 한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그들 사신을 죽이고 그 글을 빼앗아 명나라 조정에 주문(奏聞)해서 오랑캐가 약속을 어기고 참호(僭號)한 죄를 꾸짖게 하면 우리는 할 말을 다하고 형세도 더욱 떨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 “그대의 나라를 위하는 정성이 가상하다. 사신을 죽이는 일은 너무 이른 듯하니, 천천히 보아가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공은 또 화의(和議)를 주장하는 재상을 보면 얼굴을 마주하고 매우 엄히 꾸짖었다.

   그해 12월에 금나라 오랑캐가 대거 침략하였다. 그때 평양 서윤(平壤庶尹)이 결원이었는데 화의를 주장하는 여러 재상들이 공이 일찍이 ‘오랑캐는 평정할 것도 없다’고 말했다 해서 이번에 시험해 보아야 한다고 하면서 마침내 차하(差下)하여 떠밀어 보냈다. 공은 집으로 달려가 양가(養家) 모부인(母夫人) 이씨(李氏)를 모시고 가족을 이끌고 강도(江都, 강화(江華))로 가서 안돈(安頓)시킨 후 바닷길을 통해 갖은 어려움을 겪으며 마침내 평양에 이르렀다. 이때 적군이 날뛰고 있어 마침내 보산 소성(寶山小城)을 지키려고 민병(民兵)을 모집하면서 의기(義氣)로 격려하였다. 공은 주야로 장벽(障壁)에 올라가 죽음으로써 보답하겠다고 맹세했는데 그 충분(忠憤)의 뜻은 당시 음영(吟詠)한 시(詩)에서 볼 수 있다. 그때 행재소(行在所)의 일이 급해 척화인(斥和人)을 오랑캐의 요구에 응해 찾아내는데 공이 맨 먼저였다. 조정에서 오랑캐에게 말하기를, “홍모(洪某)가 평양에 있으니, 마땅히 잡아서 보내겠다.” 하였다.
 정축년(丁丑年, 1637년 인조 15년) 2월 12일에 도신(道臣, 관찰사)이 유지(諭旨)로 공을 묶어 오랑캐 영(營)으로 보냈는데, 그때 공은 아직 밥을 먹지 않고 있었다. 감압관(監押官) 변대중(邊大中)이 기꺼이 포박을 풀어 밥을 먹게 하지 않았는데, 마침 은산 현감(殷山縣監) 이순민(李舜民)이 위로하기 위해 와서 보고는 변대중에게 포박 풀어주기를 청하고, 공 역시 말하기를, “나는 죽음을 두려워해 도망칠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공은 밥을 먹자마자 즉시 출발하였다.
 의주(義州)에 이르자, 부윤(府尹) 임경업(林慶業)이 맞이하며 말하기를, “살아서 대의(大義)를 부호(扶護)하고 죽어서 사책(史冊)에 빛나는 것이 참으로 남아의 일이다.” 하고는, 많은 물품을 마련해 주었다. 통원보(通遠堡)에 이르자, 호인(胡人) 네 명이 와서 말하기를, “우리는 한(汗, 청나라 임금의 칭호)의 가인(家人)이다.” 하고는, 공이 굶주린 것을 보고 음식을 주면서 말하기를, “공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끝내 반드시 죽이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심양(瀋陽)에 이르기 전에 구경하는 자들이 길을 메우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는 의사(義士)이니 대명(大明) 천자(天子)가 알면 어찌 가상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하면서 위로해 보냈다.
  심양에 이르자, 한(汗)이 별관(別館)에 두고는 예관(禮官)을 시켜 연회를 베풀어주고, 조석의 공봉(供奉) 역시 매우 풍성하였다. 예관이 말하기를, “이는 감히 먹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니, 공은 물리치며 말하기를, “이는 예식(禮食)이 아니다.” 하였다. 한이 사람을 시켜 묻기를, “너는 무엇 때문에 들어왔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나는 척화(斥和)한 대간(臺諫)으로 붙잡혀 들어왔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척화한 자가 어찌 그대 한 사람에 그치랴?” 하니,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망령되이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겠는가?” 하니, 갖은 말로 꾀었다. 공이 용골대(龍骨大)에게 말하기를, “작년 네가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을 때 네 목을 치라고 청한 사람이 바로 나다.” 하니, 용골대 역시 웃으며 갔다.
