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의 발길 따라 중국을 가다. 셋째 날-가흥·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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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11-03-29 22:04 조회2,435회 댓글2건본문
선조의 발길 따라 중국을 가다. 셋째 날-가흥·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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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시각에 잠자리에 들었지만 늘 일어나는 습관대로 5시에 잠에서 깼다. 세수하고 녹차 한 잔 앞에 놓고 담배도 한 대 피워 물고서 여행 중의 여유로움을 한껏 누린다. 세상만사 다 잊고 오직 여행의 즐거움에 빠져드는 것 이것이 바로 여행의 주는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아침식사는 6:30분부터 할 수 있다고 하여 빨리 식사를 마치고 주위를 둘러볼 요량이다. 음식은 중국 현지식 뷔페 위주로 준비되어 있는데 특별히 오늘 식단에는 매운 맛 김치가 제공되었다. 김치로 느끼한 음식을 싸서 먹으니 그 또한 별미다. 오늘 답사여행 일정은 가흥과 항주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의 설명이 이어진다. 중국에는 주점, 빈관이라고 하는 호텔이 있고, 그 아래로 초대소, 그 아래로 여관이 있고 반점은 음식점이라는 설명이다. 그리고 차량 번호판을 읽는 방법을 설명해 준다. 설명을 잘 듣지 못했으나 맨 앞에 절강성이면 ‘절’ 호북성이면 ‘호’자를 붙이고서 번호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좋은 번호판은 돈을 주고 사야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 60년대에 백색전화를 사고 팔았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21세기 중국에서 아직도 좋은 번호를 사고판다는 사실이 놀랍다.
[가흥 임정요인 주소지]
09:50분 가흥으로 가는 길에는 비가 제법 내린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도로는 시원하게 뚫려있고 버드나무와 가로수의 녹색 빛이 더없이 싱그럽다. 10:20분 가흥에 도착하였다. 가흥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핵심요인들의 주소지가 있고, 상해 훙커우공원[홍구공원, 현 루쉰공원]에서의 윤봉길 의사 도시락 폭탄 투척사건이 있은 연후 백범 김구선생이 일경의 눈을 피해 은신해 계시던 피난처가 있는 곳이다.
[김구선생 모친 곽낙원여사 침실]
[가흥 김구선생 피난처]
‘가흥 김구 피난처, 한국 임정요인 주소지’ 책자에 소개된 내용을 그대로 옮겨 본다.
절강성 가흥시 매만가 76호는 한국 독립운동지도자 김구선생이 피난했던 곳이고, 일휘교는 한국 임시정부 핵심요인 및 가족들의 주소지이다. 1932년 4월 29일 김구선생은 혼자서 국내외를 놀라게 한 상하이 훙커우공원[현 루쉰공원] 폭발안을 획책하여 만들고 일본 요인들을 즉사 시켰다. 폭발사건 발생 후 일본은 한국이 중국에서 전개된 독립운동 조직과 인사들에 대해 미친 듯이 보복을 실행하고 현상금 60만원을 걸어 김구선생을 잡으려고 하였다. 한국 독립운동이 최 침체상태, 김구선생이 제일 곤란한 위급 고비에 빠져있는 시기에 동맹회 원로, 상하이 항일구원회 회장, 상하이 법과대학 총장, 본관은 가흥인 저명 사회활동가 저보성(褚輔成)선생은 개인과 가족들의 생명 위험을 무릅쓰고 김구선생과 기타 임시정부 핵심요인 및 가족을 엄호하여 상하이로부터 가흥에 옮겨 피난시키기로 하였다. 전후 4년 동안에 위험을 여러 번 겪으면서 여러 곳을 거쳐 마지막 위험한 지경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김구선생 흉상]
김구선생은 가흥에 와 거처하는 동안 한국독립운동 속의 기본적 문제에 대해 한걸음 더 높이 인식하게 되었다. 김구선생은 가흥에 도착하기 전 수십 년 동안에 매우 간고한 환경 속에서 국가독립운동을 위하여 일본 침략자들에 반항해 왔다. 가흥에 도착한 후 온건한 생활을 보내고 있어 이전 수십 년 동안에 걸친 항일 독립운동 실천에 대해 더욱 전면적인 회고와 심각한 사고를 하였다.
