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경주 김씨(慶州金氏)에 대(對)하여 퍼온글 2

페이지 정보

김정중 작성일11-06-18 15:31 조회2,522회 댓글0건

본문

二十四世

子 安(안)

 

三國史記(삼국사기)에는 父王(부왕)이신 文聖王(문성왕) 九年(9년) 西紀八四七年(서기847년) 王子(왕자)를 太子(태자)로 冊封(책봉)하였다고 하고 十四年(14년) 十一月(11월)에는 王太子(왕태자)께서 돌아가셨다고 記錄(기록)되어 있으나 太子(태자)인 王子(왕자)는 이 어른이 아닌 듯하다. 憲安王(헌안왕)이 王位(왕위) 오르자 伊湌(이찬)에서 首相(수상)인 上大等(상대등)이 되시었다.

 

妃(비) : 元人夫人(원인부인) 朴氏(박씨)

 

陵(능) : 失傳(실전)

 

 

 

二十五世

子 敏恭(민공)

 

 

憲康王(헌강왕) 六年(6년) 西紀八八○年(서기880년) 二月(이월)에 伊湌(이찬)으로서 乂謙(예겸)의 뒤를 이어 侍中(시중)이 되셨다. 시중으로 계실 때는 太平聖代(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을 때인데 西紀八八○年(서기880년) 九月(구월)에 王(왕)께서는 左右群臣(좌우군신)들과 함께 月上樓(월상루)에 오르시어 四方(사방)을 觀望(관망)하셨는데 서울 지금의 慶州(경주)의 民家(민가)가 줄지어 늘어섰고 音樂(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으므로 王(왕)께서 敏恭(민공)께 이르시기를 [내가 들은 건데 지금 百姓(백성)의집 들은 모두 기와로 덮었고 짚으로는 덮지 않는다고 하며 밥을 짓는 데는 숯을 쓰고 나무를 때지 않는다고 하니 사실이냐?]고 묻자 敏恭公(민공공)께서 對答(대답)하여 아뢰기를 “小臣(소신)도 그와 같은 말을 들었사온데 그것은 陛下(폐하)께서 卽位(즉위)하신 以來(이래)로 天地陰陽(천지음양)이 잘 調和(조화)가되고 風雨順調(풍우순조)로와 해마다 豊年(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衣食(의식) 걱정이 豊足(풍족)하고 國境(국경)은 別(별)일이 없으므로 市井(시정)에서는 모두들 기뻐하오니 이는 聖德(성덕)의 所致(소치)이옵니다”라고 하시니 王(왕)은 매우 기뻐하시면서 “이는 실로 卿(경)들의 힘이지 어찌 朕(짐)의 德(덕)이리오”라 하셨다고 한다.

 

 

 

二十六世

子 實虹(실홍)

 

諱(휘) 仁慶(인경) 벼슬은 角干(각간) 또는 舒弗翰(서불한)이시다. 三國史記(삼국사기)孝女知恩(효녀지은)篇(편)에 따르면 孝宗(효종)의 아버님 諱字(휘자)가 仁慶(인경)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實虹(실홍)과 仁慶(인경)은 同一人異名(동일인이명)이다. 敬順大王(경순대왕) 本紀(본기) 및 신도비명(神道碑銘)에 보면 後唐天成(후당천성) 二年(2년) 西紀九二七年(서기927년)에 卽位(즉위)하시어 祖考實虹(조고실홍)은 懿興王(의흥왕)으로 考孝宗(고효종)은 神興王(신흥왕)으로 追尊(추존)하셨다고 記錄(기록)되어 있다.

 

 

 

二十七世

子 孝宗(효종)

 

三國史記(삼국사기)孝女知恩(효녀지은)篇(편)에 依(의)하면 公(공)께서는 少年時節(소년시절)에 花郞(화랑)으로 계실 때 그 무리가 千餘名 (1000여명)에 이르렀고 孝女知恩(효녀지은)을 종으로 샀던 주인에게 그 몸값 십여섬을 변상해주고 지은이로 하여금 奴隸(노예)를 免(면)하게 하여주고 또한 粗(조)백섬과 衣服(의복)을 내리셨다. 이 말을 들은 眞聖女王(진성여왕)께서 그 오빠인 憲康王(헌강왕)의 公主(공주)를 公(공)에게 中媒(중매)하시었다고 한다. 大阿湌(대아찬)으로서 侍中(시중)이 되셨고 뒤에 伊湌(이찬)으로 昇進(승진)하셨다.

