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의 발길 따라 중국을 가다.-넷째 날 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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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11-03-31 16:45 조회3,035회 댓글6건본문
선조의 발길 따라 중국을 가다.-넷째 날 항주-
[서호 입구의 향단나무]
09:05분 항주 백서국제호텔을 출발하여 30분 거리에 있다는 서호를 향하였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외국인 뿐 아니라 내국인까지 서호를 찾는 사람이 많아 아주 혼잡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서호로 가는 도로변의 가로수는 항주의 나무인 프라타나스이고 가로등은 종 모양으로 중국다운 발상으로 보여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주위 곳곳에는 푸르름을 자랑하는 항주의 나무인 향단나무가 서 있는데 이 나무는 우리나라의 오동나무와 같이 딸을 시집보낼 때 이 나무로 농을 만들어 시집을 보냈다고 하여 일명 '농나무'라 불린다고도 한다.
[서호의 일부]
[백제호와 우측 베방이 소제]
항주[항저우]는 산이 70%, 평원이 20%이고, 10%가 호수와 운하 그리고 강으로 이루어진 지역으로 사람이 살기에 아주 좋은 자연환경을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13세기 세계적인 여행가 마르코 폴로가 이곳을 찾았을 때 항주의 매력을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쑤저우]와 항주가 있다.[上有天堂 下有蘇杭(상유천당 하유소항)]”라고 찬사를 할 만큼 사람 살기 좋고 자연적인 절경지가 많은 곳이다. 그리고 항주에는 북경과 항주를 잇는 1,794㎞의 경항대운하가 건설되어 있는데 이운하는 서기 605년 수나라 양제가 건설하였다고 한다. 경항대운하로 수양제의 전제성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강희제가 거닐었다는 백제 숲]
또한 항주는 중국의 4대 미인인 춘추전국시대 월나라 서시(西施), 한나라 왕소군(王昭君), 삼국시대 초선(貂嬋), 당나라 양귀비(楊貴妃) 등 4대 미인 중 한명인 서시로 대표되는 서호를 중심으로 아름다운 경관이 펼쳐져 있어 소동파(蘇東坡)나 백낙천(白樂天)과 같은 대시인들이 이곳에서 시를 읊었다. 서호의 물을 모두 교체하는 데는 33일이 걸린다고 하고, 서호에는 소동파(1036~1101)가 건설하였다는 제방인 소제가 있다. 소제는 버드나무와 복숭아나무가 줄지어 서있는 3㎞의 제방이다. 서호 안에는 3개의 섬이 있는데 한 섬은 섬 안에는 또 호수가 있으며 호수 가운데는 정자가 있는데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서호 변에는 국민당 정부의 장개석[장쩨스] 총통의 별장이 지금도 남아 있다. 서호 남쪽 산에는 뇌봉탑이 있는데 초기에는 황비탑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탑은 북송 때 오월의 왕이 총애하는 첩 황씨가 득남한 것을 경축하기 위하여 지었다고 한다.
[백제에서 나와 소제와 만나는 입구]
[소제]
[서호 유람선 선착장]
[서호 유람선]
[서호 유람선 뒤로 보이는 뇌봉탑]
[서호의 각종 유람선]
[서호에서 가장 큰 섬]
[서호의 3개의 섬]
[서호 유람선에서 보는 소제]
09:27분 서호에 거의 도착하였을 무렵 모든 차가 좀체 앞으로 진행하지를 못한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서호를 찾은 관광객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서호 인근에서 하차하여 약 5분여를 걸어 청나라 강희제가 유람하고 시도 지었다는 제방, 백제에 도착하였다. 처음에는 이 백제호가 서호인줄 알았으나 이내 이 호수보다 더 큰 호수가 소제 건너편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 규모의 크기가 상상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방에는 연초록 버들잎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우리는 강희제가 이 제방을 거닐며 호수의 경치를 즐겼듯이 사진도 찍어가며 한껏 서호의 경관을 즐겼다. 얼마 걷지 않아 소제와 맞닿은 곳에 도착하였고, 그곳에는 서호 유람선 선착장이 있었다. 안개가 내려 앉아있는 소제에서 바라보는 서호의 규모는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크고 작은 유람선이 떠있고 서호 남쪽에는 앞서 설명한 뇌봉탑이 안개 속에 아련하게 보인다. 우리 일행은 유람선을 타고 확 트인 기분을 안고 서호를 한 바퀴 돌아 관광을 하였다.
[서호의 일부]
[소제 표석과 재영아저씨]
[소동파 석상]
[서호에서 소동파가 되다]
[태자만공원에서 서호로 유입되는 물]
버스로 이동하는 좌측에는 태자만공원이 있는데 이 태자만공원으로부터 상당한 수량의 물이 서호로 흘러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한 쌍의 중국 젊은이의 결혼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팀을 만나 한 컷 카메라에 담아보았다.
