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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홍중성(洪重聖)의 선조 홍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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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2-06-05 10:29 조회3,29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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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이상 [ 洪履祥 ]

 
  • 원본글 출처

    홍이상의 비명(碑銘)

  • 저자

    이정귀(李廷龜)

임자년(壬子年, 1612년 광해군 4년) 사이에 군흉(群兇)들이 내홍(內訌)을 일으켜 큰 화란을 빚었는데, 모당(慕堂) 홍공(洪公, 홍이상)이 도헌(都憲)으로 있다가 힘껏 외직을 구하여 송도 유후(松都留後)가 되었다. 계축년(癸丑年, 1613년 광해군 5년) 옥사(獄事)가 일어나 일시(一時)의 동료들이 체포되어 서로 이어서 유찬(流竄)된 자가 많았으나 공만은 면하였다. 그러다 벼슬을 버리고 선영(先塋)으로 돌아가 다시는 도성문 안으로 들어오지 않다가 해를 넘겨 졸(卒)하였으니, 공은 위태로운 때에 처하여 기미(幾微)를 잘 살폈다고 하겠다.

공의 병환이 위독할 때 내가 바야흐로 서호(西湖)로 폐축(廢逐)당해 달려가 찾아뵈었더니, 공이 손을 잡고 탄식하기를, “세도(世道)가 이에 이르렀으니, 그대가 내쳐진 것이 마땅하네. 내가 일찍 죽지 못한 것이 한스럽네.”라고 하여, 마주보고 눈물을 흘리며 결별했었다. 3일 후에 공의 부음(訃音)이 이르렀으니, 공은 정종(正終, 늙어서 집에서 임종함)한 것이다. 장사지낸 3년 후 공의 여러 고자(孤子)들이 나에게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부탁하기를, “아버지께서 평소 그대를 중히 여기고 그 말이 족히 후세에 전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서, 할아버지의 비명(碑銘)을 그대가 지었소. 그러니 이제 한마디 써서 영원히 전하게 해서 끝까지 은혜를 베풀어주면 다행이겠소.”라고 하였다. 아! 공이 결별하면서 한 말씀이 귀에 쟁쟁한데 나는 아직 죽지 않고 차마 또 공의 비명을 짓는단 말인가?

행장을 살펴보건대, 공의 초휘(初諱)는 인상(麟祥)이요 자(字)는 군서(君瑞)인데, 후에 이상(履祥)으로 고치고 자를 원례(元禮)라 하였다. 모당(慕堂)은 그의 호(號)이다. 홍씨는 안동(安東)의 풍산현(豐山縣)에서 계출(系出)하였는데, 고려 때 홍지경(洪之慶)은 장원 급제(狀元及第)하여 벼슬이 직학(直學)에 이르렀으니 이분이 비조(鼻祖)이다. 그 아들 홍간(洪侃)은 도첨의 사인(都僉議舍人)인데 지은 시(詩)가 ≪동문선(東文選)≫에 많이 실려 있으며, 그 아들 홍유(洪侑)는 밀직사(密直使)요, 그 아들 홍연(洪演)은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이다. 그 아들 홍귀(洪龜)는 우낭장(右郞將)인데 공의 5대조로 비로소 고양(高陽)에 살기 시작하였다. 고조 홍숙(洪俶)은 좌군 사정(左軍司正)이요, 증조 홍계종(洪繼宗)은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이며, 할아버지 홍우전(洪禹甸)은 부사용(副司勇)으로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홍수(洪脩)는 부사직(副司直)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는데, 실은 부장(部將) 홍세경(洪世敬)의 아들로 승지공이 아들이 없어 아들로 삼은 것이다. 문경 백씨(聞慶白氏) 습독관(習讀官) 백승수(白承秀)의 딸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기유년(己酉年, 1549년 명종 4년)에 공을 고봉(高峰) 아래에서 출생하였다.