 

 

妃(비) : 桂娥(계아)夫人(부인) 金氏(김씨)이니 憲康王(헌강왕)의 따님이시다.

 

 

 

 

二十八世

子 敬順大王(경순대왕)

 

諱(휘) 傳(전) 西紀八九七年(서기897년) 七月(칠월)에 誕生(탄생)하셨고 西紀九二七年(서기927년) 十一月(11월)에 姨從(이종)이신 景哀王(경애왕)의 뒤를 이어 新羅(신라) 第五十六代(제56대) 王位(왕위)에 오르셨다. 第五十一代(제51대) 王(왕)인 眞聖女王(진성여왕)의 失政(실정)으로 盜賊(도적)이 일어나고 나라안이 群雄割據(군웅할거)로 어지럽게 되자 眞聖女王(진성여왕)은 十一年(11년)에 引責(인책)하여 그 庶姪(서질)인 孝恭大王(효공대왕)에게 讓位(양위)하였다. 그러나 孝恭大王(효공대왕)의 代(대)에도 弓裔(궁예)와 甄萱(견훤)의 勢力(세력)이 漸漸(점점)커지기만하고 孝恭大王(효공대왕)은 아드님이 없이 돌아가셨으므로 사람들이 孝恭大王(효공대왕)의 妹夫(매부)이고 新羅(신라) 第八代(제8대)大王(대왕) 阿達羅尼師令(아달라니사령)의 먼 後孫(후손)인 朴景暉(박경휘)를 세워 王(왕)을 삼으니 이가 곧 新羅第五十三代(신라 제53대) 王(왕) 神德王(신덕왕)이요 朴氏(박씨)로서는 七二八年(728년)만에 비로소 王位(왕위)에 오른 셈이다. 이 神德王(신덕왕)이 돌아가시자 큰아드님 景明王(경명왕)이 王位(왕위)에 오르시고 그 뒤를 이어 景明王(경명왕)의 아우 景哀王(경애왕)이 王位(왕위)에 오르시었다. 景哀王(경애왕) 四年(4년) 西紀九二七年(927년) 十一月(11월)에 後百濟(후백제)의 甄萱(견훤)이 新羅王都(신라왕도)를 侵犯(침범) 하였는데 景哀王(경애왕)은 妃(비)嬪族戚(빈족척)을 거느리고 飽石亭(포석정)에서 놀이를 하던 중 이어서 甄萱(견훤)에게 잡히고 말았다. 甄萱(견훤)은 宮中(궁중)을 掠奪(약탈)하고 景哀王(경애왕)을 脅迫(협박)하여 自殺(자살)케 한뒤에 王(왕)의 姨從弟(이종제)인 敬順大王(경순대왕)을 權知國事(권지국사)를 삼고 退去(퇴거)하였다. 이에 敬順大王(경순대왕)은께서 王位(왕위)에 오르신 것이다 西紀九二九年(서기929년) 七月(칠월)에는 甄萱(견훤)이 지금 慶北(경북) 의성을 攻擊(공격) 하였고 十月(10월)에는 聞慶(문경)을 攻擊(공격) 하였으나 擊退(격퇴)되었다. 西紀九三一年(서기931년)敬順大王(경순대왕) 五年(5년) 二月(2월)에는 高麗太祖(고려태조)가 五十餘騎(50여기)를 거느리고 慶州(경주) 大王(대왕)을 拜謁(배알)할 것을 願(원)함으로 大王(대왕)께서는 百官(백관)을 거느리시고 迎接(영접)하여 臨海殿(림해전)에서 잔치를 베푸셨다. 이때 大王(대왕)께서는 “나는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患難(환난)이 일어났고 甄萱(견훤)이 不義(불의)를 姿行(자행)하며 마침내 나라를 侵害(침해)하니 憤痛(분통)함을 말할 수 없다” 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니 周圍(주위)에서 흐느끼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 高麗太祖(고려태조)도 눈물을 흘리면서 慰勞(위로) 하였다. 高麗太祖(고려태조)가 數十日(수십일) 머무른 뒤 돌아갈 때 王(왕)께서는 從弟裕廉(종제유렴)으로 하여금 陪行(배행) 하도록 하셨다. 八月(8월)에는 高麗太祖王建(고려 태조 왕건)이 使臣(사신)을 보내어 錦衫鞍馬(금삼안마)를 바치셨다. 