[천왕전]
[문영공 김순 할아버지와 한마음이 되다]
[대웅보전]
11:20분 서호를 돌아본 우리 일행은 우리의 다음 목적지인 혜인고려사를 찾았다. 혜인고려사는 서호에서 10분이내의 거리에 있는데 중국에서는 그리 큰 절도 아니고 잘 알려진 절도 아니어서 찾는 이들이 그리 많지는 않다고 한다. 오히려 서호에서 2㎞ 거리에 있는 중국 선종 10대 고찰 중의 하나인 영은사[링인쓰]를 많이 찾는다고 한다.
[윤장전]
[화엄경각]
혜인고려사는 5대 오월(吳越) 국왕 전류가 세웠으며, 원래 이름은 혜인선원이었다. 복송시기 고려 왕자 대각국사 의천(義天) 스님께서 구법을 위해 머무셨고, 정원법사와 대론이후 다시 고려에 귀국하여 혜인선원 중창 복원비로 보낸 황금으로 절을 증축하고 함께 보낸 화엄경을 모심으로써 이름을 교원으로 바꾸었으며 사람들은 그때부터 고려사라 부르기 시작했다. 혜인고려사는 양국의 불교문화교류사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학자여귀]
[(좌)혜인]
[자장율사]
[왕오천축국전을 지은 혜초]
[보우선사]
2007년 5월 1일에 다시 복원된 혜인고려사는 종교 문화적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관광명소로서 전통적인 불교 사원의 배치를 그대로 따르면서 종교박물관과 불교 사원의 특색을 잘 융합하여 문화사원으로서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이를 통해 혜인고려사 문화교류 부분의 역사적 연원을 계승하여 분명하게 밝히고, 당송 시기 중국 불교 사원의 분위기와 예술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혜인고려사는 크게 두 가지 주제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불교역사의 복원 및 한·중 불교문화교류이다.
[대각]
[대각국사 의천]
혜인고려사의 공간 배치는 세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심축에는 천왕전, 대웅전, 윤장전, 화엄경각이 위치하며 중국 전통의 불교문화를 보여준다. 북쪽 축선에는 불교문화교류전시실, 방장실, 선방이 위치하며 혜인고려사 불교문화교류의 역사적 연원을 밝히고 있다. 남쪽 축선에는 운영에 필요한 부대시설이 위치하고 있다.
[애기고적]
혜인고려사의 건축양식은 확실히 중국식 건축양식과는 달리 한국식 건축양식으로 복원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처음에는 중국 건축양식이었는데 복원과정에서 절강성 정부가 한국과의 관계를 감안해서 한국식으로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남들이 잘 찾지 않는 이 혜인고려사에 대해 관심을 갖고 답사까지 하게 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고려 말의 한 재력가가 이곳에 부모를 위해 불경을 안치한 사실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원관(元瓘)이다. 그는 충선왕 때 재상으로 왕의 신임이 깊었는데, 일찍이 대장경 1부를 만들어 중국 절강성 영파 남쪽 사명산에 있는 천동선사에 봉안하였고, 충선왕 2년(1310)에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다시 한 부를 더 만들어 대각국사 의천과 인연이 있는 항주의 고려사에 봉안하고 토지와 노비 등을 기증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비석으로 만들어 세웠는데, 글은 당시의 문장가인 민지(閔漬)가 짓고, 글씨는 원관의 사돈(충숙공 김승용의 장인이 원관이다.)인 김순(金恂, 1258~1321 : 김방경의 셋째 아들)이 써서 고려사에 세웠다. 이러한 사실이 우리 안동김씨 집안에 그 비문이 전해오고 있다.
그리고 조선 성종대의 문신 최부(崔溥, 1454~1504)가 제주에서 풍랑을 만나 중국으로 표류하였다가 돌아와 지은 「표해록」에 이 비석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500년대 까지 이 비석이 존재하였다고 보여지나, 현재 이 비석은 없는 것으로 확인되는데 사찰은 태평천국의 난 때, 비석은 마오쩌뚱[모택동]의 문화혁명 때 없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홍니]
[홍니]
약 1시간동안 혜인고려사 곳곳을 샅샅이 살펴본 우리 일행은 12:15분 점심식사 장소인 홍니라는 음식점에 도착하여 약 1시간여에 걸쳐 맛있는 점심식사를 하고 13:33분 이곳에서 10분 거리에 있다는 항주 대한민국임시청부 청사를 탐방하기 위하여 출발하여 13:40분 항주 임정청사기념관에 도착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저우구지 기념관]
항주 임정청사기념관에서는 비디오를 통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고난의 역사를 관람하였다.