공은 장중(莊重)하여 웃고 떠드는 일이 적고 행동이 법도에 맞았다. 겨우 이를 갈 나이에 이미 경사(經史)를 통했으며, 성동(成童)의 나이가 되어서는 여러 차례 상숙(庠塾)에서 으뜸을 차지했으나 그 뜻은 과거(科擧)에 있지 않았다. 행촌(杏村) 민순(閔純)공이 강석(講席)을 열어 후진을 가르친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책을 지고 가서 배웠다. 의리(義理)를 깊이 연구해 홀로 깊은 뜻을 터득해 여러 생도들이 감히 바라보지 못했으며, 행촌 역시 스스로 미치지 못할 것으로 여겼다.

계유년(癸酉年, 1573년 선조 6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명성이 더욱 알려졌으며 반중(泮中)이 경도(傾到)하였다. 당시 재중(齋中)에서 신방(新榜)ㆍ구방(舊榜)을 따지니 공이 항언(抗言)하기를, “윤리(倫理)를 밝히는 자리에 어찌 장유(長幼)의 차례가 없겠는가?”라고 하여, 마침내 나이 순으로 앉는 것으로 정했다. 무인년(戊寅年, 1578년 선조 11년)에 대정(大庭) 대책(對策)에서 장원하니 직부전시(直赴殿試)를 내렸다. 기묘년(己卯年, 1579년 선조 12년)에 또 장원으로 급제하자 선조(宣祖)께서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지금 장원의 대책을 보건대 매우 정대(庭對)하는 체모를 얻어 근래 과거의 글 같지가 않다.” 하니, 노수신(盧守愼) 상공(相公)이 따라서 그렇다고 칭찬했으며, 윤두수(尹斗壽)공 역시 말하기를, “신이 그 사람됨을 아는데 조행(操行)이 아름다운 선비여서 문장만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임금이 중히 여기고 조정의 여망이 울연하였다. 예조와 호조의 낭관으로부터 정언(正言)으로 전직하고, 연석(筵席)에 올라서는 논사(論事)가 개절(剴切)하여 궁위(宮闈)의 근습(近習) 배척하기를 회피함이 없었다. 하동지사(賀冬至使)에 충원되어 북경(北京)에 다녀왔는데 일체 법대로 해서 행중(行中)이 숙연(肅然)했다. 돌아와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ㆍ지제교(知製敎)에 제수되었다.

신사년(辛巳年, 1581년 선조 14년)에 찬성공(贊成公, 홍수)의 상(喪)을 당하니 임금이 부의(賻儀)를 예보다 많이 하라고 명하니, 특이한 은수(恩數)였다. 복(服)을 벗고 수찬(修撰)과 병조 좌랑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후 이조로 옮겨 좌랑이 되었다. 사신(詞臣)에 뽑혀 호당(湖堂)에서 사가 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유신(儒臣)을 뽑아 경서(經書)를 교정(校正)할 때 공이 모두 참여하였다. 임금이 삼공(三公)에게 명하여 당하(堂下) 문관(文官) 가운데 학행(學行)과 재망(才望)이 있는 자를 각자 아는 대로 천거하도록 했는데, 정유길(鄭惟吉) 상공이 맨 먼저 공을 천거해 교리(校理)에 제수되었다. 하루는 연중(筵中)에서 역적 정여립(鄭汝立)이 율곡(粟谷, 이이(李珥))을 극도로 헐뜯자 공이 나아가 말하기를, “정여립이 평소에 사사(師事)했다가 마침내 배반한 것입니다. 그 패만한 말을 듣건대, 그런 무리는 마땅히 깊이 미워해 통렬하게 끊어야 합니다.” 하니, 선조께서 공의 말을 옳게 여겼다. 그 후 하교하기를, “정여립은 형서1)(邢恕)라고 할 만하다.”고 하였다. 지평(持平)에서 재차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되고, 해를 넘겨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초승(超陞)하였다. 이때부터 응교(應敎)ㆍ집의(執義)와 태복시 정(太僕寺正) 두 번, 사간(司諫) 세 번, 사인(舍人) 다선 번을 역임하였다. 정여립의 변란 때 문사랑(問事郞)이 되었다가 얼마 후 해서 안무 어사(海西安撫御史)가 되었다.