大王六年(대왕6년) 西紀九三二 年(서기932년) 四月(4월)에 唐(당)나라에 使臣(사신)을 보내셨다. 九年(9년) 西紀九三五年(서기935년) 十月(10월)에 이르러 疆土(강토)는 거의 다 남에게 빼앗기어 國勢(국세)는 심히 衰弱(쇠약)하여져서 스스로 나라를 穩全(온전)하게 支撑(지탱)할 수가 없게 되었다. 大王(대왕)께서는 天命(천명)을 깨달으시고 群臣會議(군신회의)를 召集(소집)하여 國策(국책)을 議論(의논)하시었다. 大王(대왕)께서는 나라를 高麗太祖(고려태조)에게 讓渡(양도)할 것을 提議(제의)하자 어떤 이는 “옳다”하고 어떤 이는 “옳지 않다”고 하여 贊反(찬반)이 紛紛(분분)하였다. 特(특)히 太子(태자)이신 諱(휘) 鎰(일)(麻衣太子(마의태자))께서는 “나라의 存亡(존망)은 天命(천명)에 따르는 것이니 마땅이 忠臣義士(충신의사)들과 더불어 民心(민심)을 收拾(수습)하고 스스로 나라를 굳게 지키다가 힘이 다한 然後(연후)에 이를 議論(의논)함이 옳은 일이옵는데 어찌 千年(천년)社稷(사직)을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겠나이까하고 아뢰었다.” 그러나 大王(대왕)께서는 “외롭고 危險(위험)함이 이와 같아 形勢(형세)는 나라를 穩全(온전)하게 保全(보전)할 수가 없는데 無辜(무고)한 百姓(백성)들에게 이 以上(이상) 피를 흘리게 함은 나로서는 차마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하신 뒤에 百姓(백성)을 생각하시는 至極(지극)한 생각에서 侍郞(시랑) 金封休使(김봉휴사)로 國書(국서)를 高麗太祖(고려태조)에게 讓渡(양도)할 뜻을 前(전)하시었다. 이에 太子(태자)는 痛哭(통곡)하면서 王(왕)을 拜別(배별)하고 皆骨山(개골산)現在(현재) 金剛山(금강산)으로 들어가서 바위틈을 집을 삼고 베옷을 입고 草食(초식)으로서 애닮은 一生(일생)을 마치셨다고하여 世上(세상)사람들은 太子(태자)를 麻衣太子(마의태자)라고 불러온다. 그해 十一月(11월)에 高麗太子(고려태자)가 大王(대왕)의 國書(국서)를 받고 大相王鐵 (대상왕철)等(등)을 보내어 이를 迎接(영접)토록 하였다. 大王(대왕)께서는 新羅國都(신라국도)를 떠나 高麗太祖(고려태조)에게 歸附(귀부)하는데 香車寶馬(향차보마)가 三十里(삼십리)를 연이었고 길가의 國民(국민)들은 목메어 痛哭(통곡)하였다고한다. 高麗太祖(고려태조)는 郊外(교외)까지 나가서 大王一行(대왕일행)을 맞이하여 慰勞(위로)하면서 宮(궁)동쪽 甲第(갑제) 훌륭한 邸宅(저택)으로 침소를 정하여 드리고 高麗太祖(고려태조)의 長女(장녀) 柳花夫人(유화부인)인 樂浪公主(낙랑공주)를 大王(대왕)의 後妃(후비)로 삼으셨다. 또 그해 十二月(12월)에는 大王(대왕)께서 高麗太祖(고려태조)에 天德殿(천덕전)에서 臣下(신하)가 되는 儀式(의식)인 庭見禮(정견례)를 드리니 新羅國(신라국)의 建國(건국)한지 九九二年(992년)의 오랜 歷史(역사)는 그 幕(막)을 내리고 千年(천년)社稷(사직)은 끝났다. 高麗太祖(고려태조)는 駙馬(부마)가 되신 敬順大王(경순대왕)에게 政丞公(정승공)을 삼으니 그 位(위)가 太子(태자)보다 윗자리이며 國祿(국록)으로 해마다 쌀 千石(1000석)을 支拂(지불)하고 侍從(시종)하는 사람들을 보내주고 新羅(신라)를 慶州(경주)라 고쳐 부르고 大王(대왕)의 食邑(식읍)으로 定(정)하였다. 