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 비가 내려 지난 해 만세교와 백로주를 지날 때 감회를 읊다.
페이지 정보
김상석 작성일11-07-19 15:47 조회1,730회 댓글1건본문
●종일 비가 내려 지난 해 만세교와 백로주를 지날 때 감회를 읊다.
19C, 강 아무개가 성균관을 떠나 금강산 유람을 마치고 그 일정을 고스란히 「금강일기(金岡日記)」에 담았는데 일기를 보면 금강산 가는 길에 백로주를 지나 금수정에 들렀다가, 삼부연 폭포를 거쳐 용화동 고개를 넘어 김화로 향하고 있다.
지금은 삼부연 폭포 위 석굴(石窟)을 통해 용화동으로 접어들 수 있으나 당시는 다른 통로가 있었을지 의문이다. 이후, 저자는 신라 마의태자가 입산하며 머리를 깎았다는 단발령으로 접어들며 금강산 기행을 시작한다.
일기의 저자를 강 아무개라고 칭한 것은 저자의 작품으로 알려진 『금강일기 부 서유록(金岡日記 附 西遊錄)』의 「서유록(西遊錄)」에서 저자가 성을 강(姜)이라고 밝혀 그러한 것이며, 금강산은 신축(1841)년에 벗들과 함께 떠났으며 서유(西遊)는 의주부윤의 도움을 받아 병오(1846)년에 다녀와 기록한다.
위 조선조 기행문이 2005년, 조용호(목포대 교수) 역으로 『19세기 선비의 의주, 금강산 기행』이라는 제목으로 출간이 되었다.
옛사람들의 금강산 기행은 유별날 것이 없으나, 그 길목에 금수정이 있어 도보나 가마 또는 말과 나귀로 이동하는 경로의 초입에 위치한 이유로 금수정엔 많은 석각과 시문이 전한다.
저자가 금강산을 오가며 전하는 기행에서 만세교부터 김화까지의 기사와 서술은 그 지명과 경로 등이 나와 낯설지 않아 몇 자 부기하여본다.
백로주에서 금수정으로 가는 옛길은 지금도 개천을 따라 처연하게 과거와 현재를 잇고 있다. 나는 지금 그 길을 지나고 있다.
여기에 「금강일기(金岡日記)」가 시작되는 하루치 일기의 원문을 그대로 옮겨본다.(원문의 띄어쓰기와 역문은 역자가 옮긴 것을 그대로 따름)
辛丑(1841) 後三月(윤삼월)
二十七日 辛巳 晴 朝茶後 爲觀八景之行 蓋八景者 靑鶴洞 白鷺洲 樂歸亭 金水亭 蒼玉屛 臥龍巖 禾積淵 仙遊潭也 自朴哲(榮)家十五里許 有金水亭 故爲先往觀之 面面奇絶 金水亭懸板與 罇巖石刻 楊蓬萊筆 洞天石門與浮雲壁七字 韓石峯筆也 上下周覽後訪主人 主人安東金漣川家也 其昆季甚醇厚 屢世居此 而瓊島釣臺乃其先祖筆云 又五里許有玉屛書院 卽金文谷 朴思菴 李峒隱 影幀奉安所也 祗謁後還至金水亭村舍中火 仍卽發程 至楡亭十里許 歇宿
○1841년 윤삼월 이십칠일. 신사일. 맑음.
아침식사 후 팔경을 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팔경이라는 것은 청학동, 백로주, 낙귀정, 금수정, 창옥병, 와룡암, 화적연, 선유담을 말한다. 박생원(哲榮)의 집에서 15리쯤 되는 곳에 금수정이 있었기 때문에 우선 거기부터 가서 관광을 했다. 면면이 기이한 절경이었는데, ‘금수정’이라는 현판과 ‘준암(罇巖)’이라는 석각은 양봉래(楊蓬萊 사언)의 필적이었고 ‘통천석문(洞天石門)’과 ‘부운벽(浮雲壁)’은 한석봉(韓石峯 호)의 필적이었다.
위 아래로 두루 관람한 뒤에 묵을 곳을 찾으니, 집주인은 곧 안동 김씨인 김연천(金漣川)의 집이었다. 그 형제는 매우 순박하고 후한 사람들로 여러 대에 걸쳐 이곳에 거주했는데, ‘경도조대(瓊島釣臺)’라는 글씨는 그들 선조의 필적이라고 하였다.
또 5리쯤 되는 곳에 옥병서원(玉屛書院)이 있어서, 김문곡(金文谷 수항), 박사암(朴思菴 순), 이동은(李峒隱 의건)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었다. 가서 배알하고 돌아와 금수정의 촌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곧바로 길을 떠나 유정(楡亭 느릅쟁이)에서 10리쯤 되는 곳에 이르러 묵었다.
--------------------------------------------------------------------------------------
본래 여행은 떠나기 전에 기대와 설렘이 큰 바, 금수정은 오래 전부터 금강산에 이르는 관문으로 우뚝하다. 시인묵객과 벼슬아치들이 드나들며 남긴 시문이 많이 전하는 이유다.
이후 저자는 겸재(1676-1759 정선)와 단원(1745-1809 김홍도)이 형승을 끌어와 미처 화폭에 담지 못한 금강의 모습을 세부적으로 묘사하고 몇 편의 시구를 행장에 넣어, 갔던 길을 되짚어 나와 만세교(萬歲橋)를 지나 본가인 양주 월리(月里)로 향하고 있다.
나는 그 옛길에서 갈 곳이 없어 어찌할 바를 차마 알지 못하다가 선인을 쫓아 광릉내까지 따르기로 하고 만세교를 건너 집으로 왔다.
댓글목록
솔내영환님의 댓글
![]() |
솔내영환 |
---|---|
작성일 |
[집주인은 곧 안동 김씨인 김연천(金漣川)의 집이었다.]
*김연천(金漣川);문온공(김구용) 15대종손 金義友(1771-1858)이다. 김의우는 연천현감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