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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민수 묘갈(유연재 諱 希壽 書)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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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12-11-03 15:10 조회3,150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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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재(悠然齋) 휘 희수(希壽)께서 서(書)하신 권민수(權敏手) 묘갈(墓碣)의 탁본입니다. 교토대 자료로 탁본첩의 형식입니다

권민수(權敏手) 1466년(세조 12) ~ 1517년(중종 12)
본관 안동. 자 숙달(叔達). 호 퇴재(退齋). 1494년(성종 2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 ·부수찬을 지냈다. 부수찬으로 있을 때 연산군의 후원관사(後苑觀射)를 논한 일이 화근이 되어 1504년(연산군 10)의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원지(遠地)로 유배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와 이듬해 소격서령(昭格署令) ·봉례(奉禮) 등을 지내고, 대사헌을 거쳐 충청도관찰사로 재임 중 병사하였다.

1519년(중종 14)에 세워진 권민수(權敏手)의 묘갈(墓碣)이다. 찬자(撰者)는 남곤(南袞), 서자(書者)는 김희수(金希壽)이다.
찬자는 권민수의 아내가 자신에게 비문을 부탁한 사실 등 이 글을 짓게 된 경위를 이야기하며 글을 시작하였다. 이하의 내용은 그의 생애를 기록한 부분과 그의 생애에 대해 평가한 부분으로 나뉜다. 전자는 관직생활을 위주로 건조하게 기록하였다. 이에 비해 후자는 권민수의 순수하고 관대한 품성과 돈독한 우애를 찬탄한 것인데 각각 구체적인 일화를 들어 생동감을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임종시의 풍경과 묘의 위치, 가족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고 명(銘)을 붙였다


有明朝鮮國嘉善
大夫忠淸道觀察
使權公墓碣銘
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知
經筵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


提學知成均館事同知春秋館事
南袞 撰
叔達卒旣葬妻金倒帑具碣材乞銘
於朋友之知君者袞旣無與讓又不
忍銘因廢而不就者逾年及今年秋
余得有北京之役而叔達祥期又逼
今若不銘則吾爲負叔達矣故敢揮
泣而綴之曰君諱敏手叔達其字高


麗太師幸之後世爲冠冕名族高祖
諱允均工曹典書曾祖諱恢舒川郡
事祖諱有順公州牧使考諱琳廣興
倉主簿後以君故 贈吏曹參判妣
李氏兵曹判書補丁之女君生於成
化丙戌幼與弟達手俱有雋才名文
章力刮去陳腐習始以文選之學爲
諸生倡一時儕輩皆推敬莫敢與伍


登 成廟末年甲寅第選補弘文正
字歷著作博士至修撰遷司諫院正
言兵曹佐郞丁內懇服闋拜正言俄
陞吏曹正郞弟達手拜弘文校理甲
子獄起校理君抗議觸諱而死君亦
坐直言遠竄嶺外仍遭外憂至今
上改玉之第一年始起爲昭格署令
未及赴 召遷通禮院奉禮歷軍資


監副正司憲府執義掌樂院正歲壬
申以弘文館直提學擢陞副提學入
政院爲同副承旨次陞至右承旨以
事闔院見罷未幾除掌隷院判決事
知製 敎轉大司諫刑曹參議兵曹
參知乙亥復拜大司諫俄進階嘉善
特授大司憲遞爲同知中樞府事移
漢城府右尹兼同知 經筵事出爲

忠淸道觀察使君素患脺弱至是因
勞勩病發日以轉劇 上聞之遣醫
御藥往救之不效以丁丑正月戊戌
卒于淸州公館嗚呼君行純量弘與
物無忤然識高而氣亢厭世之囂囂
者頗欲矯而正之見又爲不善唾之
若將浼己不喜君者用是爲謗君怡
然不以爲意曰自有知者知之耳篤
於友于自校理君之亡恒悶悶不自
聊言及輒垂淚憫其無嗣以子紹爲
後季弟价手窮不自振君以父母遺
産悉推與之曰待汝成業方乃分財
其在忠淸也盡心民事至廢寢食所
親知其將病勸令辭職怡養君曰受
命於 君當死於職托疾自便在他
人尙且忌之況敢效尤乎及其危篤
(탁본 누락)


价手自京往夫人之弟楊震因公幹
在湖南馳馹赴之君握手與訣無一
語及家私柩至咸昌閏十二月壬午
安厝于栗谷癸坐丁向之原夫人故
珍山郡守諱徽孫之女有賢德克配
君子生二男長曰纘季卽紹皆未冠
云其銘曰
律己以嚴 存中者仁 若有


以爲 胡遽以淪 蓄而不食
貽厥仍雲 千載有人
尙其知君
正德十四年二月 日
中直大夫守濟用監正兼承文院
參校金希壽 書

 

 

<번역문>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가선대부(嘉善大夫)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권공(權公)의 묘갈명(墓碣銘)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 지경연사(知經筵事)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남곤(南袞)은 비문(碑文)을 짓다.

