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은 묘갈(東皐 金魯 書) 탁본
페이지 정보
김발용 작성일12-11-06 18:10 조회3,111회 댓글1건본문
동고(東皐) 김로(金魯)께서 서(書)하신 윤은(尹訔) 묘갈(墓碣)의 탁본입니다. 경기도 박물관 소장 자료입니다.
김로(金魯) 1498 (연산군 4) ~ 1548 (명종 3)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경참(景參), 호는 동고(東皐)이다. 대사헌 유연재(悠然齋) 김희수(金希壽)의 아들이다. 20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25(중종20)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부정자(副正字)로 초임되고, 이어 검열 · 정자를 지냈다.
글씨에 뛰어나 조정의 각종 전책(典冊)과 고관명사들의 비문을 많이 썼다. 그의 필적으로 글씨를 새겨 간행한 《이가서법(二家書法)》이 있다.
윤은(尹訔) 1447 (세종 29) ~ 1528 (중종 23)
조선 초기의 학자이다. 본관이 남원(南原)으로 자(字)는 화중(和仲)이다. 함길도도관찰출척사(咸吉道都觀察黜陟使)로서 청백(淸白)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 림(臨)의 아들이다. 과거에 여러 차례 실패하고 만년에 음직(蔭職)으로 은계도찰방(銀溪道察訪)에 제수되었고, 뒤에는 금화사제검(禁火司提檢)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옥과현감(玉果縣監)으로 옮겨 나아갔으나 자리에 오래 있지 못하고 병으로 사체(辭遞)되었다. 곧바로 사도시주부와 사축서사축(司畜署司畜)에 제수되었으며, 얼마 뒤에는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에 올랐다. 낮은 벼슬이라고 해서 해이함이 없었고 작은 일이라 하여 소홀히 함이 없이 성실하게 20여 년을 복무하였다. 1558년(명종 13)에 병으로 인해 생을 마쳤다.
1537년(중종 32)에 세워진 윤은(尹訔)의 묘갈(墓碣)이다. 찬자는 중종 때 이조판서와 지중추부사를 지낸 눌헌(訥軒) 이사균(李思鈞)이고, 서자는 명필 김로(金魯)이다.
묘비에는 윤은의 가계도와 관직생활에 대한 내용이 간략하게 담겨 있다. 특히 ‘낮은 벼슬이라고 해서 해이함이 없었으며, 작은 일이라도 소홀함이 없이 성실하게 하라.’는 가법이 눈에 띈다.
비의 이수 앞면에는 이무기 한 마리가 좌측 위에 있는 여의주를 올려다보고 있으며, 후면도 동일하게 되어 있다.
有明朝鮮國通訓大夫行軍
資監判官尹侯墓碣銘幷序
資憲大夫議政府左參贊
兼知義禁府事李思鈞撰
及第金魯書
君諱訔字和仲南原大姓也
咸吉道都觀察黜陟使以淸
白行於世者曰臨生繕工監
奉事之得早世卽君之考妻
以工曹典書奇勉之女奇亦
望族也內治無違得家訓者
然也君少孤長能就師通經
傳應擧連不得志晩用蔭仕
除銀溪道察訪後授禁火司
提檢轉玉果縣監莅不久以
疾辭旋復仕歷司䆃寺主簿
司畜署司畜終於軍資監判
官不懈小官不忽細事恪謹
三十餘年以此爲家範遺子
孫享年八十二嘉靖戊子十
一月二十七日以微恙不諱
人見君愈老愈健猶恨其不
克壽君之內卽知承文院事
趙元禧之女承政院知申事
瑞老之孫婦道備至宗戚服
其行里閭稱其善年七十六
病先逝蓋甲申歲也葬于金
浦林村里己丑二月窆于此
用治命也有四子長曰時英
中甲子第時爲軍資監正次
曰時雄奉直郞次曰時豪中
丙子第官至成均典籍而夭
次曰時傑中庚辰第時爲刑
曹正郞女三人長適柳宗蕃
學者也次適習讀官朴玄齡
先歿次適生員金璋內外孫
若曾孫三十餘子壻之途尙
遠所就必不止此君之餘慶
知未艾也銘曰貌之古心又
古內理順車有輔剛牣中不
越矩敎兒肅亦匪怒三乘龍
榮暎戶子食報莫非父
嘉靖十六年五月日立
<번역문>
유명조선국 통훈대부 행군자감판관 윤은(尹訔) 묘갈명 : 서문을 아울러 짓다.
