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30일 도평의공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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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구 작성일11-11-04 22:24 조회2,615회 댓글4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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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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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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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평의사사 (都評議使司)
고려 후기의 최고정무기관으로, 전기에 설치되었던 도병마사(都兵馬使)의 후신이며 도당(都堂)이라고도 한다. 도병마사는 989년(성종 8) 동서북면병마사(東西北面兵馬使)를 설치하고 중앙에서 이들을 지휘하기 위한 판사(判事)를 둔 데서 유래하며, 현종 초를 전후한 시기에 설치되었다.
문종 때 관제가 정비되면서 판사(判事)는 시중(侍中)·평장사(平章事)·참지정사(參知政事)·정당문학(政堂文學)·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중에서 겸하고, 사(使)는 6추밀과 직사(職事) 3품 이상 중에서 겸했다. 부사 6명은 정4품 이상의 경(卿)·감(監)·시랑(侍郞)이 하며, 판관 6명은 소경(少卿;종4품) 이하로 했다. 또 녹사 8명은 갑과권무(甲科權務)로 했다. 이속(吏屬)으로는 기사(記事)가 12명, 기관(記官)이 8명, 서자(書者)가 4명, 산사(算士)가 1명이었다.
도병마사는 판사 이하 판관까지 회의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 양계의 축성 ·둔전 ·군사의 상벌, 국방과 군사문제 등을 주로 담당하고, 때로는 주진민(州鎭民)의 진휼 등 민생문제를 다루기도 하였다.
현종 초에 설치된 도병마사는 무신란 이후 무신들이 집권하면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다가 고종 말 이후 재추(宰樞)의 합좌기관으로 변질되어 종래의 부사와 판관은 없어지고 양부(兩府)의 재추가 모두 모여 국방과 군사문제뿐만 아니라 국사 전반을 의결하는 기관으로 변하였다.
그리하여 원나라의 간섭으로 관제를 격하시킬 때 도병마사도 함께 격하되었다. 1279년(충렬왕 5) 이름을 도평의사사로 바꾸면서 종래 임시관청의 상설기관이 되었으며, 양부의 재추뿐만 아니라 삼사(三司)의 관원과 상의(商議)까지 참여하는 기구로 확대되었다.
특히 고려 말에는 중앙의 관청과 지방의 안렴사(按廉使)에게 하첩(下牒)하고 왕지(王旨)까지도 경유하게 하는 등의 행정 기능도 담당하여 명실상부한 최고정무기관이 되었다. 이러한 행정업무를 담당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관직을 신설 확충하였다. 원래 도평의녹사(都評議錄事)가 사무를 담당하다가 1352년(공민왕 1) 5군녹사(五軍錄事)가 이를 대신했으며, 뒤에는 6색장(六色掌)이 이를 담당하였다.
창왕 때는 6색장을 이 ·예 ·호 ·형 ·병 ·공의 6방녹사(六房錄事)로 개편하고, 지인(知印) 20명을 둘로 나누어 10명은 중앙에 두고, 나머지 10명은 선차(宣差)로 삼아 지방에 보내 탐문하는 임무를 맡겨 중앙과 지방의 행정을 모두 관장하였다.
기능이 강화되면서 회의에 참여하는 인원도 증가하여 창왕 때는 개성부(開城府) ·후덕부(厚德府) ·자혜부(慈惠府)의 판사와 윤(尹:長官)이 참여하고, 뒤에는 예문관의 관원도 참여하여 고려 말에는 70~80명에 이르렀다. 90년(공양왕 2)에는 관제를 정비하면서 상부의 회의기구에는 문하부(門下府) ·삼사(三司) ·밀직사만 판사(判事) ·동판사(同判事) ·겸사(兼事)를 삼고 나머지 상의 및 개성부 ·예문관의 관리는 겸하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하부의 실무기구로서 경력사(經歷司)를 따로 설치하여 6방(房)을 총괄하게 하고, 경력(經歷:3~4품) 1명, 도사(都事:5~6품) 1명을 두었고, 매년의 공거(貢擧)와 잡업(雜業) 가운데 관직이 없는 자를 7~8품의 전리(典吏)로 삼고 서사(書寫)를 맡겼다. 조선 건국 후 관제개편 때에도 최고기관이 되었으나 1400년(정종 2)에 의정부로 개편되었다.