처음 大王(대왕)께서 高麗太祖(고려태조)에게로 歸附(귀부)하실 때에 高麗太祖(고려태조)는 크게 기뻐하면서 大王(대왕)에게 두터운 禮(예)로서 待接(대접)하며 使者(사자)를 시켜 大王(대왕)에게 말씀하시기를 “지금 나라를 寡人(과인)에게 넘겨주시니 그 恩惠(은혜)가 크옵니다. 원하옵건데 우리의 宗室(종실)과 婚姻(혼인)을 맺어 영원히 舅甥(구생)의 誼(의)를 맺고자 하옵니다”라고 하니 大王(대왕)께서 대답하시기를 “우리 伯父億廉(백부억염)께서는 知大耶郡事(지대야군사)로 계셨는데 그 따님이 婦德(부덕)이 있고 容貌(용모)가 아름다우니 그로서 內庭(내정)을 갖추심이 좋을까하옵니다”라고 하시어 高麗太祖(고려태조)는 그를 아내로 맞으니 이가 곧 神聖王后(신성왕후) 金氏(김씨)요 神聖王后(신성왕후)의 所生(소생)이 바로 顯宗(현종)임금의 아버지로서 安宗(안종)으로 追尊(추존)되신 분이다. 高麗景宗(고려경종)임금은 大王(대왕)의 公主(공주)를 맞이하여 王妃(왕비)로 삼으니 이가 곧 憲成王后(헌성왕후)이시다. 景宗(경종)은 西紀九七五年 (서기975년) 十月(십월)에 大王(대왕)을 상보(尙父상부) 로 모셨다. 尙父(상부)로 冊封(책봉)하는 景宗(경종)의 誥命(고명)에 이르기를 ��勅(칙)하노니 周(주)나라가 처음 나라를 세웠(啓聖(계성))을 때 먼저 (宮望(궁망))(姜太公(강태공)의 이름은 呂尙(여상)) 을 封(봉)하고 漢(한)나라가 일어났을 때에는 먼저 蕭荷(소하)를 冊封(책봉)하였다. 이로부터온 天下(천하)가 크게 平定(평정)되고 龍圖(용도)王(왕)의 系譜(계보)임))는 二十七代(27대)를 세우고 麟趾(인지)(子孫(자손)임)四百年(400년)을 밟아 日月(일월)이 거듭 밝고 天下(천하)가 길이 交泰(교태)하여 비록 無爲(무위)하여 主(주)로부터 始作(시작)하여 理致(이치)에 通達(통달)한 臣下(신하)에 이르기 까지 그 빛에 모두 順化(순화)되었다. 이제 觀光順化衛國功臣上柱國樂浪國王政丞食邑八千戶金傳(관광순화위국공신상주국락량국왕정승식읍팔천호김전)은 대대로 鷄林(계림)에 살게 하고 벼슬은 王爵(왕작)을 나누어 주거니와 그 英烈(영열)한 氣像은 구름을 누를 만하고 文章(문장)의 才藝(재예)는 땅을 박차고 뛰어 오를만하다. 富(부)는 春秋(춘추)에 넉넉하고 封土(토)에 貴(귀)히 居(거)하니 가슴속에 六蹈三略(육도삼약)(兵書(병서)임)이 들어있고 七縱五甲(칠종오갑)(兵術(병술)임)의 要點(요점)은 손바닥을 가리키듯하다. 우리 太祖(태조)가 처음 陸隣(육린)의 友好(우호)를 닦으며 일찍 餘風(여풍)을 알아 바로 駙馬(부마)(왕의사위임)의 姻諠(인훤)를 베푸시어 안으로 大節(대절)을 갚아주었다. 이로서 집과 나라가 마침내 하나로 돌아가 群臣(군신)이 宛然(완연)히 三韓(삼한)에서 모이고 아름다운 이름이 뚜렷이 퍼지고 懿範(의범)(아름다운 규모의 뜻임)은 높이 빛났다. 그러므로 尙父都省令(상부도성령)의 號(호)를 더하여 주고 아울러 推忠愼義崇德守節功臣(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의 號(호)를 준다. 勳封(훈봉)은 禮(예)와 같으나 앞서의 八千戶(8,000호)를 通算(통산)하여 一萬戶(10,000호)를 食邑(식읍)으로 삼게한다라고 하였다. [西紀九七八年(서기978년) 四月(사월)에 敬順大王(경순대왕)께서 애닮고 恨(한)많은 一生(일생)을 마치시니 享壽(향수)가 八十二歲(82세)이시고 諡號(시호)를 應天撫運之敬(應天撫運之敬)이요 應時率德之順(응시율덕지순)이라하여 [敬順(경순)]이라하였다.

