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충숙공(휘 승용)묘지명

페이지 정보

김영환 작성일13-02-25 12:57 조회2,292회 댓글0건

본문

 
천력(天曆) 2년 기사년(충숙 16, 1329) 3월 갑술일에 선수 선무장군 관고려군만호 광정대부 밀직사 보문각대제학 상호군(宣授 宣武將軍 管高麗軍萬戶 匡靖大夫 密直使 寶文閣大提學 上護軍) 김공(金公)이 왕의 글[表]를 받들고 ▨▨(聖節?)을 축하하러 원(元)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압록강(鴨淥江)을 건너자 병이 들어 신안여관(新安旅館)에서 별세하였다. 그 달 경진일에 영구(靈柩)가 수레로 옮겨져 서울로 들어오니 고류동(孤柳洞) 집에 빈소를 차렸다. 4월 丙辛일에 묵동(墨洞) 북쪽 산기슭에 장례지내니, 아, 슬프다.
공의 이름은 승용(承用)이고, 영가(永嘉) 사람이다. 증조는 정의대부 병부상서 한림학사 충사관수찬관 지제고(正議大夫 兵部尙書 翰林學士 充史館修撰官 知制誥)이며 중서령(中書令)에 추봉된 효인(孝印)이고, 조부는 중봉대부 도원수 추충선력정난정원공신 광정대부 삼중대광 도첨의중찬 상장군 판전리사 세자사 상락공(中奉大夫 都元帥 推忠宣力靖難定遠功臣 匡靖大夫 三重大匡 都僉議中贊 上將軍 判典理事 世子師 上洛公) 방경(方慶)이며, 아버지는 봉익대부 부지밀직사사 전법판서 상호군(奉翊大夫 副知密直司事 典法判書 上護軍) 선(瑄)이다. 어머니는 조정대부 사재경(朝靖大夫 司宰卿) 설인검(薛仁儉)의 딸이다.
공은 사람됨이 침착하고 중후하며, 말이 적고, 온화하고 정직하여 항상 즐거워하였으며, 키가 크고 담력이 커서 참으로 재상의 모습을 가졌다. 관직에 있을 때에는 청렴하고 검소하기에 힘쓰면서 특히 사람을 거느리는 데에 능하였으며, 장수로 나가서는 사졸과 더불어 고락을 같이 하면서 감동시키고 인심을 얻었다. 백성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는 이(吏)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니, 백성들이 모두 부모처럼 바라보았다. 재상이 되어서는 바른 길을 밟으며 나라를 위해 절조를 지켜 흔들리지 않았다. 평생 사람을 사귀면서 맑기가 물 같았고, 남의 잘잘못을 입에 담지 않았다.
붕당(朋黨)의 꺼림 때문에 선왕의 뜻을 거슬려 완산주(完山州)의 목(牧)으로 나갔다가 익성부(益城府)의 수령으로 옮기고, 또 멀리 장흥부(長興府)영광군(靈光郡)으로 옮기니, 사람들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동번병마사 겸 감창사(東藩兵馬使 兼 監倉使)가 되었다가, 회양도억마진 합포영(淮陽道 抑摩鎭 合浦營)을 안집(安集)하고, 경상전라도 순문사(慶尙全羅道 巡問使)를 겸하니 이는 공이 바라던 것이었다. 항상 엄정하게 풍기를 단속하고 형조[秋曺]에서 옥사(獄事)를 다스렸으므로, 모두 명성을 얻었으며 중외(中外)가 그 공평함에 탄복하였다.
공은 문자(門資)로써 겨우 14세에 천화사 진전직(天和寺 眞殿直)에 임명되고, 23세에 진사과(進士科)에 올랐으며, 27세에 궁전(弓箭)을 차고 원[皇元]에 들어가 숙위하였다. 위위주부(衛尉注簿)로부터 통례문지후 신호위장사 비서랑 군부좌랑 도관정랑 감찰시사 사재소윤 국자사업 사헌장령 총부의랑 사헌집의 판내부사 언부전서 동지밀직사 밀직사(通禮門祗候 神虎衛長史 秘書郞 軍簿佐郞 都官正郞 監察侍史 司宰少尹 國子司業 司憲掌令 摠部議郞 司憲執義 判內府事 讞部典書 同知密直事 密直使)를 역임하였는데, 모두 대학사(大學士)와 상장군(上將軍)을 겸대하였다. 품계는 봉상대부 중현대부 중정대부 봉순대부 통헌대부(奉常大夫 中顯大夫 中正大夫 奉順大夫 通憲大夫)를 거쳐 광정대부(匡靖大夫)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공의 자세한 경력이다.
공은 처음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원관(元瓘)의 큰딸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 후(厚)는 지금 서부부령(西部副令)이고, 차남 구(玖)는 낭장(郞將)이 되었다. 딸은 개성판관(開城判官) 유지연(柳之演)에게 시집가서 자녀 몇 명을 낳았으나 공보다 먼저 죽었다. 다시 대호군▨자▨ 감찰시사(大護軍▨資▨ 監察侍史) 박영견(朴永堅)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후손은 없다.
아, 나이가 62세에 이르렀으니 어려서 세상을 떠났다고 할 수 없을 것이고, 벼슬이 금자(金紫)에 올랐으니 품계가 낮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관작과 나이에 있어서는 공에게 무슨 아쉬움이 있겠는가. 다만 가슴에 가득 찬 경륜과 큰 도량을 조정의 최고 지위에 올라 펼칠 수 없었으니 거듭 삼한(三韓)을 위하여 애석한 일이다. 두 아들이 내가 선군(先君)과 오래도록 친한 것을 알고 울면서 묘지명을 ▨(청하니?), 흐르는 눈물로 붓끝을 적시면서 글을 짓는다.
명(銘)하여 이른다.
곡령(鵠峰)을 돌아드니 압록[鴨水]의 물은 넓고 넓은데
임금을 섬기려는 한 자락 꿈이 문득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도다.
집안은 상(喪)을 치르노라 어지럽고 분주한데 나라는 충량(忠良)한 신하를 잃었도다.
상락공(上洛公, 金方慶)의 공업을 공이 성대하게 드날렸으나
이제 갑자기 돌아가셨으니 누가 남은 덕을 이어갈 것인가.
훌륭한 행적을 돌에 새겨 무덤을 빛내려 하니
천 년 만 년이 지나더라도 영원히 잊혀지지 않으리라.
중정대부 밀직사좌부대언 삼사우윤 보문각제학 지제교(中正大夫 密直司左副代言 三司右尹 寶文閣提學 知製敎) 이숙기(李叔琪)가 적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