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님의 발자취를 따라 중국 답사여행(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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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11-03-09 10:15 조회2,101회 댓글3건본문
2년동안 준비하였던 중국 답사여행이 3/17-3/22일까지 5박 6일간 진행합니다.
그동안 성원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말씀 올립니다.
준비한 자료를 공개하여 차후 이와 비슷한 답사여행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하여 연재합니다.
선조님의 발자취를 따라 중국 답사여행
2011. 3,17-3,22(5박6일)
文英公(金 恂); 高麗惠因寺(杭州)
文溫公(惕若齋 金九容) ; 黃鶴樓 荊州 三峽
白凡(金 九); 上海 嘉興 杭州
안동김씨사이버학술연구회
여행사 (주)대아여행사 02-514-6226 강남구 신사동 501-2
담당자; 최유리 주임 (휴대전화 010-2644-2225 )
김영국외 19명(인솔자 포함 총 21명)
3/17(목) 인천공항 3층 A 카운터 앞 집결 인솔자 : 최유리 010-2644-2225
인천 출발KE881(09;15) / 무한 도착(11;25) 공항미팅 후 중식
황학루 광광 후 / 의창이동 (4시간 30분정도 소요)
석식 후 호텔 투숙 영가호텔(0717-673-666) 투숙
3/18(금) 호텔 조식 후 현재 세계적으로 젤 큰 땜공사 (삼협땜탐방)
무한 귀환중 형주경유 형주고성 관광 /무한귀환 / 공항으로 이동
무한CZ6245 출발(20;40) / 상해 도착(22;05)
호텔 (데일리호텔 021-6478-5678)투숙
3/19(토)호텔 조식 후 / 가흥으로 이동 (1시간30분정도)가흥임시정부,
김구선생피난처 관광 항주로 이동 (1시간30분정도) 호텔 백서국제호텔( 0571-2802-6666)투숙
3/20(일) 호텔 조식 후/서호유람선, 항주임시정부, 혜인고려사
육화탑 관광 용정차농원 호텔 투숙 백서국제호텔 0571-2802-6666
3/21(월) 호텔 조식 후 오산성황각, 청하방옛거리, 동방문화원 관광
중식후 상해로 이동 (3시간정도)남경로 관광 석식 후 외탄관광 / 서커스 관람
호텔 투숙-데일리호텔 021-6478-5678
3/22(화) 호텔 조식 홍구공원 임시정부청사 신천지관광
중식 후 포동공항으로 이동 KE898상해포동출발(14;00)
인천도착(16:55)
무창(武昌)
黃鶴樓前水湧派.황학루전수용파/ 황학루 앞에는 강의 물결 솟구치는데
沿江簾幕幾千家.연강렴막기천가/ 강가에는 주렴과 장막 몇 천 집인가
醵錢沽酒開懷抱.갹전고주개회포/ 돈을 추렴하여 술을 사서 회포를 푸노니
大別山靑日已斜 .대별산청일이사/ 대별산은 푸른데 해는 이미 기울었네
*이 시는 김구용의 流配詩 가운데 빈번하게 후대 시인들의 입에 회자되었던 작품 중의 하나이다. 황학루는 중국의 호북성 무창현에 위치한 누각으로서 수 많은 시인 묵객들이 시를 짓고 즐기던 장소이기도 하다. 起句에서 황학루 앞에 넘실대는 물결을 눈에 보이는대로 제시한 다음, 承句에서는 그 주변 강가에 있는 수많은 집들을 그렸다. 轉句에서는 비록 유배길이기는 하지만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돈을 거두어 술을 사는 정황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황학루에 전해 오는 전설을 뒤집어서 본 모습이다. 돈없이 공짜 술을 반년 동안 마신 어떤 사람이 술값 대신 그려준 黃鶴이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게 되고, 후에 그 학을 타고 날아갔다는 것을 기념해 지은 것이 황학루라는 전설과는 달리 돈을 갹출해 술을 사 마시면서 회포를 풀 수 밖에 없는 상황을 관념적으로 생각해 왔던 황학루와는 달리 시인의 구체적인 현실이었던 것이다. 結句에서는 大別山에 해가 저물었음을 말하고 있다. 大別山은 중국 北嶺山系에 속하는 산맥의 이름으로 실재하는 산이지만, ‘大別’이라는 그 이름에서 오는 스산한 분위기와 저문 해는 시인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 후대의 사람들은 이 시를 자주 거론하였던 것이다. -성범중의 책 124P에서--