[백범 김구 선생님의 고난극복을 생각하다]
한국독립운동은 세계 민족해방운동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찾이하고 있다. 20세기 초, 한국인들은 일본 제국주의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 한반도와 중국의 동북지역및 구소련의 원동지역을 중심으로 세계 각지에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수립된 후 줄곧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진행하였고 그동안 중국 정부와 인민들의 유력한 지원을 받으면서 함께 어깨를 걸고 싸웠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홍구)공원의 의거를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저장성으로 이동하였다. 김구와 그의 동지들은 일제의 추적을 피해 항저우[항주], 자싱[가흥], 하이얜[해염] 등지로 이동하면서 가장 어렵고 힘든 항일 투쟁의 시기를 보냈다.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도 저장 인민들의 협조로 자싱의 남호에서의 회의를 개최하는 등 임시정부를 유지하고 항일 역량을 보존하여 세계 반파시즘 진영의 주목받는 항일역량으로 발전하였다.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등지로 이동하였고 1940년에는 충징[중경]에 도착하였다. 역사적으로 “역경의 이동시기”라 불리우는 8년 중 저장시기는 5년(1932.4~19376.4)으로 한국독립운동사상 중요한 위치를 찾이한다.
[김구 선생 동상]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저우구지기념관은 항주시청은 관연 부분의 비준을 거쳐 2002년에 복원작업에 착수하였다. 저장대학교 건축설계원에서 재건 설계를, 호수변지역상업무역여행특색지역건설정리지휘부에서 시공을, 저장대학교 한국연구소에서 전시작업을 맡았다. 그리고 전시자료 등 면에서 대한민국 독립기념관의 적극적인 지지와 협조를 받았다.
[동방문화원 황금불상전에서]
우리는 다시 14:22분 항주 임정청사기념관을 출발하여 동방문화원으로 향하였다. 가는 도중 동방문화원은 혜인고려사와 같은 절이기 때문에 우리 일행에게 별 의미가 없으니 다른 대안이 없나하는 논의가 있었으나 여행사측의 스케줄이라는 이유로 처음 계획했던 대로 동방문화원을 들리기로 하였다. 동방문화원의 이야기는 이미지 사진으로 대체한다.
[한라원]
[항주 백서국제호텔]
16:40분 동방문화원 구경을 마치고 17:20 석식장소인 한라원에 도착하여 저녘을 먹은 후 17:57분 출발하여 우리의 2박 숙소인 항주 백서국제호텔로 돌아왔다. 내일 모닝콜은 07:00시 출발시간은 09:00시다.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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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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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기막힌 중국여행기 잘 읽고 있습니다. 항주의 서호, 밧데리로 움직이는 배, 소동파의 온기가 남아 있는 곳, 혜인고려사 탐방, 아무 것도 찾지 못했어도 확인한 것만 해도 엄청난 수확,
님의 멋진 후기 덕에 하루가 갑니다.
김영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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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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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이어지고 있는 선조의 발자취 답사 후기 잘 보고있습니다
西湖의 十景으로
소제춘효 단교잔설 평호추월 화항관어 남병만경 뇌봉석조 유랑만앵 삼담인월 쌍봉십운 곡원풍하 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아는만큼 보인다 했둣이 예습을 못하여 명성만큼의 감흥은 느끼지 못하였지만 복습으로나마 되새겨보며 아울러 후행하시는 분들의 예습의 화두로 권해드리고자합니다
김영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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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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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후기 글 내용의 시간과 사진의 시간에 1시간의 시차가 의문이었는데 내용은 현지 시간이며 카메라의 시간은 한국 시간임을 알았습니다 ㅎㅎ
김재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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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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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선조의 발길따라 중국을 가다' -- 너무 잘 보고 알차고 멋진 기행문 잘 읽고 있습니다. 특히 문온공할아버지의 유배지의 행장 한시로만 접하다가 이렇게 답사차원에서 만나니 너무 짠한게 가슴 깊은 곳에서 감동이 밀려옵니다..아직은 여건이 허락하지 못해 함께하지 못하여 아쉽고 너무 부럽습니다. 아무쪼록 모두들 즐겁게 일정을 보내시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시길 기원합니다. - 대구에서 -
김상대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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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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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저는 주로 회원님들의 인물 스냅위주로 사진을 찍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초상권과도 연계될 수도 있고 해서 webhard.co.kr에 올렸습니다. 그저 위트로만 볼 사진들이 많은지라 open하기는 곤란할 것 같아서 당사자들이 방문하시어 다운로드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단체사진은 윤만 이사님께서 너무도 리얼하고 근사하게 올리신바 거듭 찬사를 드리는바 입니다.
김윤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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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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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아닙니다. 단체 사진은 제가 찍은 것이 아니고 상대 감사님의 사진을 옮겨 놓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