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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답사의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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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3-02-01 10:49 조회4,5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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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이 있는 제례 공간

[이종호의 과학유산답사기 제4부] 조선 왕릉 1-6

2013년 0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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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격 있게, 철저한 계획에 의해 조성된 왕릉을 답사하려면 왕릉의 기본인 상설제도의 기본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조선왕릉 상설도. 이종호 제공
상설(象設)이란 좁게는 능(陵)·원(園)·묘(墓) 등 각급의 무덤에 설치한 여러 석물(石物)을 가리키며, 넓게는 산릉도감에서 능역에 설치하는 모든 시설물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상설에는 병풍석, 난간석, 석수(석호, 석양, 석마), 석상(상석 또는 혼유석으로 불림), 망주석, 장명등, 석인(문석인, 무석인), 정자각, 비각, 수복방, 수라깐, 재실 등이 모 두 포함된다.

왕릉에 상설을 설치한 목적은 후세인들이 누구의 무덤인지 알아보도록 하는 데 있다. 물론 피장자의 일대기를 적은 지문(誌文)이 있으나, 땅 속 깊이 묻기 때문에 겉에서는 쉽게 알아볼 수 없다. 그에 비해 상설은 쉽게 피장자의 신분 위상을 분별할 수 있다.

상설이란 단어는 넓은 의미에서 능침(陵寢) 자체를 가리키는 용어로도 쓰였다. ‘마음이 상설에 매달려 있다’, ‘멀리 상설을 바라본다’는 등의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이때 상설이란 능침 자체는 물론 능침에 묻혀 있는 선대의 왕을 가리키는 뜻이다.

조선 왕릉의 공간 구성은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는 공간인 ‘정자각’을 중심으로 크게 2단계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외금천교, 재실, 연지 등 진입 공간을 지나 홍살문, 정자각과 참배도(향도+어도), 수복방, 수라청이 배치된 곳은 왕의 혼백과 참배자가 만나는 제향 공간이다. 다음으로 언덕 위 봉분을 중심으로 곡장과 석물이 조성된 곳은 죽은 자를 위한 성역인 능침 공간이다.

왕릉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돌다리인 ‘금천교’다. 이 다리는 왕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으로 속세와 구분해주는 구실을 한다. 금천교를 지나면 능원이 신성한 구역임을 표시하는 커다란 문이 있다. 붉은 석간주칠을 한 신문(神門)인 ‘홍살문(혼전문)’이다.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지붕 없이 화살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웠는데, 중앙에 삼태극 문양이 있다. 홍살문 오른쪽에는 제례 시작을 알리는 가로 세로 6자(1.8m) 정도의 네모난 ‘배위(拜位·판위 또는 어배석, 망릉위라고도 함)’가 있다. 혼백을 부를 때 여기에서 4번 절을 한다.

영조 원릉 홍살문, 배위(홍살문우측), 정자각 및 비각(우 중간). 이종호 제공

홍살문 앞에서 정면 정자각까지 얇은 돌(박석)을 깔아 만든 긴 길이 이어지는데, 이를 ‘참도’라고 한다. 참도는 혼령이 이용하는 ‘신도(향도)’와 참배자(왕 또는 제관)가 이용하는 ‘어도(御道)’로 구분된다. 좌측 신도는 우측 어도보다 약 10cm 정도 높고 넓다. 일반적으로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직선거리는 대략 300척(약 90m)이나 능마다 차이가 있다.

참도는 정자각 월대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월대 동쪽까지 접근하는데, 이곳에서 계단을 통해 ‘배위청’에 오른다. 정자각 계단은 정면이 아니라 측면에 만든다. 참배자가 서쪽(왼쪽)을 바라보면서 들어가도록 설계됐기 때문이다. 이는 해가 동쪽(시작과 탄생)에서 서쪽(끝과 죽음)으로 지는 자연의 섭리를 인공 건축물에 활용한 것이다.