  하루는 공이 밥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한이 호위병을 성대히 거느리고 와서 친히 신문(訊問)한다는 말이 들렸다. 공은 식사를 마치고 따라간 창두(蒼頭, 하인)에게 말하기를, “내가 오늘 죽을 것이다.” 하였는데, 얼마 후 공의 두 손을 묶고 데려갔다. 늘어선 졸개들이 연신 걸음을 재촉해 발이 땅에 닿을 틈도 주지 않았으나 공은 조용히 걸어갔다. 창두가 오랑캐가 노할까 두려워 옆에서 빨리 걸으라고 재촉하자, 공이 말하기를, “이 지경에 이르러 어찌 더 무엇을 두려워하랴?” 하였다. 공이 뜰에 우뚝 선 것을 본 한이 포박을 풀어주라고 명하고는 말하기를, “왜 꿇어앉지 않느냐?” 하였는데, 이때 여러 호인(胡人)들이 모두 나와 구경하고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이 무릎을 어찌 당신에게 꿇겠소?” 하였다. 한이 말하기를, “너는 어찌 약속을 어기고 척화를 했느냐?” 하니, 공이 말하기를, “너희가 이미 우리나라와 형제국(兄弟國)이 되기로 약속해 놓고 도리어 황제를 일컬으며 우리를 신하로 삼으니, 약속을 어긴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가, 그대에게 있는가?” 하니, 한이 말이 막혀 한참 후 말하기를, “네가 이미 맨 먼저 척화를 주장했는데 우리 군사가 나갔을 때 왜 맞아서 싸우지 않다가 도리어 우리에게 붙잡혀 왔는가?”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주장한 것은 대의(大義)일 뿐, 성패(成敗)와 존망(存亡)은 논할 바가 아니다. 또 우리나라 백성들이 모두 내 뜻을 알게 되면 그대 나라를 섬멸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즉시 옷을 벗고 알몸으로 말하기를, “어서 내 가죽을 벗기라!” 하니, 이는 오랑캐의 형벌이 그랬다. 인하여 붓을 달라고 하여 쓰기를, “대명 조선국(大明朝鮮國)의 붙잡혀 온 신하 홍모(洪某)는 척화한 일에 대해 낱낱이 진술하고자 하나,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아 감히 글로 써서 알리겠다. 대저 사해(四海) 안은 모두 형제가 될 수 있으나 천하에는 두 아비를 둔 아들이 있을 수 없다. 조선은 본래 예의를 숭상하며 간신(諫臣)은 직절(直節)의 풍도가 있어야 한다. 작년 봄 마침 언책(言責)의 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너희 나라가 장차 맹약을 저버리고 황제를 일컫는다는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참으로 맹약을 저버리면 이는 패만(悖慢)한 형제요 참으로 황제를 일컫는다면 이는 두 천자(天子)가 있게 된다. 집안에 어찌 패만한 형제를 두며 천지 사이에 어찌 두 천자가 있겠는가? 더군다나 당신 나라와 조선 사이에는 새로 맺은 교린(交隣)의 약속이 있는데 먼저 저버리고, 대명과 조선 사이에는 전에 보호해준 은혜가 있어 깊게 맺어졌다. 깊이 맺어진 큰 은혜를 저버리고 먼저 저버린 공약(空約)을 지키는 일은 이치에 가깝지 않고 사리에도 부당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맨 먼저 척화의 의논을 내어 예의를 지키고자 했으니, 이는 신하의 직분이었지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는가? 신자(臣子)의 분의(分義)는 마땅히 충효(忠孝)를 다해야 할뿐이다. 위에 임금과 어버이가 계시는데 모두 부호(扶護)해서 안전하게 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 왕세자(王世子)와 대군이 모두 포로가 되어 있고 노모(老母)의 생사 여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상소 하나를 잘못 올려 나라의 화패(禍敗)를 부르게 했으니, 헤아려 보건대, 충효의 도리가 쓸어버린 듯 없게 되어 스스로 죄를 따져보아도 죽어야지 용서 받아서는 안 된다. 비록 만 번 주륙당하더라도 달게 받겠다. 내 피를 북[鼓]에 바르고 혼(魂)이 하늘을 훨훨 날아서 고국으로 돌아가면 상쾌하고 상쾌하겠다. 이밖에는 더 할 말이 없고 오직 속히 죽기만 바랄 뿐이다.” 하였다. 한이 화인(華人) 역관(譯官)을 시켜 응답하기를, “어렵도다, 이 사람이여!” 하고는, 인하여 공의 척화소(斥和疏)를 꺼내들고는 말하기를, “내가 황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인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당신은 천조(天朝)의 반적(叛賊)인데 어떻게 황제가 되겠는가?” 하였다. 한이 크게 노해 빨리 형살(刑殺)하도록 하니 두 호인이 공을 끌고 나갔는데, 이때가 그해 3월 5일이었다.