신묘년(辛卯年, 1591년 선조 24년) 봄에 마침내 직제학(直提學)에서 승지(承旨)로 승배(陞拜)되었다. 고사(故事)에 당상(堂上) 서당(書堂)은 세상에서 문형(文衡)의 망(望)을 기르는 곳이라 일컬어서 세상에 드문 중선(重選)이었는데, 공 및 세 사람이 거기에 참여했으며, 대신(大臣)에게 명하여 뽑은 재보(宰輔)에 합당한 사람 여섯 명 가운데 공도 한 사람으로 추천되어, 어필(御筆)로 특별히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제수하였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 여름에 예조 참의로 호가(扈駕)하여 관서쪽으로 가서 부제학(副提學)으로 이배(移拜)되었다. 송도(松都)에 이르러 폐행(嬖倖)이 정사에 간여하는 죄를 다스려 참(斬)해서 나라 사람에게 사례하기를 면진(面陳)하니, 선조께서 안색을 변하면서 그런 일이 없다고 유시하고는 심지어 “나라가 망하더라도 무고한 사람을 잘못 죽일 수는 없다.”고 하였다. 공은 날마다 복합(伏閤)하여 다투어마지 않으니, 사람들이 공을 위태롭게 여겼다. 평양(平壤)에 이르러 상소해서 어머니 찾기를 빌자 임금이 각도 감사에게 유시해 연로(沿路)로 호송하기를 명했다. 이렇게 되어 공은 위험을 무릅쓰고 임금의 뜻을 거슬러 마침내 어머니를 찾게 되었다. 성천(成川) 분조(分朝)에 가서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제수되었다.

계사년(癸巳年, 1593년 선조 26년)에 양궁(兩宮)이 정주(定州)에서 만나 대사간(大司諫)을 제수하였다. 갑오년(甲午年, 1594년 선조 27년)에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북경에 갔다가 돌아와 재차 좌승지가 되었다.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특별히 승진하여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제수되었다. 이때 왜적이 해상(海上)에 있어서 전쟁의 기미가 급했다. 공이 이르러 상처받은 백성을 무마하고 둔전(屯田)을 널리 열고 의승군(義勝軍)을 설치해서 제대로 조련(操鍊)시켜 치적(治績)이 상등으로 보고 되어 질만(秩滿)해서도 연임하였다.

(丙申年, 1596년 선조 29년)에 나가 기전(畿甸)을 안찰하였는데 과만(瓜滿)해서 또 1년을 연임하였으며, 체직되어 형조 참판으로 제수되고 부총관(副摠管)을 겸임하였다. 부제학(副提學)으로 이배(移拜)되어 비국 유사 당상(備局有司堂上)을 겸임했으며, 명(明)나라 포정(布政) 양조령(梁祖齡)이 빈신(儐臣)을 가리게 되자 선조가 특별히 공을 가도록 명하니,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에서 유임하기를 청했으나 중임이어서 윤허하지 않았다. 돌아오자 가의 대부(嘉義大夫)로 승진하였다.

기해년(己亥年, 1599년 선조 32년)에 우윤(右尹)으로 제수되었다가 좌윤(左尹)으로 전직하였다. 전번 옥당에 있으면서 봉양(奉養)을 위해 진소(陳疏)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춘천 부사(春川府使)로 제수되었다. 자신을 단속하고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며 학교를 일으키고 윤상(倫常)을 돈독하게 하니, 1년이 못되어 교화가 크게 일어났다. 그때 홍여순(洪汝諄)이 제멋대로 탐학(貪虐)하므로 공이 미워해 자주 안색과 말에 나타냈는데, 그 무리인 구의강(具義剛)이 어사(御史)가 되어 잘 보이려고 모함하자 백성들이 부모를 잃은 듯했으며 청덕 선정비(淸德善政碑)를 세워주었다. 서용하여 대사성(大司成)에 제수되니, 세상에서 사유(師儒)를 잘 얻었다고 하였다.