그는 항일 독립운동이 한국의 실제적 형편에서 출발하여 한국의 각 항일 당파 및 단체들은 반드시 단결함으로써 적들과 투쟁하고 민중들을 조직하여야 하고 훈련경험이 있는 군대를 건립해야 한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또 일본 제국주의가 중·한 두 나라 인민의 공동적 적이고 따라서 한·중 두 나라 인민은 한결같이 단결해야 일본침략자를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김구선생 침실의 비상탈출구]
김구선생은 중국에서 모두 26년 동안이나 있었고 가흥에 있는 시간이 바로 1932년 5월~1936년 2월, 임시정부가 남경에 옮기기 전까지 실제 거처시간은 전후 약 2년 동안 밖에 안 되었다. 시간이 오래지 않지만 김구선생의 일생 및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깊은 의미는 극히 중요한 역사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김구선생이 겪던 제일 곤란한 시기는 가흥에서 보내었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그가 임시정부 속에서 지도자 지위를 세웠다. 상하이 훙커우공원 폭발안 후 김구의 명성이 대대적으로 높이게 되고 국내외에 이름이 알려진 민족영웅이 되었다. 1932년~1936년, 임시정부는 선후 항주, 진강 등지에 옮기게 되었지만 핵심지는 여전히 가흥에 위치하여 있고 임시정부의 실제적 지도자는 바로 김구선생이였다. 김구선생은 가흥에서 피난하는 동안 수많은 한국의 임시정부 핵심요인, 예를 들면 이동령, 박찬익, 엄항섭, 김의환 등 및 부분적 가족들도 가흥에 거처하였다. 늘 같이 모여 함께 활동을 논의밖에 김구는 박찬익, 엄항섭 등을 통해 외교와 정보 수집 작업도 종사하였다.
[김구선생 침실]
1936년 10월 한국임시의정원의 16명 의원은 가흥 남호 유람선에서 한번의 회의와 특별회의를 개최하고 김구는 국무위원에 당선되어 임시정부 사상 제13차 정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이번 회의는 임시정부 속에서 김구선생의 실제적 지도자 지위가 확보되고 여러 차례 마비, 분산 지경에 빠졌던 한국 임시정부는 또다시 응집되어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국내외에 일정적 영향을 미쳐 한국 독립운동 중에서 중요한 역량으로 성장되었다. 그로부터 한국 독립운동은 김구 및 임시정부에서 인솔하에 국가독립, 민족 자유를 찾아 불요불급, 끊임없이 나아가 마지막 승리까지 견디었다. 가흥에 있는 몇 년간 한국 독립운동은 역량을 적축함으로써 제일 낮은 형편에서 걸어나와 다시한번 번창하게 된 관건한 시기라고 할 수 있으며 여기에서 한국 임시정부의 주요 지도자 및 핵심요인을 보존하게 되어 한국 독림운동사상에서 불가결한 중요한 축으로 되었다. 김구 및 한국 임시정부 핵심요인 피난처는 바로 간고한 세월 시기에 중·한 두 나라 인민이 일본침략자를 공동적으로 반항하기 위하여 매우 깊은 우정을 맺어준 실물적 예증이다.
