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한림(翰林)
페이지 정보
김영환 작성일13-02-06 14:59 조회3,229회 댓글0건본문
한림은 예문관,춘추관의 봉교(7품)이하의 직위를 이르는 관직으로 주로 검열(9품)을 가르킵니다.
조선시대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에문관이나 춘추관에 배속되는 것은 영광스럽게 여겨 따로 한림이라 불렀습니다.
예문관;
고려시대에는 제찬(制撰)과 사명(詞命:임금의 말이나 명령)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다. 개국 당시에는 태봉(泰封)의 관제(官制)를 계승하여 원봉성(元鳳省)을 두었다가 뒤에 학사원(學士院) ·한림원(翰林院)으로 바꿨다. 1275년(충렬왕 1) 문한서(文翰署), 1298년 사림원(詞林院), 1308년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등으로 불러오다가 1325년(충숙왕 12)에 춘추관을 분리하여 예문관으로 하였다. 관원으로는 대제학(大提學:종2품) ·제학(提學:정3품) ·직제학(直提學:정4품) ·응교(應敎:정5품) ·공봉(供奉:정7품) ·수찬(修撰:정8품) ·검열(檢閱:정9품) 등을 두었다. 1356년 다시 한림원으로 개칭되었다가 1362년(공민왕 11) 예문관으로 환원되었으나 1389년(공양왕 1) 춘추관을 합하여 예문춘추관으로 개편되어 조선시대에 이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칙령(勅令)과 교명(敎命)을 기록하는 일을 맡아보았으며, 개국 초 고려의 관제에 따라 예문춘추관으로 합쳐졌던 것을 1401년(태종 1) 춘추관을 분리하여 예문관으로 개편하였다. 예문관은 예조(禮曹)의 동반(東班) 정3품 속아문(屬衙門)으로, 영사(領事:정1품) ·대제학(정2품) ·제학(종2품) 등은 모두 타관(他官)이 겸임하였으며, 직제학(정3품)도 승정원(承政院)의 도승지(都承旨)가 겸하였고, 응교(정4품)는 홍문관(弘文館)의 관원이 겸임하였다. 그 밑에 봉교(奉敎:정7품) ·대교(待敎:정8품) 각 2명, 검열(정9품) 4명을 두었는데, 이들은 모두 춘추관의 기사관(記事官)을 겸하고 전문적으로 춘추관의 일을 전담하여 이들을 사관(史官), 또는 한림(翰林)이라고 하였다. 봉교 이하 8명의 사관들은 번을 갈라 왕명을 출납하는 승지와 함께 궁중에서 숙직하고, 조회(朝會) ·조참(朝參) ·상참(常參) ·윤대(輸對) 등 정례행사는 물론, 백관회의(百官會議) 기타 모든 중대회의에 참석하여 희의록을 기록, 사초(史草)를 작성하고 시정기(時政記)를 편찬하여 실록편찬(實錄編纂)의 자료로 삼았다. 예문관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경연청(經筵廳)에 병합되었다.
조선 개국 당시까지는 예문춘추관이라 하다가 1401년(태종 1) 예문관과 분리하여 춘추관으로 독립하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영사(領事:정1품 영의정 겸임) 1명,감사(監事:좌 ·우의정이 겸임) ·지사(知事:정2품) ·동지사(同知事:종2품) 각 2명, 수찬관(修撰官:정3품) ·편수관(編修官:정3품∼종4품) ·기주관(記注官:정 ·종5품) ·기사관(記事官:정6품∼정9품) 등을 두었는데, 모두 다른 관청의 관원이 겸임하였다.
> >
>
한림(翰林) 선생안_직제학공(휘 맹헌), 사인공(휘 계우) : 출전 국조전고
>두 분께서 과거 급제 후 한림으로 제수받으신 기록입니다.
>부사공(휘 명리) 묘지명을 지으신 유의손 선생 기록도 있네요.
>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