 

陵(릉) : 京畿道(경기도) 漣川郡(연천군) 百鶴面(백학면) 高浪浦里(고랑포리)에 있다.

 

妃(비) : 竹房王后(죽방왕후) 朴氏(박씨)

二男(2남)

 

 

妃(비) : 孝穆王氏(효목왕씨) 樂浪公主(낙랑공주) 뒤에 新鸞公主(신난공주)라 改號(개호)

 

五男(5남)

女(여) 高麗太祖(고려태조)의 第一(제1 첫째) 公主(공주)

 

別妃(별비) : 順興安氏(순흥안씨)

一男(1남)

 

** 子女(자녀) 九男(9남) 三女(3여)를 두셨다.

 

 

 

 

二十九世

子 殷說(은열)

 

高麗太祖(고려태조)의 맏 따님이신 樂浪公主(낙랑공주)께서 낳으신 첫째 아드님으로서 대안군의 봉군을 받으셨고 벼슬이 태자소전을 歷任(역임)하신 後(후) 內史侍郞平章事(내사시랑평장사)에 이르셨고 顯宗(현종) 戊辰(무진) 西紀一○二八年(1028년) 三月(삼월) 四日(사일)에 돌아가시었다. 墓(묘)는 나라에서 葬地(장지)를 下賜(하사)하여 開城郡 嶺南面(영남면) 龍興里(용흥리) 花谷五龍山南麓壬坐(화곡오용산남록임좌)에 모셨다. 李朝正祖八年(이조정조 8년) 西紀一七八四年(서기1784년)에 公(공)의 誌石(지석)이 發見(발견)되어 公(공)의 親族關係(친족관계)가 分明(분명)하여졌다.

 

 

配(배) : 全州李氏(전주이씨) 工部侍郞義興君瞻(공부시랑의흥군첨)의 따님

 

後裔(후예)들은 慶州(경주) 安東(안동) 金寧(김녕) 平海(평해) 水原(수원) 漢南(한남) 遂安(수안) 淸風(청풍) 公州(공주) 龍潭(용담) 上洛(상낙)等(등)을 비롯한 많은 本(본)의 金氏(김씨)로 分派(분파) 되었다.

 

 

경주김씨 계파에 대한 유래

 

경주김씨(慶州金氏)는 대보공 김알지의 후예를 총망라한 신라 김씨의 대종으로 그 파계가 복잡하여 전모를 파악하기가 어려우나 대충 1세조(世祖)를 달리하는 5개 파로 대별되어 있다.

 

그 파계는 경순왕의 셋째아들 김영종(金鳴鍾)을 1세조로 하는 영분공파(永芬公派),

넷째아들 김은열(金殷烈)을 1세조로 하는 대안군파(大安君派),

경순왕의 후예이면서도 중간 세계가 실전되어 김순웅(金順雄)을 1세조로 하는 대장군파(大將軍派),

 

김은열의 후손인 김인관(金仁琯)을 1세조로 하는 태사공파(太師公派),

같은 김은열의 후손인 김장유(金將有)를 1세조로 하는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로 대별된다.

 

경주 김씨 충암공파(沖庵公派)는 판도판서공<장유>파에서 분파가 되었다.

판도판서공파는 감사공파, 공조판서공파, 금제공파, 사인공파, 식암공파, 장암공파, 직장공파, 진사공파, 참교공파, 참의공파, 충암공파 등으로 분파됨

 

경주김씨(慶州金氏)는 신라(新羅) 왕실(王室)의 삼성(三性)(박(朴), 석(昔), 김(金)) 가운데 하나이다.