*黃鶴樓는 중국 湖北省 武昌縣 黃鵠磯(황곡기)위에 있는 누각이다. 옛날 江夏郡의 辛씨가 술을 파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어떤 선생이 왔는데, 키가 크고 옷이남루했다. 조용히 신씨에게 말하기를 “나에게 술을 줄 수 있는가?” 하니, 신씨는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큰 잔에 술을 부어 주니 그것을 마셨다. 이렇게 반 년 동안을 지내 왔으나 신씨는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하루는 선생이 신씨에게 “술값 빚을 많이 졌는데 갚을 길이 없다.”고 하고는 마침내 조그마한 藍橘皮(남귤피)로 학을 벽에 그리고 황색 칠을 하였다. 그리고 나서 앉은 사람이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르면 黃鶴이 음절에 맞추어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돈을 내고 술을 마시며 구경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십 년을 지내고 나니 신씨는 큰 부자가 되었다. 그런 뒤에 선생이 갑자기 나타났다. 신씨가 고마워하면서 “무엇이든지 선생이 원하는 것을 드리고 싶다.”고 하니 선생은 웃으면서 “내가 어찌 이것을 위해서 한 일이겠는가.” 하고는 당장 피리를 몇 곡조 불자 금방 흰 구름이 공중에서 내려오고 그림 속의 학이 선생 앞으로 날아왔다. 그러자 선생은 학의 등에 앉아 구름을 타고 날아갔다. 그리하여 신씨는 이곳에 누각을 짓고 黃鶴樓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黃鶴樓 (황학루) 최호(崔灝=당나라때 시인)
昔人已乘黃鶴去 석인이승황학거 /옛사람은 이미 황학을 타고 떠났는데
此地空餘黃鶴樓 차지공여황학루 /이땅에는 황학루만 덩그러이 남았네
黃鶴一去不復返 황학일거불부반 /황학이 한번가고 다시 오지 않으니
白雲千載空悠悠 백운천재공유유 /흰구름만 하늘가에 떠다니는구나.
晴川歷歷漢陽樹 청천력력한양수 /맑은 냇물엔 한양숲이 어른거리고
芳草萋萋鸚鵡洲 방초처처앵무주 /아름다운 꽃은 앵무주에 널려 있네
日暮鄕關何處是 일모향관하처시 /날은 저무는데 향관은 어느곳에 있는고
煙波江上使人愁 연파강상사인수 /안개낀 강가에서 시름에 잠겨있네
題黃鶴樓 황학루(黃鶴樓)에 제하다. 서거정
白雲黃鶴事悠悠 백운황학사유유/백운과 황학의 일은 유유하기만 하고 /
芳草晴川不盡愁 방초청천불진수/향기로운 풀, 맑은 냇물에 시름이 끝없어라 /
今古登臨幾人在 금고등림기인재/고금에 누각을 오른 사람이 그 얼마던가만 /
崔侯傑句擅風流 최후걸구천풍류/최후의 뛰어난 시구만이 풍류를 독점했네 /
[주D-001]백운(白雲)과 …… 독점했네 : 최후(崔侯)는 당(唐) 나라의 문인 최호(崔灝)를 가리킨 것으로, 그의 황학루(黃鶴樓) 시에 “옛사람이 이미 황학을 타고 떠났는지라, 이 땅에는 공연히 황학루만 남았네그려. 황학이 한번 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흰 구름만 천재에 부질없이 왕래하누나. 날 갠 냇물엔 한양의 숲이 역력히 비치고, 향기로운 풀은 앵무주 물가에 무성하도다. 날은 저문데 향관이 그 어드메이뇨, 연기 자욱한 강가에서 사람을 시름하게 하네.〔昔人已乘黃鶴去 此地空餘黃鶴樓 黃鶴一去不復返 白雲千載空悠悠 晴川歷歷漢陽樹 芳草萋萋鸚鵡洲 日暮鄕關何處是 煙波江上使人愁〕”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최호는 특히 이 시를 짓고 이백(李白)으로부터 당인(唐人)의 칠언율시(七言律詩) 가운데 제일이라는 격찬을 받았으므로 이른 말이다.