신축년(辛丑年, 1601년 선조 34년)에 좌부빈객(左副賓客)을 겸임하였다가 호조 참판과 대사헌으로 이배(移拜)되었다. 이때 영남 유생 문경호(文景虎)가 정인홍(鄭仁弘)의 사주를 받아 상소해서 우계(牛溪) 성혼(成渾)을 배척해 장차 사류(士類)를 일망 타진할 계획을 하는데 기자헌(奇自獻)이 부동(附同)하니 공이 힘껏 변명해 풀다가 마침내 체직(遞職)되었으며, 곧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나가 질만(秩滿)해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서용되어 호조 참판 겸 동지춘추관사(戶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에 제수되고, 대사성(大司成)으로 이배되었다.

정미년(丁未年, 1607년 선조 40년)에 봉양을 위해 청주 목사(淸州牧使)로 나갔다. 광해군(光海君)의 초정(初政) 때 공이 선조(先朝)의 경악 구신(經幄舊臣)이라 하여 대사간으로 불렀는데 대사헌과 부제학으로 이배되었다. 이때 전장(銓長)이 결원되자 수상(首相) 이원익(李元翼)이 인망(人望)에 따라 세 사람을 추천했는데 광해군이 세 번이나 물리치고 마침내 척재(戚宰)에게 낙점(落點)하자 공의(公議)가 떠들썩했다. 임연(任兗)과 박여량(朴汝樑)이 ‘현인은 방소(方所)가 없이 써야 한다.[立賢無方]’는 말을 이끌어 해명하자, 공이 옥당에 있으면서 차자를 올려 임연과 박여량을 배척하였다. 또 조정(趙挺)이 어찰(御札)을 전달하지 않은 죄를 논박하니, 군소배들이 눈을 흘겼다.

기유년(己酉年, 1609년 광해군 원년)에 사체(辭遞)하고 예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여름에 대사헌으로 제수되었는데, 그때 광해군이 오랫동안 경연(經筵)을 폐하니 군정(群情)이 모두 울적해 하였는데 마침 대신의 인대(引對)가 있어 공 역시 입시하여 극언하니, 광해군이 가납(嘉納)하고는 상신(相臣)을 둘러보며 말하기를,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니 대신은 이런 뜻을 알아서 경박하고 일 꾸미기를 좋아하는 자는 임용하지 말라.”고 하였다. 상공(相公) 이항복(李恒福)이 말하기를, “그것이 실로 지금의 고질(痼疾)이어서, 비록 현자(賢者)가 담당하더라도 갑자기 변하게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조화(調和)해서 진정(鎭靜)시키는 것은 실로 책임이 대신에게 있으며 대신으로 하여금 그 직분을 다하게 하는 것은 임금의 책임입니다. 근래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 것을 대신이 미리 알 수가 없으니, 이것이 큰 폐단입니다.”라고 하였는데, 말이 매우 엄정해 사론(士論)이 훌륭하게 여겼다.

명나라 사신(使臣) 웅화(熊化)가 조제(詔祭)하기 위해 나왔는데 예관(禮官)이 종호(宗號)를 숨기고자 하여 가짜 신주(神主) 만들기를 몰래 청원하자, 공이 예관을 탄핵하기를, “황상(皇上)이 사신을 보내 치제(致祭)하는 것이 어떤 일인데 감히 가짜 신주를 설치해 제사를 지내겠습니까?” 하니, 그 의논이 잠재워져 의논하는 자들이 탄복하였다. 사체하고 대사성으로 제수되고, 가을에 또 대사헌으로 제수되었다. 10월에 대부인(大夫人) 상(喪)을 당해 신해년(辛亥年, 1611년 광해군 3년)에 복(服)을 벗고 즉시 부제학으로 제수되었다.