 

시조(始祖) 김알지(金閼智)의 7세손(世孫)인 미추왕(味鄒王)(신라 13대)에 이르러 비로서 왕위(王位)에 오르게 됨으로서 신라(新羅) 마지막 왕(王)인 경순왕(敬順王, 김알지(金閼智)의 28세손(世孫))에 이르기 까지 38명이 왕위(王位)를 계승(繼承)하였고 935년 경순왕(敬順王)이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그의 아들 9형제 중에 맏아들 김일(마의태자)은 망국(亡國)의 한(恨)을 품고 금강산(金剛山) 입산(入山) 하였다.

 

경주김씨(慶州金氏)는 대보공 알지의 7세손(世孫)이자 김씨로서 첫 왕위(王位)에 오른 미추왕(味鄒王)의 셋째동생 말구(末仇)로부터 갈리었는데, 그 직계에서 왕위에 오른 분이 17대 내물왕(奈勿王), 22대 지증왕(智證王), 38대 원성왕(元聖王), 45대 신무왕(神武王), 46대 문성왕(文聖王), 56대 경순왕(敬順王)으로 신라(新羅) 왕조(王祖)에서 왕위(王位)에 오른 38분의 김씨 왕 중 여섯 왕이 경주김씨(慶州金氏) 계통(系統)이다.

둘째 김굉은 나주김씨,

셋째 김명종은 경주김씨의 영분공파,

넷째 김은열은 경주김씨 은열공파, 김녕김씨, 안동김씨 등

다섯째 김석(錫)은 의성김씨,

여섯째 김건은 강릉김씨,

일곱째 김선은 언양김씨,

여덟째 김추는 삼척김씨,

아홉째 김덕예는 울산김씨 등의 시조가 되었다.

이와 같이 경주김씨는 경순왕의 셋째 김명종과 넷째 김은열로 부터 기원하였다.

그 후 후손들이 번성함에 따라 현달한 인물이나 살고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분관되어 나갔다.

경순대왕은 9남 3녀를 두었다.

 

 

2. 경주김씨(慶州金氏) 계파(系派) 및 분파(分派)

 

- 태사공파(太師公派)

김자수(自粹) : 김인관(仁琯)의 8대손, 좌상시(左常侍)로 있다가 고려가 망하자 자결로써 충절을 지켰고, 그의 8세손이며 조선시대의 황해도 관찰사인 김홍욱(弘郁)의 자손에서 8명의 정승과 1명의 왕비가 나와 은열공파 김명원의 자손과 더불어 경주김씨의 2대명문으로 꼽힌다.

 

분파 -> 전서공파,판관공파,좌랑공파,사승공파,공평공파,우재공파,송재공파로 분파.

 

 

- 대안군파(大安君派)

대안군파(大安君派) 파조인 김은열은 공부시랑(工部侍郞)을 거쳐 대안군에 봉군되고 그의 후손들이 여러 본관으로 분관되었다.

김은열의 8세손 김봉모(金鳳毛)는 외국어에 능하여 사신이 오면 관반사(館伴使 : 외국 사신을 접대하기 위하여 임시로 임명한 정3품 벼슬)로 천거되었으며 나라의 큰일에는 항상 전례(典禮)의 일을 맡아보았다.

김봉모의 아들 김태서(金台瑞)는 고종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고, 특히 그의 아들 김약선(金若先 : 공부시랑), 김기손(金起孫 : 평장사), 김경손(金慶孫 : 추밀원 부사) 3형제가 유명했다.

 

분파 -> 경파,백촌공파,병판공파,부산파,성천파,시랑공파,시중공파,예조판서공파,익화군파,차호공파,참판공파,청원파,평창파,호정공파로 분파.

 

 

-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대장군파 파조 김순웅은 고려 초에 상장군(上將軍)을 거쳐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하였다.

 

분파 -> 감사공파,계림군파,공호공파,동지이판공파,봉산파,부제학공파,연동파,정수공파,춘고공파,판윤공파,현령공파,만호공파,경재공파,망주헌고파로 분파.