숙달(叔達)이 사망하고 장례(葬禮)를 마친 뒤에 그의 아내 김씨(金氏)가 재물을 써서 비석을 마련하고는 친구 중에 군(君)을 아는 사람에게 명문(銘文)을 부탁하였다. 나 곤(袞)이 이미 남에게 양보할 수는 없었으나 또한 차마 명문을 쓸 수 있었겠는가? 그대로 내버려두고 완성하지 못한 것이 해를 넘겼다. 금년 가을에 이르러 내가 북경(北京)에 사신(使臣)으로 갈 일이 생겼는데 숙달의 대상(大喪)도 임박하니 지금 만약 명문을 쓰지 않는다면 내가 숙달을 저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에 감히 눈물을 뿌리며 글을 짓는다.
군의 이름은 민수(敏手)요, 숙달은 그의 자(字)이다. 고려(高麗) 태사(太師) 권행(權幸)의 후손으로, 대대로 벼슬한 명망 있는 집안이다. 고조부 윤균(允均)은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고, 증조부 회(恢)는 서천군사(舒川郡事)를 지냈으며, 할아버지 유순(有順)은 공주목사(公州牧使)를 지냈다. 아버지 임(琳)은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를 지내고 뒤에 군 때문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어머니 이씨(李氏)는 병조판서(兵曹判書) 이보정(李補丁)의 따님이시다.
군은 성화(成化) 병술년(1466, 세조 12)에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동생 달수(達手)와 함께 모두 훌륭한 인재라는 명성이 있었다. 문장(文章)은 진부한 행태를 없애 버리는 데 힘썼다. 처음에 「문선(文選)」의 학문으로 유생(儒生)들을 창도(倡導)하니 당시의 동류(同流)들이 모두 공경하여 감히 함께 견주지 못하였다. 성종(成宗) 말년의 갑인년(1494, 성종 25) 과거에 올라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에 선발되어 임명되고, 저작(著作)과 박사(博士)를 거쳐서 수찬(修撰)에 이르렀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과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옮겨졌다가 모친상을 당하였다. 복제(服制)를 마친 뒤 정언(正言)에 임명되었고, 얼마 있다가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 승진하였다. 동생 달수는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에 임명되었는데, 갑자년(1504, 연산군 10)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교리군(校理君)이 의논에 반대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슬러 죽임을 당하였고 군도 직언(直言)으로 옥사에 연루되어 영외(嶺外)로 유배되었다. 이어 부친상을 당하였다. 지금의 성상께서 반정(反正)한 첫해에 이르러 비로소 기용되어 소격서영(昭格署令)이 되었는데, 부임하기 전에 소환되어 통례원봉례(通禮院奉禮)로 바뀌어 임명되었고,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장악원정(掌樂院正)을 두루 거쳤다. 임신년(1512, 중종 7)에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에서 발탁되어 부제학(副提學)으로 승진하였고, 승정원(承政院)에 들어가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으며, 차례로 승진하여 우승지(右承旨)에 이르렀다. 어떤 일로 승정원의 승지(承旨) 모두가 파직을 당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되었다가 대사간(大司諫)·형조참의(刑曹參知)·병조참지(兵曹參知)로 옮겨졌다.
을해년(1515, 중종 10)에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었고, 얼마 안 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로 승진하여 특별히 대사헌(大司憲)에 제수되었다. 체직(遞職)되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가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으로 옮겨지고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임하였으며, 외직(外職)으로 나가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었다. 군은 평소 몸이 약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과로로 인해 발병(發病)하여 날로 병세가 위급해졌다. 성상께서 이 말을 듣고 의관(醫官)과 어약(御藥)을 보내어 가서 구하도록 하였으나 효과가 없었다. 정축년(1517, 중종 12) 정월 무술일에 청주(淸州)의 관아(官衙)에서 사망하였다.
아! 군은 행실이 순수하고 도량(度量)이 커서 다른 사람을 거스르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식견(識見)이 높고 기개(氣槪)가 우뚝하여 세상일을 괴롭게 여겨 자족(自足)하며 은거(隱居)하던 자를 자못 고쳐서 바로잡고자 하였으며, 또 불선(不善)한 것을 보면 침을 뱉으며 마치 자기를 더럽힐 것처럼 하였다. 군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이유로 군을 비난하였으나 군은 편안하게 개의치 않으며 말하기를, “스스로 아는 사람만이 그것을 알 뿐이리라.” 하였다.
형제간에 우애(友愛)가 독실하여 교리군이 죽은 뒤로는 항상 울적해하며 스스로 즐기지 않았고 교리군에 대한 말이 나오면 번번이 눈물을 흘렸다. 교리군에게 후사(後嗣)가 없는 것을 가엾게 생각하여 아들 소(紹)를 그의 후사로 삼아주었다. 그리고 막내동생 개수(价手)가 궁핍하여 스스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군은 부모의 유산(遺産)을 모두 동생에게 옮겨주면서 말하기를, “네가 사업을 성취하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래서 지금 바로 재산을 나누어주는 것이다.” 하였다.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에는 백성의 일에 마음을 다하여 심지어 침식(寢食)을 폐하니, 가까운 사람들은 그가 병이 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사직하고 몸을 보양(保養)하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군은 말하기를, “임금에게 명을 받았으니 그 직책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 병을 핑계대고 스스로 편안하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그것이 있어도 미워할 일인데 하물며 감히 허물을 본받겠는가?” 하였다.
병이 위독해지자 개수는 경성(京城)에서부터 오고, 부인의 동생 김양진(金楊震)은 공무(公務)로 호남(湖南)에 있다가 역말을 타고 달려왔다. 군은 손을 잡고 영결(永訣)하였으나 집안의 사사로운 일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영구(靈柩)가 함창(咸昌)에 도착하여 윤(閏) 12월 임오일에 율곡(栗谷)의 계좌(癸坐 : 정북에서 동쪽으로 15도의 방위를 중심으로 한 15도 각도 안의 방향을 등지고 앉은 자리) 정향(丁向 : 정남에서 서쪽으로 15도의 방위를 중심으로 한 15도 각도 안의 방향)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고(故) 진산군수(珍山郡守) 김휘손(金徽孫)의 딸로, 어진 덕이 있어 능히 군자(君子)의 배필(配匹)이 될 만하였다. 2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찬(纘)이고 막내가 바로 소(紹)이니, 모두가 관례(冠禮)를 치르지 않았다고 한다.
명문(銘文)에 이르기를,