호북성 무창현 황학루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우한시武漢市] 서산[蛇山]의 가오관산[高觀山]에 있는 누각.
한수이강[漢水]이 합류하는 양쯔강[揚子江] 남쪽 기슭의 빼어난 경관 속에 세워져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누각 가운데 하나이다. 삼국시대에 오(吳)나라가 징저우[荊州]를 빼앗아 촉(蜀)과 싸우기 위하여 서산 서쪽 기슭의 황구산[黃鵠山]에 세운 높은 건물이 황허러우의 모체이다. 황허러우라는 명칭에는 도가(道家)의 선인(仙人)이 노란 귤껍질로 만든 학이 진짜 학이 되어 선인을 태우고 날아갔다는 전설이 담겨 있다. 당나라의 시인 최호(崔顥)가 지은 시 〈황학루(黃鶴樓)〉는 대시인 이백(李白)이 그보다 나은 시를 지을 수 없다고 탄복하였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으로 누각의 명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건립된 이후 여러 차례 훼손되었다가 재건되었다. 청나라 때만 4차례 재건되고, 4차례 수선되었다고 전한다. 복구될 때마다 높낮이와 규모, 형태가 조금씩 달라져서 당나라 이전에는 2층이었고, 송나라 때 3층으로 개축되었으며, 청나라 말기에는 3층의 십자찬첨식(十字攒尖式) 목조 건축물이었다. 청나라 광서제(光緖帝) 때인 1884년 인근의 민가에서 발생한 화재가 번져 누각도 일부 훼손되었다. 현존하는 황학루는 문헌에 근거하여 1984년 재건된 것이며, 위치도 양쯔강 기슭에서 가오관산 위로 옮겨졌다.
규모도 3층에서 5층으로 확장되었는데, 각 층이 중2층으로 되어 있어 실제로는 10층인 셈이다. 전체 높이도 원래보다 2배 가량 높아져 51m에 이르고, 구조도 목조에서 철근콘크리트조로 바뀌었으며, 연건축면적은 4000㎡이다. 지붕과 각 층의 처마 위에는 노란색 유리기와를 얹었고, 72개의 커다란 원형 기둥이 받치고 있으며, 외벽의 교각이 60여 개에 이른다. 지붕 한가운데는 4m 높이에 102개의 유리벽돌을 상감하여 만든 호리병 모양의 호로보정(葫芦寶頂)을 장식하여 대범함과 수려함이 돋보인다.
1층 대청에는 황학을 타고 옥피리를 부는 신선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 높이 9m, 너비 6m의 채색 도자기그림 〈백운황학(白雲黃鶴)〉이 있고, 2층 벽에는 당나라 때 염백리(閻伯理)가 지은 〈황학루기(黃鶴樓記)〉가 새겨져 있다. 3층에는 이백과 최호, 악비(岳飛) 등 황허러우를 노래한 역대 명인들을 그들의 작품과 함께 그림으로 묘사한 〈문인회췌(文人荟萃)〉가 눈길을 끈다. 5층에는 10폭의 화폭에 파도가 넘실대는 양쯔강과 중국의 문화적 요소와 황허러우의 변화 등을 생생하게 묘사한 〈강천호한(江天浩瀚)〉이 있는데, 전체 길이가 100m에 이른다. 누각 주변에는 동조(銅雕)와 정자, 패방(牌坊), 라마탑(喇嘛塔) 등이 배치되어 있다.