 

공은 총명함이 빼어나고 과감 정직하였다. 효우(孝友)하는 성품이 하늘에서 타고났으며 평소 사기(辭氣)가 격앙(激昻)하여 굴복하는 바가 없었고 매양 고인(古人)이 의(義)를 위해 성인(成仁)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개연히 사모하였다.

 

공은 남양인(南陽人)으로, 시조 홍선행(洪先幸)은 고려 금오위 위별장(金吾衛尉別將)이다. 본조(本朝) 좌찬성(左贊成) 홍숙(洪淑), 감사(監司) 홍서주(洪敍疇), 현감(縣監) 홍애(洪磑), 진사(進士) 홍이성(洪以成)은 각각 공의 고조, 증조, 할아버지와 아버지이다. 진사가 안동(安東) 김임(金琳)의 딸에게 장가들어 만력(萬曆) 병술년(丙戌年, 1586년 선조 19년) 11월 22일에 공을 출생하였는데, 백부(伯父) 교위(校尉) 홍대성(洪大成)이 아들로 삼았다. 후에 김씨가 전염병에 걸려 졸(卒)하자 공이 천리 길을 달려갔는데, 집안사람들이 모두 막차(幕次)로 나와 붙잡고는 들어가 곡(哭)을 하지 못하게 했다. 공이 그 말을 듣지 않으며 말하기를, “어찌 차마 내가 살고 죽는 것을 따지겠는가?” 하고는, 들어가 곡을 하다 여러 번 기절했다가 다시 소생했는데, 피눈물이 나와 거의 시력을 잃을 뻔하였다. 양가(養家) 부모를 극진히 정성스럽게 하여 참으로 마음에 기뻐하는 일이 있으면 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일찍이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공에게 수업했는데, 월사가 칭찬하기를, “후일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을묘년(乙卯年, 1615년 광해군 7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신유년(辛酉年, 1621년 광해군 13년) 알성시(謁聖試)에 급제했는데 여러 권행(權倖)들이 명단에서 삭제해 버렸다. 인조(仁祖)께서 공주(公州)에 거둥하여 정시(庭試)를 시행했는데, 공이 장원하였다. 전적(典籍)ㆍ감찰(監察)ㆍ사서(司書)ㆍ정언(正言)을 걸쳐 병조 정랑과 좌랑을 지냈다. 외임(外任)은 고산 찰방(高山察訪), 고령(高靈)과 부안(扶安) 현감을 지냈다. 이보다 앞서 원수(元帥) 강홍립(姜弘立)이 오랑캐에게 투항하여 정묘년(丁卯年, 1627년 인조 5년)에 오랑캐를 이끌고 침입해 와 화의(和議)를 성립하고는 강홍립을 귀국시켰다. 공이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그 죄를 극론(極論)하여 죽이기를 청했으니, 집에 있을 때와 조정에서의 행의(行義)와 논의(論議)가 대개 이와 같았다.
  정축년(丁丑年, 1637년 인조 15년) 강도(江都)가 함락될 때 공의 후부인(後夫人) 허씨(許氏) 및 아들 홍수원(洪晬元)과 그 아내 이씨(李氏)가 모두 죽고 홍수인(洪晬寅)은 생사를 알지 못했다. 이는 허씨가 적을 만나 굽히지 않으니 홍수원이 몸으로 가려 보호하자 적이 어지럽게 칼로 찔러 홍수원이 먼저 죽고 허씨는 물로 뛰어들고 이씨는 자결한 것이었다. 공은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쪽으로 갈 때 쓴 가서(家書)에서 효친(孝親) 봉선(奉先)의 도리를 다하라고 신신당부하였다. 심양(瀋陽)에 있을 때 문산(文山, 송(宋)나라 말의 충신인 문천상(文天祥)의 호)을 이어서 읊은 여러 시작(詩作)을 사림들이 전해가며 외면서 모두 눈물을 흘렸다. 임금이 유사(有司)에게 명해 그 집에 월름(月廩)을 주게 하고, 효종(孝宗) 때 공에게 도승지(都承旨)를 추증했으나 허씨 및 홍수원 부부는 정려(旌閭)의 은전을 입지 못해 애석하다. 장보(章甫)들이 평택(平澤)에 사당을 세워 공을 제사 지내고 있다. 우리 현종 대왕(顯宗大王)께서 일찍이 공과 오달제(吳達濟)ㆍ윤집(尹集)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면서 ‘세 사람은 명분이 있는 바여서 스스로 억제하지 못한 것이다.’라는 말이 있자, 임금이 “그렇지 않다. 그 세 사람은 모두 자신이 한 말을 실천하고 죽은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아! 성상의 학문이 고명함은 천고(千古)에 뛰어나다고 하겠다.
  공의 계후자(繼後子) 홍응원(洪應元)은 은혜를 입어 벼슬이 직장(直長)에 이르렀다. 공의 전취(前娶)는 정랑(正郞) 구곤원(具坤源)의 딸인데, 홍수원 및 고양 군수(高陽郡守) 정창징(鄭昌徵)의 처는 그 소생이다. 허씨(許氏)는 군수(郡守) 허식(許寔)의 딸인데 홍수인 및 사인(士人) 윤세명(尹世鳴), 재령 군수(載寧郡守) 심익선(沈益善)의 처는 그 소생이다. 홍응원이 공과 허씨의 옷과 신발을 평택현(平澤縣) 서쪽 경정리(鯨井里) 손좌 건향(巽坐乾向) 자리에 장례했으며, 구씨의 묘는 양주(楊州) 풍양(豐壤) 건천리(乾川里) 오좌 자향(午坐子向) 자리에 있다. 홍응원의 아들은 홍우석(洪禹錫)이요, 세 딸은 허윤(許玧)ㆍ김홍재(金弘載)ㆍ정상문(鄭相文)에게 각각 출가하고, 나머지는 어리다. 고양 군수는 1남 4녀인데 아들 정제현(鄭齊賢)은 숙휘 공주(淑徽公主)에게 장가들어 인평위(寅平尉)에 봉해졌다. 윤세명은 7남 3녀인데, 아들은 윤이형(尹以衡)ㆍ윤이임(尹以任)ㆍ윤이도(尹以道)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재령 군수는 3남 4녀인데, 아들은 심정기(沈廷耆)ㆍ심정로(沈廷老)ㆍ심정구(沈廷耈)이며, 내외(內外) 증손과 현손이 모두 50여 명이다.

