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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객관중영기(尙州客館重營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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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작성일12-04-20 22:02 조회2,728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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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객관중영기>
이 자료의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의 <근재집(謹齋集)>(安軸 지음)에서 퍼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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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집총간 / 근재집(謹齋集) / 謹齋先生集卷之二 / 記
尙州客館重營記 
至正三年癸未。余受尙州之命。是年夏四月。到州視事。州近年來。困於苛政。民物流散。里巷蕭然。凡古之廨宇州學神祠佛寺。皆已頹圮。惟客館完具。輪焉奐焉。甲於南方。其廳堂基位。規模布置。宏壯有裕。各得其宜。余心自以爲此必大人君子所指畫。非俗人循常之制也。因問邑人曰。今東征省郞金相國永煦之所營也。州在八達之衢。乘傳奉使者。無虛日也。古之客館。湫隘卑陋。而又年代綿久。棟已撓矣。常爲惡賓所嗔。人甚病焉。越丁卯四月。公出判是州。卽有重新之意。悶生民勞困。不忍興功生事。但以仁愛字民。嚴重律下而已。旣朞。而一邑安於德政。始有聊生之望。思欲一用其力。以報公恩。於是。公知民之可使。鳩材命役。立定期限。小民足蹈手舞。悅而忘勞。豪黨俯首帖耳。畏而竭力。由是。事不傷民。役不妨農。不日成之。館旣成。又闢館之西。別營小館。以待賓之次者。故雖使賓沓至。寄寓有館。邑人安焉。噫。公用如彼孑遺。成如是巨構。力實恢恢。雖用民之力。實出公之智耳。民到于今稱之。夫治天下國家者。其猶作室。詩有稠繆牖戶
1)之比。書有肯堂肯構之喩。公之坐廟堂。立陳經紀。施設方略。而再造王家。於斯可見。四年甲申。余自尙入參密直。公進拜都僉議贊成事。明年。加左政丞。余亦再遷贊成事。日常攀附。公謂余曰。尙之客館。余之所營。而子之所嘗見也。竊欲記其事。以傳於後。子其識之。余文學荒拙。不足以形容盛美。然重違嚴命。略記所聞於邑人者。寄書于館之東軒云。

지정(至正) 3년 계미년(1343년, 충혜왕 4년)에 내가 상주 목사의 명을 받고, 이 해 여름 4월에 상주에 도착해 정사(政事)를 보았다. 상주는 요 근래에 와서 가혹한 정사에 시달려 백성들과 물자가 이리저리 떠돌고 흩어져서 마을과 거리가 쓸쓸하였다. 무릇 예전의 관사, 주(州)의 학교, 신사(神祠), 절[佛寺]은 이미 모두 무너져 결딴이 나 있었다. 오직 객관(客館)만이 온전했는데, 웅장하고 화려함이 남쪽 지방에서 으뜸이었다. 청당(廳堂 : 마루와 방)과 기위(基位 : 기초와 방위)의 규모며 포치(布置 : 排置)가 으리으리하면서 넉넉하여 그야말로 적절히 잘 어울렸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는 반드시 대인군자(大人君子)가 일일이 지시하고 계획한 것이지 속인(俗人)의 평범한 제도(制度)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고을 사람에게 물어 보았더니 “정동행성 낭관[東征省郞]
2)인 김영후(金永煦) 재상[相國]께서 지으신 것입니다. 상주는 사통팔달의 갈림길에 자리잡고 있어서 사명(使命)을 받들어 역마를 탄 자가 하루도 비는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옛 객관이 협소하며 낮고 지저분한 데다 지은 지 오래 되어 들보가 이미 휘어져서 항상 길손들이 나무라는 결점이 되었기에 사람들이 더욱 책망하였습니다. 정묘년(1327년, 충숙왕 14년) 4월에 이르러 공이 판관(判官)으로 상주에 나와서 객관을 중수할 뜻이 있었으나 백성들의 고생과 곤궁함을 염려하여 차마 공사를 일으키지 못하고, 오로지 인애(仁愛)로 백성들을 사랑하고, 법률에 맞게 엄중히 아랫사람들을 다스릴 뿐이었습니다. 1년 후, 어질고 바른 정치 덕분에 온 고을 사람들이 편안히 지내게 되자 비로소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갖게 되어 그 힘을 모아 한번 공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공이 백성들을 부릴 수 있게 되었음을 알게 되어 재목(材木)을 모으고 부역을 명하여 기한을 정하자 백성[小民]들은 발을 구르고 손을 흔들어 춤추며 기뻐하면서 (객관을 짓는) 고단함을 잊었으며, 억센 무리[豪黨]도 고개를 숙이고 귀를 늘어뜨려 순종하면서 온힘을 다했습니다. 이리하여 객관을 짓는 일이 백성을 상하게 하지 않고, 부역이 농사짓는 것을 방해하지 않고도 며칠 되지 않아 객관이 모두 완성되었습니다. 또한 객관 서쪽 땅을 개간하여 별도로 자그마한 관사[小館]를 지어서 길손이 거처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사빈(使賓)이 겹쳐 이르러도 유숙(留宿)하는 데 여유가 있어 고을 사람들이 안심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아! 공이 저와 같이 얼마 안 되는 백성을 부려서 이렇게 큰 집을 짓고도 실로 힘이 남아돌았으니 비록 백성의 힘을 이용하였으나 실제로는 공의 지혜에서 나왔기에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이를 칭송하고 있다. 무릇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일은 곧 집을 짓는 것과 같으니 시경(詩經)에 ‘주무유호(綢繆牖戶)’의 비유가 있고, 서경(書經)에 ‘긍당긍구(肯堂肯構)’의 비유가 있다. 공이 묘당(廟堂 : 朝廷)에 앉아서 경기(經紀 : 經綸紀理)를 세우고 방략(方略)을 베풀어 왕실(王室)을 다시 번영케 하였음을 이에서도 볼 수 있다.
지정(至正) 4년 갑신년(1344년, 충혜왕 5년)에 내가 상주에서 밀직사사(密直司事)로 조정에 들어가 참여하게 되었는데, 공은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로 더 높이 제수되어 이듬해(1345년, 충목왕 1년)에 좌정승으로 승진하였다. 나 역시 두 번 승진하여 찬성사로 옮겨서 날마다 공을 모시며 따르게 되었는데, 공이 나에게 말씀하기를 “상주의 객관은 내가 지은 것이네. 그대는 일찍이 본 적이 있을 것이네. 그 일을 삼가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하는데, 그대가 그 일을 알 것일세."라고 하였다. 나는 문학(文學)에 어둡고 서툴러서 성대하고 아름답게 형용하기에 부족하다. 그러나 엄명(嚴命)을 거절하기 어려워 고을 사람에게서 들은 내용을 간략히 기록하여 상주 객관의 동헌(東軒)으로 편지를 보냈다.

註1) 조무유호(稠繆牖戶) : ‘주무유호(綢繆牖戶)’의 오판독.
註2) 정동성랑(東征省郞) :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의 낭관(郎官)’이라는 뜻으로 보이는데, 고려사에 정간공(김영후)께서 이 벼슬을 역임한 기록이 없어 정확히 어떤 관직인지 모르겠다. 다만, 고려사 권124 열전37 배전(裴佺)에 충정왕(재위 1337~1352년) 때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이 이문(理門)이 되었다는 기록과 함께 정간공의 관직이 정동행성의 낭중(郎中)으로 적혀 있다.

 

댓글목록

김용주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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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간공 (휘)영후 에 관한 상주객관중영기 관한글 잘보았읍니다  글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