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석평 묘갈(東皐 金魯 書)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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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12-11-18 21:02 조회2,771회 댓글0건본문
동고공(東皐公) 諱 로(魯)께서 서(書)하신 반석평(潘碩枰) 묘갈(墓碣)의 탁본입니다. 경도대(京都大) 소장 자료입니다.
해서체의 달인인 동고공께서 전(篆)까지 쓰신 몇 안되는 묘갈 중에 하나입니다.
김로(金魯) 1498 (연산군 4) ~ 1548 (명종 3)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경참(景參), 호는 동고(東皐)이다. 대사헌 유연재(悠然齋) 김희수(金希壽)의 아들이다. 20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25(중종20)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부정자(副正字)로 초임되고, 이어 검열 · 정자를 지냈다.
글씨에 뛰어나 조정의 각종 전책(典冊)과 고관명사들의 비문을 많이 썼다. 그의 필적으로 글씨를 새겨 간행한 《이가서법(二家書法)》이 있다.
반석평(潘碩枰) 1472(성종 3) ∼1540(중종 35)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1507년(중종 2)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검열을 거쳐 사국에 오래 있다가 감찰, 공조좌랑이 되었다. 활쏘기와 마술에 능하고 책략이 많아 함경북도평사로 나아갔다가 들어와 정언, 각조의 정랑을 지냈다. 유장으로 뽑혀 경흥부사를 지내고 만포첨사, 공주목사를 거쳐 함경남도절도사가 되었다. 뒤에 충청·전라·평안·함경·황해도의 관찰사예조를 지내고 호조·공조의 참판을 지낸 뒤 한성판윤에 올랐다. 형조판서를 거쳐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성품이 빈틈없고 민첩하여 사무 처리에 능숙하였고 숙고해서 결정하였다. 또한 갑작스러운 일에 대응하면 많은 일을 처리하였고 몸가짐을 검소하게 하였다. 시호는 장절(壯節)이다.
그의 묘는 충남 음성군 원남면 호로리 산 4번지에 있다.
1541년(중종 36)에 세워진 반석평(潘碩枰)의 묘갈(墓碣)이다. 찬자는 대제학을 지낸 정사룡(鄭士龍, 1491∼1570)이고 서자는 명필인 김로(金魯)이다.
비문의 초반부에는 반석평의 가계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고 중반부에는 관직생활과 군사의 일에 오래 종사하여 오랑캐의 사정을 정통하게 알고 조목조목 힘써 개진하였던 일이 기록되어 있다. 후반부에는 반석평의 빈틈없는 성품으로 사무 처리에 능통했던 일과 검소한 몸가짐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判書潘公墓碣銘
有明朝鮮國資憲大夫刑曹判書兼五衛
都摠府都摠管 贈謚 潘公墓碣銘
幷序
嘉善大夫行掌隷院判決事鄭士
龍撰
通德郞守議政府舍人兼春秋館編修
官世子侍講院弼善金魯書幷篆額
吾執友司冠潘公父氏寢疾始吾候視日
一至焉其篤也再至三至竟不起吾哭之
慟越辛丑夏練且有日其庶子士渾用趙
夫人命丏銘將表諸墓道嗚呼吾尙靳不
腆之文使公行迹不顯於後耶公諱碩枰
公父其字系出海陽卽今光州有諱思德
忠武副護軍 贈兵曹參議諱岡鏡城判
官 贈戶曹參判諱瑞鱗忠佐副司果
贈吏曹判書皆以公貴也判書配卽忠武
副護軍張智之女公生于成化壬辰幼挺
嶷不群稍長學日進游于上庠以聲譽服
輩行正德丙寅 聖上改玉翌年大比釋
褐卽選補藝文館檢閱居史局者五閱寒
暑陞司憲府監察工曹佐郞公素長射御
多權略朝議欲試邊地除咸鏡北道評事
告滿遷司諫院正言歷戶刑禮三曹正郞
時棟▨將無出公右擢超三級授慶興府
使公推心莅職大爲民夷所頌連收五最
內遷承文院參校轉內資正復超四級秩
通政慶源府使未上任遘疾就醫于京滿
浦僉使缺公用廷薦出鎭居數年復以疾
還除公州牧使癸未 朝廷用師西北驅
逐近塞夷落特拜公咸鏡南道節度使未
幾坐事遞任俄授兵曹參議在中兵凡五