자신을 지키기를 엄하게 하였고
마음속에 간직한 것은 인(仁)이었네.
큰일 할 것 같더니
어째서 갑자기 돌아가셨는가?
쌓아놓고 먹지 않았으니
그 후손들에게 남겨 주었네.
후세(後世)의 사람들이
부디 군(君)을 알게 되기 바라노라.

정덕(正德) 14년(1519, 중종 14) 2월 일에

중직대부(中直大夫) 수제용감정겸승문원참교(守濟用監正兼承文院參校) 김희수(金希壽)가 비문의 글씨를 쓰다.


▲ 잉어명당 권민수 묘소 - 경북 상주시 공검면 율곡2리

잉어명당으로 알려진 이곳에는 전설이 있다.
무학이라는 지관이 현재의 잉어명당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고 한다.
“이곳은 명당자리요, 부디 너무 깊이 파지 말고 묘를 쓰시오”
지관은 특별히 당부하면서 자손들에게 퇴제의 무덤자리로 잡아주고, 무덤을 두자 이상 깊이 파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퇴제의 자손들은 관을 깊이 묻는 것이 자손들의 도리라 생각하고 지관의 당부를 무시하고 깊이 파내려 갔다.
석자쯤 팠을 때 갑자기 큰 잉어 한 마리가 불쑥 튀어나와 앞에 있는 연못으로 들어가 버렸다. 놀란 자손들이 지관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그 연못의 물을 퍼내고 잉어를 다시 잡아내려고 했으나 잉어를 찾을 수가 없어서 그대로 입관을 했다. 그래도 그 이후 그의 자손들은 손자까지 높은 관직에 올랐다고 한다.
일제 때 명당 앞의 잉어가 들어간 연못을 메웠더니 그 앞들은 해마다 가뭄이 들어서 다시 그 자리에 연못을 파고 잉어 무덤을 만들어 줬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 다음해 부터는 농사가 잘 되었다고 한다.
아직도 무덤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다.

댓글목록

김발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발용
작성일

예 대부님!
이렇게 자료를 하나하나 모으다보면 그런 날이 꼭 오리라 생각합니다.

김영환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영환
작성일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안사연의 다음 하고픈 일중에 하나가 [안동김씨 금석문대관]입니다.
이 자료도 방대해서 어느 금석문자료보다 빛나리라 생각되는데...  차츰 계획하여 실천해야지요...
전국에 산재해 있는(제주도에서부터 강원도 휴전선까지.. 나아가서 북한까지)금석문 자료를 모으는 작업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도전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