[김구피난처 뒤 서남호와 배 : 유사시 비상탈출한 김구선생은 배를 타고 서남호를 빠져나갈 것이다]
김구선생과 가흥 인민사이에 특별히 친밀한 관계가 맺어졌다. 김구는 가흥에 있는 시기에 가흥인민의 항일 열정을 친히 보이고 저씨(褚氏), 진씨(陳氏) 가족 및 주애보(朱愛寶)여사, 손영보(孫永寶)선생 등 생명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엄호하고 빈틈없이 보살펴 준 것에 대해 깊은 감동을 받았다. 여러 정경은 그의 마음속에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겼다. 10여년 후 김구는 그의 회고록-[백범일지]에서 저보성 며느리가 하이힐을 신고 햇살이 쨍쨍 내리쬔 날에 그를 데리고 산넘고 재를 넘는 정경에 대해 ‘만약 국가가 독립되면 나의 자손이나 나의 겨레는 누가 저부인의 이러한 성의와 친절로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엄가병에 거처하는 동안 마을의 손영보와 뜨거운 우정을 건립하고 내가 거기에 갈 때마다 손영보 집에 거주하고 그때 나는 완전히 시골노인이 되었다.’고 이렇게 쓰여 있었다. 그는 5년동안이나 자기를 엄호하고 보살펴 준 주애보(朱愛寶)여사에 대해 ‘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와 부부와 비슷한 감정이 생겼으며 그의 보살핌은 정말 공로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나는 재회할 기회가 또 있다고 생각하면서 찻삯밖에 다른 돈을 주지 않았어. 정말 서운하다.’고 말하였다. 글 줄마다 가흥 인민에 대한 가득찬 감격과 친절한 감정을 나타냈다.
[저보성선생 흉상]
김구선생피난처, 한국 임시정부 요인 및 가족들의 주소지는 가흥시 남문 매만가(梅灣街) 76호와 일휘교(日暉橋) 17호에 각각 자리잡고 있다. 김구선생 피난처는 진동생(陳桐生)선생의 낡은 택이고 모두 2층 목조건물로 세칸짜리 집 세채이고, 남북방향, 민국 초년에 건립된 것이다. 부지는 223.5㎡, 건축면적 226㎡이다. 이 건물은 앞쪽 매만가와 다깝고 뒤쪽 서남호와 인접한다. 그중 제 세칸은 김구선생 당시 피신할 때의 거처이고 아직까지 비밀통로, 욕조 등 물품을 보존하여 있다. 일휘교 17호에 있는 임정요인의 주소는 만청 정원식 네칸짜리 집 네채 2층 건물로 부지는 171㎡이고 건축면적은 259㎡이다. 두 개의 낡은 택은 김구선생의 차자 김신장군의 여러 번의 고찰을 거쳐 확인 후 가흥시 정부는 높이 중시하고 1996년 5월 가흥시 정부는 특별비용을 지출하여 국부에 대해 수정하였다. 원래 상태를 회복시켜 전시를 배치하여 김구선생 및 한국 임정요인이 그 당시 가흥에서 피신할 때의 활동상황을 전시하므로서 한국 친구들의 참관과 방문을 접대하기로 하였다.
이 대목에서 우리 선안동김씨 문중의 큰 어른이시고 대한민국 현대사의 주역이신 백범 김구선생의 좌우명으로 유명한 서산대사 휴정의 시 답설(踏雪)을 소개해 본다.
[踏雪(답설)]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답설야중거 불수호난행) /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말지어다.
今日我行蹟 遂作後人程(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 /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 . . .
[동파육과 거지닭으로 유명한 운죽]
가흥에서 김구선생 관련 유적지 두 곳을 답사하고 다시 항주로 이동한다. 항주는 그 옛날 송나라 수도였으며 현재는 절강성[저장성]의 성도로 면적은 서울의 여섯배나 되나 인구는 절반밖에 안된다고 한다. 그리고 항주는 중국 6대 고도(古都) 중의 하나이다. 6대 고도는 협서성[산시성] 성도인 서안[시안], 중국 수도 북경[베이징], 하남성[허난성]의 낙양[뤄양], 강소성[장쑤성] 성도 남경[난징], 하남성의 개봉[카이펑], 절강성 성도 항주 이렇게 여섯 도시를 말한다. 길가의 가로수는 상록수로 키가 낮았다. 그리고 항주로 가는 길에도 산이 없다. 고속도로도 왕복 6차선인데 차가 별로 없어 모든 차량이 시원스레 잘 달린다. 12:00시 황학산 터널에 도착하고서야 산다운 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항주는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도시라고 한다. 이제 비는 그쳤으나 강과 호수로 이루어진 물의 도시답게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다. 12:05분 인터체인지를 통과하였는데 가이드에 따르면 항주 시내를 통과하려면 교통 체증이 심하므로 우회하여 시간을 단축시켰다고 한다. 15분여가 지난 후 부터는 산비탈이 온통 차밭이다. 12:24분 항주 톨게이트를 나와 편도 1차선 좁은 길을 달린다. 12:40분 점식식사 장소인 운죽[윈두] 식당에 도착하였다. 점심은 송나라 시인 소동파(蘇東坡)가 즐겨 먹었다는 동파육과 청나라 강희제가 즐겨 먹었다는 거지닭이다. 동파육은 돼지고기로 중국식 수육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소스를 얹어 먹는 고기가 굉장히 연하고 부드러웠다. 거지닭은 닭의 털을 뽑고 황토진흙을 발라 땅에 묻어 두었다가 일정시간이 지난 후 꺼내어 구워먹는 중국식 진흙구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요리는 항주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이름이 높기 때문에 항주를 여행하는 여행자들에게는 이 집이 필수코스라고 한다. 중국 현지식들이 대체로 짜고 향이 나는데 중국인들은 짠맛과 향신료를 좋아하는 것 같다.