377)岳陽樓 악양루
舟中遙望岳陽樓。주중요망악양루/배 속에서 멀리 악양루를 바라보지만
未得登臨作勝遊。미득등림작승유/올라서서 유쾌히 놀지도 못했네
何日東歸重過此。하일동귀중과차/그 어느날 동쪽으로 돌아갈 때 이곳 지나며
倚欄吟賞洞庭秋。의란음상동정추/난간에 기대어 동정호의 가을을 읊고 감상 해보려나
*924 악양루는 중국 호남성 북부 洞庭湖 東岸에 위치한 岳陽城의 西門위에 있는 누각이다.
378)感懷 감회
十幅雲帆一信風。십폭운범일신풍。/열폭 돛 사이로 미풍이 불고
江山都是畫圖中。강산도시화도중. /강산은 아름다운 그림같지만
誰知萬里西征客。수지만리서정객 /그 누가 알이요 서쪽으로 유배가는 길
心與滄波日夜東 심여창파일야동/마음은 물결따라 동쪽 고향으로 향하는 것을
死生由命奈何天。사생유명나하천 /죽고사는 운명 천명을 어찌하랴
回首扶桑一惘然。회수부상일망연 /머리돌려 고향 바라보니 아득하구나
良馬五千何日到。량마오천하일도 /좋은말 오천필은 언제나 보내주려나
桃花關外草芊芊。도화관외초천천 /도화관 밖에 풀들만 우거지는데
379)悼亡 도망 /죽은 사람을 애도하며
一百人來爲結隣。일백인래위결린/백명이 와서 이웃이 되었는데
客中憔悴一年春。객중초췌일년춘/나그네길이라 한 해의 봄이 초췌하네
如今病歿已五六。여금병몰이오륙/이미 병들어 죽은이 대여섯명이나 되니
直到雲南餘幾人。직도운남여기인/ 雲南에 도달하면 몇 명이나 남을까
多景樓 (이번 답사에서 다경루답사는 현지 사정-개보수중이어서 답사불가-으로 제외합니다.)
潤州甘露寺多景樓次韻 척약재 김구용
윤주 감로사에서 다경루에서 차운하다.
倦游聊復此登樓。권유료부차등루/ 유람에 지쳤지만 애오라지 다시 이 누각에 오르니
天豁風微意欲秋。천활풍미의욕추/하늘이 넓고 바람이 없어 가을이 가까운 듯하네
南北江山雲自起。남북강산운자기/남북의 강산에는 구름이 절로 일어나고
古今興廢水空流。고금흥폐수공류/고금의 흥폐에도 물은 덧없이 흐르네
錢塘想見千年物梁武時古器 전당상견천년물/전당은 천년 묵은 옛 물건인데
(전당은 양나라 무제때 옛 그릇이다.)
玉笛吹笙萬里愁。옥적취생만리수/옥저와 생황소리는 만리의 근심이네
賴有高僧如惠遠。뢰유고승여혜원/혜원과 같은 고승이 있어서
夕陽歸去更回頭。석양귀거갱회두/석양에 돌아가며 다시 머리를 돌이키네
又
江流漠漠鳥飛還。강류막막조비환/강물은 아득히 흐르고 새는 날아 돌아오는데
天近雲霞手可攀。천근운하수가반/하늘은 놀에 가까워 손으로 당길 수 있을 듯 하네
始信此樓無價處。시신차루무가처/이 누각의 값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을 비로소 믿겠거니
望中相作畫圖看。망중상작화도간/바라보니 그림을 보는 듯 하네.