年贊務輸盡時論歸多竟擢拜咸鏡北道
節度使階嘉善公久於戎事曉達夷情條
說亹亹隱然有推轂之望朝議不復煩以
摠練之任進試方岳歷按忠淸全羅平安
咸鏡黃海五道自始政至報勩皆用勤謹
爲理復遍爲春省地官冬曹貳卿京兆亞
尹初備參僚復充上介兩遭朝燕擧無愆
效竟用久次望屬陞秩 特超資憲拜漢
城判尹遷刑曹判書兼都摠管及屬疾
丐閒移知樞府公自筮仕至易簀實三十
四年歷任中外皆有聲績性周敏裁決事
務案無留牘慮定應卒事多辦治待人御
下皆得懽心律身簡約終始不懈而展用
未究議者嗟惜公凡三娶初配朴氏生員
桂亨之女繼配李氏府使檣之女三聘趙
氏士人龜齡之女卒無嗣而李趙皆封貞
夫人庶出子曰士渾女嫁參判崔璡子士
淸公卒于嘉靖庚子五月十九日春秋周
甲有九用治命偶葬李夫人于廣州龍津
里寔是年八月初一日銘曰
朝務擇人 人自重身 世官多僨
孤進易伸 公携束書 有名稷下 不
事沽衒 躍于大治 收聲珥筆 取最
戎馬由卑至鉅 罔非己致 棠茇卿
曹 五憩三貳 謙福衛蹟 孰我敢躓
逮判京兆 又長秋部 倚任方殷
胡嗇其壽 業家雖微 慮深必達
我銘孔厚 以微裔末
嘉靖二十年辛丑十月 日樹
<번역문>
판서 반공(潘公) 묘비명
유명조선국 자헌대부 형조판서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증시 반공묘갈명 : 서문을 아울러 쓰다.
가선대부 행장례원판결사 정사룡(鄭士龍)이 글을 짓고,
통덕랑 수(守)의정부사인 겸춘추관편수관 세자시강원필선 김로(金魯)가 글씨를 쓰고 아울러 전액한다.
나의 벗 형조판서 반공보(潘公父)씨가 병에 걸리자 처음에는 내가 문병한 것에 하루에 한번 갔고 위독해짐에 두 번, 세 번도 갔었는데 필경은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으니 내가 슬피 곡하였다. 해를 넘겨 신축년(1541, 중종 36))에 소상이 끝나고 며칠 뒤 그 서자 사혼(士渾)이 조부인(趙夫人)의 명을 받고 명(銘)을 청해 묘에 표식을 하고자 하였다. 아아! 내가 차마 변변치 못한 글을 아껴서 공의 행적을 후세에 드러내지 못하게 하겠는가?
공의 이름은 석평(碩枰), 공보(公父)는 그 자이니 세계는 해양(海陽)에서 나왔는데 바로 지금의 광주(光州)이다. 사덕(思德)이라는 분은 충무위부호군을 지내고 병조참의에 증직되었으며 강(岡)은 경성판관을 지내고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서린(瑞鱗)은 충좌위 부사과를 지내고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니 모두 공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판서의 부인은 즉 충무위부호군 장지(張智)의 따님이다.
공은 성화 임진년(1472, 성종 3))에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우뚝하게 빼어나 무리 중에서 뛰어났으며 점차 장성하며 학문이 날로 진보되었다.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는 훌륭한 명성으로 동년배들을 감복시켰다. 정덕 병인년(1506)에 중종이 반정을 하고 다음해의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곧 예문관검열에 보임되었다. 사국(史局)에서 5년을 지내고 사헌부감찰, 공조좌랑에 승진하였다. 공은 평소 활쏘기와 마술에 능하고 책략이 많으니 조정의 논의가 변방에서 공을 한번 써보고자 하여 함경북도 평사(評事)에 임명하였다. 임기가 차서 사간원정언으로 전임되고 호조·형조·예조 등 삼조의 정랑을 역임하였다.
당시 유장(儒將 : 문신으로 장수에 임용되는 것)을 뽑는데 공보다 나은 사람이 없으니 발탁하여 세 품계를 올려서 경흥부사에 제수하였다. 공은 진심을 다해 직책에 임하니 백성과 오랑캐들이 크게 칭송하였고 인사고과에서 연이어 다섯 번 최우수를 받았다. 내직으로 승문원참교에 전임되었다가 내자시정으로 옮겼다. 다시 네 등급을 넘어 통정대부의 품계로 경원부사가 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병에 걸려 서울로 와서 의원에게 갔다. 만포첨사의 자리가 비자 공은 조정의 천거로 만포진에 나갔다. 몇 년을 지내고 다시 병으로 돌아와 공주목사에 임명되었다.