자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겸 지의금부사 이사균(李思鈞)이 글을 짓고,
급제 김로(金魯)가 글씨를 쓴다.
군의 이름은 은(訔)이요, 자는 화중(和仲)이니 남원의 훌륭한 성씨이다. 청백함으로 세상에 행세한 분이 함길도(咸吉道)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림(臨)이고 이분이 선공감봉사 지득(之得)을 낳았는데 일찍 세상을 떠났으니 곧 군의 아버지이다. 공조전서 기면(奇勉)의 따님에게 장가갔는데 기씨 역시 명망 있는 집안이라 가정을 다스림에 어김이 없었으니 집에서 교육받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군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고 성장하여서는 능히 스승에게 나아가 경전에 통달하였으나 과거에 응시하여 연이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만년에 음직으로 관직에 나가 은계도(銀溪道)찰방에 임명되고 뒤에 금화사(禁火司) 제검에 제수되고 다시 옥과현감이 되었다. 얼마 안 되어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다시 복직하여 사도시주부, 사축서사축을 지내고 군자감판관으로 관직을 마쳤다.
낮은 관직에도 게으르지 않고 작은 일에도 소홀하지 않으며 30여년을 삼가하며 공손하게 지내고 이로써 집안의 규범을 삼아 자손에게 물려주었다. 향년 82세로 가정 무자년(1528, 중종 23) 11월 27일에 가벼운 병을 앓다가 별세하였는데 사람들은 군이 늙을수록 더욱 건강한 것을 보고 오히려 능히 수명을 누리지 못했다고 한탄하였다.
군의 부인은 곧 지승문원사 조원희(趙元禧)의 따님이요, 승정원지신사 서로(瑞老)의 손녀이다. 부인의 도리를 모두 갖추었으니 집안 친척들은 그 행실에 탄복하고 동리에서는 그 훌륭함을 칭송하였다. 76세에 병으로 먼저 별세하니 이때가 갑신년(1524, 중종 19)이다.
김포 임촌리(林村里)에 장사지냈다가 기축년(1529, 중종 24) 2월에 이곳에 매장하니 유언을 따른 것이다.
네 아들이 있는데 장남은 시영(時英)으로 갑자년(1504, 연산군 10)에 과거에 급제하여 지금 군자감정이고, 차남은 봉직랑 시웅(時雄)이며, 다음 시호(時豪)는 병자년(1516, 중종 11)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성균관 전적에 이르렀으나 일찍 죽었다. 다음은 시걸(時傑)은 경진년(1520, 중종 15) 과거에 급제하여 지금 형조정랑이다. 딸은 셋으로 장녀는 유종번(柳宗蕃)에게 출가했는데 학자이고, 다음은 습독관 박현령(朴玄齡)에게 출가했으나 먼저 죽었고, 다음은 생원 김장(金璋)에게 출가하였다. 내외의 손자와 증손이 30여명이다. 아들과 사위가 갈 길 아직 멀어 나아가는 바가 반드시 여기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니 군이 후손에게 남긴 복록이 다하지 않음을 알겠구나.
명하노니,
외모가 순수하고 사람도 또한 순수하구나.
집안에서는 순리로 다스려 서로 보완하였네.
마음에 강직함 가득하지만 법도를 어김이 없고
자식을 엄하게 가르치되 또한 성내지 않았네.
세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니 가문에 훌륭한 영광이라,
자식이 음덕을 입으니 아버지의 덕이 아닌 것이 없구나.
가정 16년(1537, 중종 32) 5월 일에 세우다.
김포시 고촌면 신곡리 29-1 번지 윤은(尹訔) 묘갈
댓글목록
김영환님의 댓글
![]() |
김영환 |
---|---|
작성일 |
유연재할아버님, 동고할아버님의 글씨는 하나의 책으로 묶으면 좋은 자료가 될텐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