번역; 성범중(울산대 교수)
楊子渡。望北固山悼金若齋。 洪武癸丑。與先生同登北固山多景樓 포은 정몽주
양자강에 도착하여 북고산을 바라보면서 척약재를 애도하다. 홍무계축년에 포은선생과 척약재선생은 함께 북고산 다경루에 올랐었다. (*홍무계축년은 1373년이다)
先生豪氣盖南州。선생호기개남주/선생의 호탕한 기질은 중국 남쪽을 뒤덮었으니
憶昔同登多景樓。억석동등다경루/그대와 함께 다경루에 올랐던 것을 생각하고
今日重遊君不見。금일중유군불견/오늘 다시 찾아왔지만 그대는 볼 수 없구려
蜀江何處獨魂遊。촉강하처독혼유/그대의 외로운 넋은 양자강 어느 곳에서 떠다니시는가
先生於洪武癸丑(*)。貶雲南。歿于蜀中路上。척약재 선생은 홍무계축년에 운남으로 귀양는 도중 돌아가셨다.
*여기에 홍무 계축년은 1373년이므로 척약재선생의 유배년도는 홍무 갑자(1384년)이 되어야 한다.
번역;고전번역원
척약재 선조께서는 聖節使인 正使 成元계(手+癸)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것은 명 태조 주원장이 즉위한지 5년 후인 1372년 8월부터 이듬해(1273)년 7월까지 약 1년간이다.
포은선생도 1372년(공민왕21)4월에 서장관으로 洪師範 과 함께 명나라 수도에 도착하였다가 8월에 귀국하던 중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파선되어 홍사범은 익사하고 구사일생으로 포은선생은 목숨을 구해 다시 명나라 수도(남경)로 되돌아왔다.
이 때 두분이 만나 명승지를 관광하시면서 윤주 감로사에 있는 다경루에 올라 시를 지으신 것이다. 포은선생의 다경루 시는 전하지 않으나 척약재께서 차운하신 것으로 보아 포은선생의 시도 있었을 것이다.
그후 척약재께서 1384년 1월 15일에 행례사로 명나라에 가시던 중 요동에서 체포되어 명나라 수도 남경으로 압송되어 황제의 명으로 운남 대리위로 유배 가시던 중 노주 영녕현 강문참에서 병사하시었으니 그해(1384년)7월 11일이다.
그후( 우왕 12년(1386, 홍무 19년) 2월 고려에서는 명에 정몽주를 파견하여 세공의 삭감을 청원하였고 명 태조는 흔쾌히 받아들여 ‘3년에 1회 조공, 공마(貢馬) 50필’로 확정되었다.) 포은선생은 다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옛 일을 생각하며 이 시를 지으신 것이다.
감로사 다경루
감로사는 중국 江蘇省 鎭江市 北固山 後峰위에 있는 절이다. 중국 삼국시대 東吳 甘露 원년(265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그 후 여러 차례 허물어짐과 건립됨이 계속되었다. 산꼭대기의 凌雲亭을 康有爲가 고쳐서 [江山第一亭]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곳의 多景樓는 감로사 풍경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한다. (척약재 김구용의 문학세계에서)
전장 둬징러우 [鎭江 多景樓(진강다경루)];중국 장쑤성[江蘇省] 전장시[鎭江市] 진산[金山] 간루사[甘露寺] 뒤편의 베이구산[北固山]에 있는 누각.