계미년(1523, 중종 18)에 조정에서는 서북에 군사를 일으켜 요새 근처의 오랑캐부락을 쫓아내고자 하여 특별히 공을 함경남도절도사에 임명하였다. 얼마 안 되어 일에 휘말려 체임되었으나 곧 병조참의에 임명되었다. 병조에 재임한 것이 5년인데 업무를 도와 극진히 하니 당시의 여론이 많이 쏠렸다. 마침내 함경북도절도사에 발탁되어 임명되니 품계는 가선대부이다. 공은 군사의 일에 오래 종사하여 오랑캐의 사정을 정통하게 알고 조목조목 힘써 개진하여 은연중 장수의 명망이 있었기에, 조정의 논의가 군사를 감독하고 조련하는 직임 때문에 다시 번거롭지 않았다.
관찰사로 등용이 되어 충청·전라·평안·함경·황해 등 다섯 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였는데, 처음 정사를 볼 때부터 임기가 만료될 때까지 모두 부지런하고 공경히 함을 법도로 삼았다. 다시 두루 예조와 호조·공조의 참판, 한성부의 차관을 지냈다. 처음에는 막료로서, 두번째는 상사(上使)로 두 번 명나라에 갔는데 일을 거행함에 어긋남이 없어 마침내 효과가 있었다. 오래도록 승진하지 못하다가 명망이 모아지자 승진하여 특별히 자헌대부에 올라 한성판윤에 임명되었으며 형조판서로 전임하여 도총관을 겸하였는데 병에 걸리자 한가한 직책을 구하여 지중추부사로 옮겼다.
공이 벼슬을 시작해서 별세할 때까지 실로 34년이니 내외의 직책을 역임하여 모두 훌륭한 업적이 있었다. 성품은 빈틈이 없고 민첩하니 사무를 재결함에 책상에는 지체된 서류가 없었으며, 숙고해서 결정하고 갑작스러운 일에 대응하니 많은 일이 처리되었다. 사람을 대하고 부하를 다스림에 모두 환심을 얻고, 자기 몸을 간약(簡約)하게 지켜 시종 게으르지 않았으나 뜻을 펼치는 것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공은 세 번 장가갔는데 첫부인 박씨는 생원 계형(桂亨)의 딸이고 둘째부인 이씨는 부사 장(檣)의 딸이며 셋째부인 조씨는 선비 구령(龜齡)의 딸인데 끝내 후사가 없다. 이부인과 조부인은 모두 정부인에 봉해졌다. 서출의 아들은 사혼(士渾)이고 딸은 참판 최진(崔璡)의 아들 사청(士淸)에게 시집갔다. 공은 가정 경자년(1540, 중종 35) 5월 19일에 별세하니 춘추는 69세이고 유언에 따라 광주(廣州) 용진리(龍津里)에 이부인과 함께 장사지냈으니 즉 이해 8월 1일이다.
명하노니,
조정에서 사람을 선발함에 힘쓰니 사람마다 자중하는구나.
대대로 벼슬길 실패 많은데 외로이 나아가 쉽게 능력 펼치네.
공은 책 보따리 항상 가지고 다니며 직하(稷下 : 제선왕이 학궁을 세운 곳, 성균관을 이름)에서 명성 얻었으나
명예를 구하거나 자신을 드러내면서 크게 쓰이기를 일삼지 않았다.
명성 거두어져 한원에서 붓을 잡았고 군사의 일에 가장 뛰어났구나.
미관을 거쳐 높은 자리에 이르도록 지극하지 않은 것이 없었네.
지방관이 되고 중앙의 대신을 지내니 다섯 곳의 관찰사가 되고 삼조의 참판이 되었다.
겸손함에 복을 받고 그 자취 지키니 누가 감히 나를 막겠는가?
경조의 판윤이 되고 또 형조판서가 되어
의지하는 책임 바야흐로 성대한데 어찌 그 수명에 인색하였는가?
집안은 비록 미미하나 원려 깊으니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내가 매우 간절히 명을 써서 후손에게 밝히노라.
가정 20년 신축년(1541, 중종 36) 10월 일에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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