임자년(壬子年, 1612년 광해군 4년) 봄에 대사간과 대사성으로 제수되어 동지춘추관사를 겸임하였다. 공은 시사(時事)가 날로 글러지는 것을 보고는 벼슬길에 뜻이 없었다. 비록 공의(公議)를 저버리지 못해 삼사(三司)를 두루 역임했으나 제수되었다가 곧 체직하고 힘껏 외직으로 나가기를 빌었다. 9월에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나갔는데 사조(辭朝)하는 날 광해군이 인견하자, 공이 조정 붕당(朋黨)의 화(禍)를 극언하였다. 광해군이 말하기를, “하북(河北)의 적을 없애기는 쉽지만 붕당을 제거하기는 어려우니, 그렇지 않은가?” 하니, 공이 정색(正色)하고 말하기를, “이는 혼조(昏朝)의 나라를 망칠 말입니다. 임금이 먼저 본원(本原)의 자리에 서서 사정(邪正)을 구별하면 붕당의 화는 저절로 없어지게 됩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대학(大學)≫의 성정(誠正)의 공(功)과 ≪서경(書經)≫ 홍범(洪範)의 건극(建極)의 설(說)을 들어 명백하게 진계(陳戒)하였다. 상공 이덕형(李德馨)이 나와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재상은 모름지기 유신(儒臣)을 임용해야 한다. 홍모(洪某)가 연중(筵中)에서 한 논의는 우리들이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때 적신(賊臣)이 이미 정권을 잡고 사당(私黨)을 심은 후여서, 공이 거취(去就)를 결정하려고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이미 임소에 이르러서 여러 차례 사직하는 글을 올렸으나 체직을 얻어내지 못했다.

일찍이 선영(先塋)이 바라보이는 곳에다 작은 집터를 쌓았는데, 과만(瓜滿)하자 곧바로 그곳으로 돌아가 물가에다 집 하나를 짓고 날마다 향리의 이웃과 종척(宗戚)과 어울려 술을 마시거나 시를 읊는 일로 소일하였다. 다른 사람이 혹 조정의 시비와 관장(官長)의 득실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문득 손을 저어 중지시켰다. 계축년(癸丑年, 1613년 광해군 5년) 이후 시사(時事)가 망극(罔極)하게 되자 공은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혹 흐르는 눈물이 옷을 적시며 말하기를, “나는 일찍 죽어서 이런 꼴을 보지 않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을묘년(乙卯年, 1615년 광해군 7년) 4월에 병이 나자 성(城) 서쪽 밖 옛집으로 돌아가 약(藥)을 물리치고 마시지 않으며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 있는데 그걸 마신다고 해서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임종할 때 의기(意氣)가 안한(安閒)하였는데, 친우(親友)와 결별하기를, “온전한 몸으로 죽으니,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하였다. 9월 19일 정침(正寢)에서 졸(卒)하니, 춘추 67세였다. 고양(高陽) 고봉(高峯) 아래 신좌 을향(辛坐乙向) 자리에 장례하였다.