베이구러우[北固樓]·춘추러우[春秋樓]·샹쉬러우[相婿樓]·수좡러우[梳妝樓]라고도 불렸다. 화사한 그림이 가득한 대들보와 하늘로 쳐들린 처마를 가진 화량비첨누각(畵梁飛檐樓閣)으로서 웨양[岳陽]의 웨양러우[岳陽樓]와 우한[武漢]의 황허러우[黃鶴樓]와 더불어 3대 명루(名樓)로 꼽힌다. 송나라의 서화가 미불(米芾)이 쓴 '천하 강산 제일의 누각'이라는 현판으로 유명하다. 당나라 때 건립되었으며, 둬징러우(다경루)라는 명칭은 당나라 때 재상을 지낸 이덕우(李德祐)가 지은 〈임강정(臨江亭)〉의 '다경현창유(多景懸窓牖)'라는 시구에서 따왔다. 2층 규모에 회랑이 사방으로 통하며 가는 곳마다 진풍경을 이룬다. 누각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면 빼어나고 운치 있는 다양한 산수경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멀리 동쪽으로는 출렁이는 강물이 일사천리의 기세로 흐르고, 서쪽에는 웅기중기 산봉우리가 첩첩하고 멀리 희미하게 멀어져가는 산봉우리들이 푸른 하늘과 어우러져 혼연일체를 이룬다. 가까운 진산은 배경이 선명하여 단아함을 뽐내고, 맞은편 기슭에 양저우[揚州] 문봉탑(文峰塔)이 어렴풋이 보인다. 또 아래를 굽어보면 시적 정취와 그림 같은 경관이 절로 감탄을 쏟아내게 한다. 베이구산 최고의 명소로서 구양수(毆陽修)·소동파(蘇東坡)·신기질(辛棄疾)·육유(陸游) 등 역대 유명 문인들이 숱한 명구(名句)를 남긴 곳이기도 하다. 누각 동쪽에 돌기둥의 방정(方亭)이 있는데 옛날에는 북고정(北固亭)이라고 불렀다. 명나라 숭정제(崇禎帝) 때 건립된 이 정자는 베이구산의 가장 높은 곳에 지어져 마치 하늘에 닿은 것처럼 보인다 하여 능운정(凌雲亭) 또는 마천정(摩天亭)이라고도 불렀다. 삼국시대에 유비(劉備)의 부인이 된 손권(孫權)의 누이 손부인(孫夫人)이 유비가 백제성(白帝城)에서 병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애통해하며 이 정자에 올라 제사를 지낸 뒤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한 데서 유래하여 제강정(祭江亭) 또는 임강정(臨江亭)이라고도 불렀다. 청나라 말기의 캉유웨이[康有爲]는 정자에 바라본 경관에 감동하여 '강산제일정(江山第一亭)'이라 칭송하였다. 정자 밖에는 담장과 회랑이 있고, 그 안에는 돌책상과 돌의자가 있다. 정자에 올라 멀리 바라보면 주변의 물빛과 산색이 한눈에 들어오고, 특히 달밤의 경치는 한결 더 아름답다. (두산백과사전에서)
다경루에서 눈온 뒤에[多景樓雪後] 이제현(李齊賢)
다경루에서 권일재를 모시고 옛사람의 운으로 함께 지음
[多景樓陪權一齋用古人渭賦] 이제현(李齊賢)
감로사 다경루(甘露寺多景樓) 권한공(權漢功)
다경루(多景樓)에서 계담(季潭)에게 주며[多景樓贈季潭] 정몽주(鄭夢周)
중국의 삼대 누각;강소성 진강시 다경루. 호북성 무창현 황학루. 호남성 동정호 악양루
댓글목록
김종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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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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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한자만 나오면 설설 기게 되네요.....지나라고 하는 차이나! 그저 무사태평 그리고 안전하게 뜻깊고 인상남는 여행 되시길 바랍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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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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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오랜동안 준비해 왔던 중국 선조님 길 탐방행사가 시작되는군요
알찬 계획이었던 만큼 커다란 보람을 안고 돌아오리라 믿습니다.
부디 건강하게 잘 다녀오십시오.
김은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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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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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이제 드디어 장도에 오르게 되었군요,
그동안 준비 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함께하지못해 못네 아쉽습니다.
잘 다녀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