[육화탑]
항주에도 항주를 가로지르는 강이 있는데 첸탕강[전당강]이라고 한다. 전당강은 상해의 양쯔강(장강)이나 북경의 황하에 비할 바는 아니나 안휘성[안후이성] 황산에서 발원하여 장장 600㎞를 흐르는 큰 강이다. 항주를 대표하는 탑이 육화탑인데 겉에서 보면 13층이나 실제로는 7층으로 높이가 59.89m이다.
[전당강대교]
육화탑은 970년 전당강의 범람을 막기 위한 기원을 하기 위해서 세운 탑으로 전당강을 비롯한 전당강대교 등 절강성 제일의 경치를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50분 동안 육화탑을 관람한 후 14:50분 항주의 명물 송성가무쇼를 관람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항주 송성 : 천년전 송나라 수도 항주를 재현함]
[송성가무쇼 관람]
[송성가무쇼 단원 : 용정차 소개장면]
송성가무쇼는 송나라로부터 중국 천년의 역사를 재현한 쇼로 상해 써커스와 함께 중국을 대표하는 쇼이며 사람들은 세계 3대 쇼라고 한다. 공연시간은 약 1시간 20분 동안 진행된다. 송성가무쇼는 상대(문)님이 찍은 별도의 이미지 사진으로 대신한다.
[도원거족욕]
송성가무쇼를 관람한 후 16:30분 3분거리에 있는 발마사지 샵인 ‘도원거족욕’에 도착하였다. 발마사지는 말이 마사지지 고문에 가깝다. 지금도 아픈 것 같다.
[용정차 집]
17:29분 기억하고 싶지 않은 발마사지 샵을 출발하여 17:33분 국차로 유명한 용정차집에 도착하였다. 가격은 용정차 30,000원, 야국차 20,000원, 위탁판매하는 보이차가 60,000원이란다. 물론 2개, 3개를 더 사면 그에 걸맞는 덤이 따른다.
18:16분 용정차집을 출발하여 18:25분 저녁식사 장소인 개인빌라 한정식 집에 도착하였다. 중국 여행을 시작한지 처음 삼겹살에 소주를 겸한 한정식이다.
[오산 성황각]
[청하방]
[청하방 옛거리]
저녘식사 후 20:10분 오산 성황각에 도착하여 야간 관광을 한 후 10분 거리에 있는 청화방 옛거리를 관광하였다. 서울로 치면 인사동과 비교될 것 같다. 21:35분 하루 종일 강행군을 한 끝이라 피곤한 몸을 버스에 싣고 22:15분 우리의 숙소인 항주 백서국제호텔에 도착하여 여권을 체크한 후 여장을 풀었다. 내일 모닝콜은 07:00시, 출발은 09:00시이다.
[브라임 인터내셔널호텔]
댓글목록
김정중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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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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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대부님 긴 여행후 바쁘실텐데 이렇게 후기를 말끔히 올려주시니 놀랍습니다~!!
열정~ 열쩡 ~!! 화이팅
김상대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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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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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역시 대단하십니다. 저는 오늘에도 정리조차 못하고 있습니다만 열성에 감복했습니다. 앞으로 많이 노력하고 배워야하겠습니다. 살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