공은 자품(資品)이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며 효우심(孝友心)이 천부적이었다. 자식의 도리를 한결같이 성인의 가르침을 따라 매일 닭이 울면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빗은 다음 당(堂)으로 올라가 옷이 따뜻한가 시원한가를 묻고 몸소 밥상을 올리고는 물러나 글을 읽었다. 찬성공(贊成公)이 만년에 풍질(風疾)에 걸리자 자리를 떠나지 않으며 지성으로 약물(藥物)을 썼으며 의원을 보면 반드시 절을 올리고 말과 눈물이 함께 흘러 내렸으며 10여 년 동안 옷을 벗지 않고 시중을 들어 마침내 회복되어 강건(康健)하게 고종(考終)하니, 사람들이 효성에 감복한 것이라고 하였다. 집상(執喪)하면서 3년 동안 피눈물을 흘리며 최질(衰絰)을 벗지 않아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집안이 가난한 데다가 제매(弟妹)가 미약하여 떨치지 못해 공이 병시중을 드는 여가에 몸소 두 아우를 데리고 학업을 권과(勸課)하면서 혹 매를 때려 게으름을 경계해 모두 성립(成立)시켜 부모가 살아 계실 때 과거에 급제시켜 영화를 보도록 하였다. 그러다 재산을 나누기에 미쳐서는 좋은 것은 모조리 그들에게 주었으며 조카들을 자기 자식처럼 사랑해서 장가보내고 시집보내는 비용을 모두 자신이 마련해 주었다. 고아나 과부를 항상 집에서 위무하며 기르고, 친척은 친소(親疏)를 가리지 않고 대우하였다. 상제(喪制)는 모두 ≪가례(家禮)≫를 따랐으며, 재숙(齋宿)하면서 반드시 목욕을 했는데 병이 났다고 해서 폐한 적이 없었다.

성품이 소박하여 사치와 화려함을 통렬히 끊었다. 항상 자제에게 말하기를, “집안이 쇠퇴해 오다가 내 몸에 이르러 이처럼 영화롭게 된 것은 오직 조상께서 덕(德)을 쌓아 온 소치이다. 너희들은 교유(交遊)를 가려서 하고, 말을 삼가서 절대 의론(議論)을 좋아하거나 사당(私黨)을 심어 이름을 얻어 진출하는 매개(媒介)로 삼지 말라.”고 하였다. 방안에 단정히 앉아서 옛사람의 교훈에 침잠(沈潛)하여 심신을 수렴(收斂)하면서 종일 게으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공은 퇴청해서는 절대 다른 사람과 왕래하지 않았다. 손님이 찾아오면 때로 혹 즐겁게 마시면서 취하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평소 말을 빨리 하거나 갑자기 안색을 바꾸지 않아 비록 화환(禍患)으로 급박하거나 사무가 바쁠 때라도 사기(辭氣)가 조용하고 온화하였다. 처치한 바가 분명하고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여 다른 사람과 따지지 않았으나 공사(公私)의 시비를 가리기에 이르러서는 한마디 말도 고의(古義)를 진술하여 의연(毅然)해서 빼앗을 수가 없었다. 포의(布衣)에서부터 재상의 반열에 이르기까지 처신하고 사람을 대하는 것이 처음과 똑같아 바꾸는 일이 없었으며 항상 도회(韜晦)에 힘썼는데 다른 사람이 아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정에서의 지행(至行)은 비록 이웃이라 하더라도 아는 자가 드물었다.

공의 학문은 사우(師友)의 전수함이 있어서 항상 마음의 공부를 해서 동정(動靜)과 어묵(語默)에 반드시 이치를 구했으며 관(官)에 있으면서 시설(施設)함과 조정에서의 언론(言論)에는 모두 연원(淵源)이 있어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았다. 항상 탄식하기를, “젊어서 학문을 좋아해서 거의 깊은 경지에 나아가게 되었는데 중년에 벼슬하느라 힘을 오로지 쓰지 못해 늙도록 성취함이 없으니, 이는 배우는 자들이 마땅히 경계해야 할 바이다.” 하였다.