동쪽 계단은 신계(神階)와 어계(御階)로 2개, 서쪽 계단은 1개다. 올라갈 때는 참배자가 왕의 영혼과 함께 하지만 내려올 때는 참배자만 내려온다는 뜻으로 왕의 영혼은 정자각 뒤 문을 통해 봉분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신계는 기본적으로 3단으로 돼 있으며 양옆에 구름무늬와 삼태극을 조각한 석고(石鼓·북)가 있는데 석고는 진행을 가리킨다. 어계는 배석이 없으며 단순한 장대석의 3단 계단이다. 동계를 오를 때는 오른발을 먼저 내딛는다.

동쪽으로 오른 월대는 정전와 배전의 기단 폭이 일치하는 일반배전형이 많다. 월대 높이도 기본적으로 3단 장대석을 쌓았다. 헌관은 월대에 올라 배위석에서 4배하고 동문을 통해 정청으로 들어간다. 배위청은 앞면 1칸, 측면 2칸이며 배위청에 맞닿은 정청은 앞면 3칸, 측면 2칸으로 배위청보다 단을 10cm 정도 높게 조성한다. 두 건물이 결합해 정(丁)자 형태를 갖추므로 정자각이라 한다. 정자각은 일반적으로 맞배지붕이다.

정자각(보물 1741호). 이종호 제공

제례를 마친 제관들은 정청 서문으로 나와 월대 서쪽 어계를 거쳐 내려온다. 그 뒤 정자각 북서쪽에서 제례의식을 끝낸다는 의미로 지방을 불사르고 제물을 ‘예감(隸坎 또는 望燎位)’에 묻는다. 예감은 가로 세로 2자, 깊이 30cm 정도의 정(井)자 형태로 나무뚜껑을 올린다. 조선왕조 초기 능인 건원릉과 헌릉에는 잔대 형식의 ‘소전대’라는 석물이 있었으나, 세종부터 소전대 대신 예감으로 대체했다. 그리고 산신에게 제사 지내는 산신석이 능침의 강(사초지 경사면)이 끝나는 정자각 뒤 동북쪽에 세웠는데 규모는 혼유석의 4분의 1 정도다.

정자각 앞쪽 양옆에는 재실에서 준비한 제례음식을 데우고 진설하는 ‘수라청’과, 능원을 지키는 사람의 공간인 ‘수복방(수직방)’이 있다. 수라청과 수복방은 참도를 향해 서로 마주하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며, 맞배지붕이다. 수라청 근처에는 제례 준비를 위한 ‘어정’이 있다. 어정 위치에 따라 수라청은 아래위로 자리를 이동하기도 한다.

정자각 좌측(바라보는 방향에서는 우측)에는 비갈(碑碣), 또는 신도비(神道碑)를 세우는데 개석(蓋石) 양쪽에 쌍룡을 새긴다. 석비(石碑)는 이수(螭首)와 귀부(龜趺)위에 비신(碑身)을 세우는데 비신 앞면은 표석(表石), 뒷면은 음기(陰記)라 한다. 비각의 위치는 능원의 왼쪽 상단부로 학생 시절 달던 명찰의 위치와 비슷하다.

참고문헌 :
「조선조의 왕릉문화 이해」, 목을수, www.boso.kr
「조선왕릉엔 ‘다빈치코드’ 뺨치는 ‘컬처코드’가…」, 윤완준, 동아일보, 2009.06.29
「5개월의 국장(國葬) 기간 정성과 기술 총결집」, 이창환, 주간동아, 2010.03.30
「4대 걸친 왕실 어른 노릇 두 차례 예송논쟁 촉발」, 이창환, 주간동아, 2010.10.04
「국태민안 기원하는 조선왕릉의 석물」, 이창환, 월간문화재, 2009.07월
「왕실 피바람 지켜본 인수대비 우비좌왕의 특이한 형태」, 이창환, 주간동아, 2010.05.24
「동구릉의 주인과 그 시대」, 연갑수, 2007
『문화유산 왕릉』, 한국문원편집실, (주)한국문원, 1997
『우리역사 우리문화』, 한용근, 서경문화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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