 

 

- 영분공파(永芬公派)

영분공파(永芬公派)는 1세조인 김명종(金鳴鍾)이 고려(高麗)에서 경주군(慶州君)으로 봉해 진후 그 후손(後孫)들은 아래와 같이 분파(分派)함,

 

분파 -> 강릉공파, 검교공파, 두계공파, 밀직공파, 병조판서공파, 부사공파, 수은공파, 시어사공파, 옥구참공파, 월성부원군파, 참찬공파, 판삼사사공파, 평장사공파, 현감공파로 분파.

 

 

-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판도판서공파 파조 김장유는 고려(高麗)말(末)에 정국(政局)이 혼란(混亂)하자 충청도(忠淸道) 보은(報恩) 땅에 은둔(隱遁)하여 그곳에서 일생(一生)을 마쳤다.

김장유의 후손에서는 정랑(正郞) 김효정(金孝貞)의 아들인 조선(朝鮮) 중종(中宗) 때의 명신(名臣) 김정(金淨)이 뛰어났다. 그는 조광조(趙光祖)와 더불어 중종(中宗) 때에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실현(實現)을 위하여 혁신(革新)정치(政治)를 시도하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서른여섯 살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世上)을 떠났다. 그에 대한 일화가 "당적보(黨籍譜)"에 다음과 같이 전(傳)한다. 그가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정언(正言)등을 거쳐 순창군수(淳昌郡守)로 나가 있을때 그의 옛 글벗인 승정원(承政院) 승지(承政院承旨) 이항(李沆)이 청탁편지를 부쳐왔다. 그 편지는 직함을 갖추어 쓰고 도장을 찍었으며 우정(友情) 있는 말은 한 마디도 없고 마치 높은 자리서 하명(下命)하는 듯한 글투였다. 이에 김정(金淨)은 거절(拒絶)의 뜻을 밝히고 아래와 같은 시(詩)를 써 넣었다.(중략)

 

분파 -> 감사공파,공조판서공파,금제공파,사인공파,식암공파,장암공파,직장공파,진사공파,참교공파,참의공파,충암공파로 분파.

 

 

3. 집성촌(集姓村)

경북 월성군 안강읍 노당리

경남 진양군 일원

함남 영흥군 억기면 일원

함남 북청군 북청읍 당포리

전북 장수군 계화면 일원

 

 

4. 본관지 연혁(本貫地沿革)

경북 경주(慶州) 

 

충암공파의 파조는,

김  정(金  淨=자 원충, 호 충암, 시호 문간공, 형조판서).

1507년(중종 2) 증광문과에 장원하고, 정언 등을 거쳐 순창군수로 폐비 신씨의 복위를 상소했다가 보은에 유배되었다.

1516년에 풀려나와 뒤에 이조판서 겸 홍문관 제학.대사헌을 지냈다.

그 후 형조판서로서 예문관 제학을 겸임했다.

조광조와 함께 지치주의 실현을 위해 미신 타파, 향약의 전국적 시행을 꾀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1519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가 뒤에 사사되었다.

시문을 비롯하여 그림에도 능했다.

보은의 상현서원, 청주의 신항서원, 순창의 화산서원, 제주의 귤림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충암집><제주풍토록>등이 있다

 

5. 경주김씨 계파

 

태사공파(太師公派)는 전서공파, 판관공파, 좌랑공파, 사승공파, 공평공파, 우재공파, 송재공파로 분파되고,

 

대안군파(大安君派)는 경 파, 백촌공파, 병판공파, 부산파, 성천파, 시랑공파, 시중공파, 예조판서공파, 익화군파, 차호공파, 참판공파, 청원파, 평창파, 호정공파로 분파,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는 계림군파, 공호공파, 동지이판공파, 봉산파, 부제학공파, 연동파, 정수공파, 춘고공파, 판윤공파, 현령공파, 만호공파, 경재공파, 망주헌공파로 분파,

 

영분공파(永芬公派)는 강릉공파, 검교공파, 두계공파, 밀직공파, 병조판서공파, 부사공파, 수은공파, 시어사공파, 옥구참공파, 월성부원군파, 참찬공파, 판삼사사공파 ,평장사공파, 현감공파로 분파,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는 감사공파, 공조판서공파, 금제공파, 사인공파, 식암공파, 장암공파, 직장공파, 진사공파, 참교공파, 참의공파, 충암공파로 분파.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