<두산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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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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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평의공 할아버님은 고려봉거 직장(정7품).소경공(종4품).도평의지인등으로 기록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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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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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거서 [奉車署]고려 관청 | 브리태니커 현재 페이지인쇄
sns 내보내기요즘마이피플트위터싸이월드더보기 페이스북 미투데이 고려시대 궁중의 마구 및 말의 사양관리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
목종 때 상승국(尙乘局)으로 처음 설치되었다. 문종 때 관원으로 정6품의 봉어(奉御) 1명과 정7품의 직장(直長) 2명을 두었으며, 이속(吏屬)으로는 서령사(書令史) 4명과 승지(承旨) 2명을 두었다. 1310년(충선왕 2)에 봉거서로 개칭되었으며, 이때 최고직인 봉어도 영(令)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356년(공민왕 5)에는 공민왕이 반원정책(反元政策)을 실시할 때 다시 상승국으로 개칭되었으나, 1362년에 봉거서로 복구했다. 그뒤에도 여러 번 개칭되었다. 1369년 상승국으로, 1372년에 봉거서로 했다가 1391년(공양왕 3)에는 중방(重房)에 병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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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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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良簡公 諱 承澤 設壇墓碑文
부군의 관은 안동이요,호는 大菴, 諱는 承澤이니,고려국 직량동덕좌리공신 삼중대광
금자광록대부 중서시랑평장사 도첨의정승 永昌君 致仕하고 諡는 良簡이시다.
고조는 상서상 우복야공 휘 敏成이요 증조는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금자광록대부
중서령 병부상서공 한림학사 휘 孝印이며, 조는 선충협모 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상락군개국공 첨의령중찬 諡 忠烈公 諱 方慶이고,祖비는 냉평국부인 竹州朴씨이니라.
서기 1580년 宣祖朝에 충렬공을 吾門 안동김씨의 世祖로 創譜하였으니,考2세는 전법판서
상정군 휘 선 이요, 비는 순창군부인 순창설씨이다. 三世 長은 대호군 도첨의사사 제조공
휘 資인바 공의 증손인 밀직부사 휘 精에이르러 내서사인 재당숙 휘 齊顔과 더불어 申頓謀朱死에
괴로역살되니 오안동김씨종가종손은 탈보되어 수안김씨로 이적하고 휘제안공의 후손계는
사천김씨로 각각 분관하니라. 三世 仲은 보문관대제학 시충숙공 휘 승용인바 기후손은
판밀직사사공 휘칠우, 성윤공 휘칠림, 군사공 휘칠양, 공조전서공 휘성목, 밀직부사공 휘천순으로
각각 분파하고 次가 오파계조 양간공 휘승택이며, 季가 상서공 휘승우계인바 장손 현감 휘 윤계는
청주 김씨로 분적하고 차손이 대호군공 휘 유계로 분파하니라. 오조 양간공의 배위는
시 충선공 휘 흔 지녀이니 낭랑국부인 경주 김씨요, 그 조는 추밀원 부사공 휘 경손이요,
증조는 수태보문하시랑평장사 시 문장공 휘 태서이니라.
양간공께서는 충렬왕 대에서부터 충정왕까지 고려 6대왕 100년간의 원몽지속하의 조정이
남으로는 왜구의 침입을 방어해야하고, 북으로는 배원정책과 舊疆회복에 진력하여야 하는
국가 수난기 중의 재상이시었다. 고려 전통 유가에 태어나신 유신으로써 서리 1342년 6월에는
종형제인 상락부원군 시 문숙공 휘 영돈과 복창부원군 시 정간공 휘 영순 그리고 계림부원군
이제현 제공등과 더불어 적신 조적의 구난을 평정하여 이등공신에 훈봉되고, 서기 1352년
충혜왕 8월에는 이재현, 한희유, 안진, 백문보, 정간공 영순 등 제공과 함께 서연을 열어
경일시덕함에 원로대신들과 논차로 입시하야 경사법원을 증강하시었다. 부군께서는 천품이
엄의관후하시고, 자혜애인 하시었으며 박학호문 경청경지하고 법도계리 강유상제 하시었는지라
백성이 권세가의 수탈당한 전답 노비와 적년의 송사와 면체한 옥사등은 공평히 양찰하여 국정을
치적하신 명정승이라 쓴 고려사 세가제38을 써 옮겨준다. 10월에 첨의찬성사의 승서되시고,
공민왕 7년 서기 1358년 7월 태백성이 3개월이나 나타났을 때 서거하시니, 양간공의 후손에는
고려와 조선의 문과 52인 무과 4인이 배출되어 혁혁명문임을 과시하고 있다. 부군의 장자는
숭정대부 중서시랑평장사 상낙군 휘 昴요, 차자는 안렴사공 휘 冕이니, 차계는 도평의사사
소경공 휘 九鼎계로 분파하였다. 오호라! 양간공 승하가 630여년이라. 원래 유택이 개성부
선흥사 북서동이었으나 창상이 이변하고 병난이 중첩되어 후손이 선조의 체혼을 실전한지
오래였었다. 이에 늦게나마 촌마두인의 정성으로 이 곳 취백림 금수단에 설단하고 궐향 점황의
옷깃을 여미며, 국궁 혜배 하오리니 이 어찌 오문의 일대 경행이 아니리요. 언간에 본역
삼위지설단 추진사업에 포천의 별제공 후손 종중의 협찬이 지대하였음을 치사하면서 제종의
위임을 받아 졸문이나마 불사음기로서 찬하노라.
서기 1990년 3월
양간공 22세손 재승 근찬
양간공 22세손 재홍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