선조(宣祖)의 지우(知遇)를 받아 여러 차례 은혜로운 장려를 입어 강관(講官) 가운데 제일이라는 칭호까지 있었다. 연달아 정시(庭試)에서 장원해 일찍 호당(湖堂)에 뽑혀 문장의 문명(文名)이 자자하게 높고 명망과 실제가 다함께 높았으나 끝내 사한(詞翰)으로 자임(自任)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이 때문에 더욱 훌륭하게 여겼다. 아들 홍탁(洪)의 원종 일등훈(原從一等勳) 및 손자 홍주원(洪柱元)의 신분이 귀하게 됨으로 여러 차례 증직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부인 김씨(金氏)는 안동(安東)의 망족(望族)으로, 고려 시중(侍中)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이다. 할아버지 김춘(金春)은 무주 현감(茂朱縣監)이요, 아버지는 김고언(金顧言)인데 장흥 부사(長興府使) 유충정(柳忠貞)의 딸에게 장가들어 부인을 가정(嘉靖) 갑인년(甲寅年, 1554년 명종 9년)에 출생하였다. 유순(柔順)하고 현숙(賢淑)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재식(才識)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여공(女工)은 배우지 않고도 잘했다. 부모가 항상 말하기를, “우리 집안을 일으킬 자는 이 딸일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공의 집안으로 시집와서는 시부모를 예(禮)로써 섬겼다. 공의 집안이 평소 가난하였는데, 몸소 다듬질하고 밥을 지어 손수 맛있는 음식을 갖추었으니 일찍이 가난한 빛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시집살이 때부터 늙고 귀하게 되어 명복(命服)을 받고 손자들이 집에 가득한 데 이르러서도 부도(婦道)를 하루처럼 지켰다. 종척(宗戚)을 어루만지고 동복(童僕)을 부리는 데 모두 법도가 있어 규문(閨門)이 엄숙하였다. 조정의 제도에 능력 있는 사람을 임용하여 큰 복을 받아 누리고 많은 자녀를 두었으므로 세상에서 제일 가는 현부인(賢夫人)이라 일컬었다. 공이 돌아간 후 슬퍼함이 예제(禮制)를 벗어나더니 연기(練期)를 막 넘겨 졸하여 공의 묘에 부장(附葬)되었다.

6남 3녀를 낳았으니, 장남 홍방(洪霶)은 가선 대부(嘉善大夫) 대사간(大司諫)이요, 다음 홍입(洪雴)은 문과(文科) 첨지(僉知)요, 다음 홍집(洪)은 문과 장령(掌令)이요, 다음
홍영(洪霙)은 예조 참판이요, 다음 홍박(洪)은 음보(蔭補)로 수참 판관(水站判官)이요, 다음 홍탁(洪)은 진사(進士)로 개성 도사(開城都事)이다. 맏딸은 참봉 이경유(李敬裕)에게, 다음은 지평 조공숙(趙公淑)에게, 다음은 예조 정랑 허계(許啓)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홍방은 1남 3녀를 낳았으니, 아들 홍주일(洪柱一)은 갓 문과에 급제했으며, 큰딸은 판관 윤탄(尹坦)에게, 다음은 찰방 윤부(尹)에게, 다음은 한종서(韓宗緖)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홍입은 아들이 없어서 홍영의 아들 홍주후(洪柱後)를 후사로 삼았다. 홍집은 딸 하나를 낳았는데 허제(許穧)에게 출가하였다. 홍영은 5남 4녀를 낳았는데, 장남 홍주원(洪柱元)은 정명 공주(貞明公主)에게 장가들어 영안위(永安尉)에 봉해졌으며, 다음은 홍주훈(洪柱勳)이며, 큰딸은 이준구(李俊耈)에게, 다음은 진사 이시술(李時術)에게, 다음은 이항진(李恒鎭)에게 출가했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홍박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딸은 박종악(朴宗岳)에게 출가하고, 아들 홍주하(洪柱夏)는 생원이다. 홍탁은 4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홍주건(洪柱建)이요, 나머지는 어리다. 이경유는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이몽익(李夢翼)이요, 딸은 생원 백상빈(白尙賓)에게 출가하였다. 조공숙은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조세형(趙世馨)이요, 큰딸은 이유형(李惟馨)에게, 다음은 권유(權䃋)에게 출가하였다. 허계는 2남 5녀를 낳았는데, 딸은 이면(李櫋)에게 출가하고, 나머지는 어리다. 윤탄은 5남 1녀를 낳았는데, 딸은 이경휘(李慶徽)에게 출가하였다. 한종서는 1남 1녀를 낳았고, 홍주일과 조세형, 이유형은 모두 아들 둘을 낳았다. 홍주원은 3남 1녀를 낳았고, 허제는 아들 셋을, 이몽익은 아들 이진발(李震發)을 낳았다. 박종악ㆍ이준구ㆍ이시술은 모두 1남 1녀를 낳았다. 이면은 아들 하나를, 권유는 아들 하나를, 이진발은 아들 둘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며, 내외(內外) 여러 손(孫)이 70여 명이다.