 

아! 우리 동방은 은사(殷師) (기자(箕子)) 이래 예의(禮義)가 밝았으며, 고려 말에 이르러 포은 선생(圃隱先生, 정몽주(鄭夢周))께서 도학(道學)을 창도(唱導)하였다. 본조에 이르러서는 또 점차 낙건(洛建,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말함)의 풍도가 있었기 때문에 삼강 오상(三綱五常)의 법이 집집마다 전해져 사람들이 외고 있다. 그러나 대절(大節)에 임하여 빼앗을 수 없는 절조로 능히 한 몸으로 수백 년의 강상(綱常)을 버틴 자는 공처럼 분명하고 뚜렷하게 드러난 자가 있지 않다. 더군다나 허부인 및 이씨 며느리는 지아비를 위해 죽고, 홍수원은 아버지를 위해 죽어 공과 함께 삼강의 중함을 아울러 세웠다. 여기에서 또 공의 가범(家範)이 훌륭했음을 볼 수 있어 완악하고 나약한 자를 깨우칠 그 풍도는 천백 세(千百世) 후까지 쇠퇴하지 않을 것이니, 아! 위대하다 하겠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해와 달처럼 밝고 산악(山岳)처럼 높았네. 그 무엇이 그처럼 고명(高明)했나? 화포(花蒲)공의 절의(節義)이네.

 

각주 1) 노중련(魯仲連) : 전국 시대(戰國時代) 제(齊)나라 사람으로, 진(秦)나라가 칭제(稱帝)하자 적극 반대하다 바다로 들어가 숨어살다가 죽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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