아! 벼슬한 선비로서 성대한 이름이 있는 자는 비록 높은 제우(際遇)를 받더라도 혹 훼예(毁譽)가 어긋나게 됨을 면치 못하는데, 공 같은 분은 조정에 선 지 40여 년에 항상 당시의 중망(重望)을 받고 있어서 사람들이 모두 공보(公輔)로 기대했었다. 그래서 비록 사론(士論)이 한참 어긋날 때라도 감히 공은 애제(涯際)를 엿보지 못해 자주 위기를 맞았으나 공에게는 감히 죄를 씌우지 못했다. 만년에는 또 일을 사절하고 한가히 지내면서 어려움을 당해도 바름을 지키며 남의 구속을 받지 않아서 명절(名節)을 온전히 하다가 서거했으니, 비록 공의 지위가 정승에 이르고 나이가 이수(頤壽, 1백세)에 이르렀더라도 끝내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공의 평생 뜻이니, 임종할 때의 말로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자손들이 모두 가훈(家訓)을 지켜서 네 아들과 두 사위가 연달아 대과(大科)에 올라 고관 대작(高官大爵)이 빛나니, 하늘이 공에게 베푼 것이 이런 데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선조(宣祖)께서 양성해서 많은 인재 배출했네. 누구를 기다려 일어났던가? 유독 많은 선비 가운데 뛰어났네. 공의 대책(對策)을 임금이 포가(褒嘉)하니, 상신(相臣)도 칭찬했네. 어찌 문장만 그러했으랴? 덕행(德行)과 정사(政事) 역시 그렇지 않은 것 없었네. 이에 강연(講筵)에서 임금이 옷깃을 여미었고 천관(天官)을 삼으니 현로(賢路, 어진 사람을 등용하는 길)가 눈을 씻게 되었네. 대각(臺閣)에 있게 되자 조정 기강이 숙연해지고, 고을 수령이 되어서는 일 처리가 온전했네. 모든 간선(簡選)에는 공이 반드시 앞섰는데, 어찌 공의 능력만이랴? 선조(宣祖)께서 알아주셨기 때문이며, 공은 다른 기술 없고 몸소 솔선함뿐이었네. 위급할 때에도 바름을 지키고 폐행(嬖倖)을 논박해 배척했네. 혼조(昏朝)의 기미를 알아 함정에 빠짐을 면했네. 만년에는 구원(丘園)에서 시서(詩書)로 유유자적했네. 공의 평생은 모두 학문의 힘으로, 명철 보신(明哲保身)하여 이름을 온전히 해서 살아서나 죽어서나 편안하네. 다하지 못한 바는 한 권의 책으로 남겼네. 내가 그 집안을 보니 벼슬아치 가득하여, 공의 덕이 오랠수록 더욱 드러날 줄 알겠네.

각주

1) 형서(邢恕) : 송(宋)나라 정자(程子)의 문인(門人)으로 사마광(司馬光)의 문객으로 지냈음. 심술(心術)이 바르지 못하여 사마광을 모함해 장돈(章惇)에게 붙었다가 다시 장돈을 배반하고 채경(蔡京)에게 붙었음.

참고
출처

국역 국조인물고, 세종대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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