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의 반란군이었던 합단군(哈丹軍) 격퇴에 공이 많았던 김흔(金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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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회 작성일11-02-15 10:01 조회1,952회 댓글2건본문
원나라의 반란군이었던 합단군(哈丹軍) 격퇴에 공이 많았던 김흔(金忻)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4. 慶尙道 安東大都護府 人物 條]
이 웅 재
김흔(金忻;1251-1309)은 안동김씨의 중시조인 김방경(金方慶)의 둘째 아들로 신라의 끝임금 경순왕의 10세
손이다. 아버지의 덕으로 과거를 거치지 않고 음보(蔭補)로 산정도감 판관(刪定都監判官)에 뽑히고, 세 번 영
전(榮轉)하여 장군(將軍)이 되었다. 아버지를 따라 탐라적(耽羅賊; 三別抄)을 쳐서 승리하게 되자 대장군에 임
명되었다. 또 일본 정벌에 나가서 공을 세워 진주목사(晋州牧使)가 되었다.
충렬왕 5년(1279)에 원나라에 독로화(禿魯花; 원나라 宿衛를 위해 인질로 보낸 왕족이나 귀족의 자제)로 들어
가 있을 때였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이었던 유주(庾賙)가 황제에게 말하기를, 고려의 군사들로 하여금 일본을
정벌케 하고 아울러 군량 20석을 준비하도록 한 일이 있었다. 김흔은 그에게 자기의 고국을 그처럼 못쓰게 만
들려고 하느냐고 꾸짖기도 하였다.
그 후 김흔은 아버지의 관직을 계승하는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첨의참리(僉議參理; 僉議府는 충렬왕 때 中書門
下省을 고친, 국가의 행정을 총괄하던 관청명이고 그 參理는 종2품 관직임)가 되었다.
충렬왕 16년(1290년)에는 원나라의 반란군이었던 합단(哈丹)이 쳐들어와 온 강토를 유린하였는데, 이때 방수
만호(防守萬戶) 정수기(鄭守琪)는 합단군이 철령(鐵嶺)에 이르려 하자 겁을 집어먹고 도망쳐 버렸다. 그런데
철령의 길은 좁아서 겨우 한 사람씩밖에 지나다닐 수 없었던 때문에 적들은 말에서 내려 한 줄로 산길로 올라
오느라고 고생하다 보니, 그러지 않아도 멀리까지 원정을 나온 처지이기에 군량미도 바닥이 나서 제대로 먹지
도 못한 터수라서 기진맥진한 상태였었다. 그런데 정수기가 내버리고 간 식량 덕분에 기운을 차리고 고개를
넘어 교주도(交州道; 지금의 강원도)로 물밀듯이 쳐들어왔다. 이에 김흔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어 적과의 교
전을 피해 달아나는 바람에 양근성(陽根城; 지금의 楊平)이 드디어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 황제는 설도간(薛闍干)을 고려로 파견하여 합단군을 토벌하게 했는데, 김흔이 우장군으로 그와 함께 목
주(木州; 木川, 지금의 天安)에 주둔하고 있었다. 나졸(邏卒) 고문려(高文呂)가 적들이 연기현(燕岐縣)에 주둔
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김흔은 목노적(木奴赤) 등으로 하여금 정찰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밤중에 군사
들을 목주로부터 이동시켜, 동이 틀 무렵 연기에 이르렀다. 적들은 정좌산(正左山) 아래 진을 치고 있다가 여
러 군사가 갑자기 포위하자 크게 놀라 험준한 산 위로 올라갔다. 이를 양면에서 협공을 하니 적들은 말을 버리
고 달아나 숲속의 나무 사이에 숨었다. 그러나 아군의 선봉 2명이 화살을 맞아 쓰러지는 바람에, 군사들이 두
려워하여 더 이상 전진하지를 못하였다. 김흔이 꾸짖어 명하였다.
“감히 후퇴하는 자가 있으면 베어 죽이겠다.”
이에 보병 500명이 앞을 다투어 올라가서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다. 이석(李碩)과 전득현(田得賢) 등이 돌진하
여 적의 선봉을 섰던 장사(壯士) 2명을 베고 그 여세를 몰아 함성을 지르면서 대군과 협력하여 공격을 하니 적
들이 놀라 무너져 달아났다. 적들을 추격하여 공주강(公州江)에 이르니 적의 시체가 30여 리에 걸쳐 깔렸고
물에 빠져 죽은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적들 중에는 정예부대인 기병 천여 명만이 강을 건너 도망쳤을 뿐, 그
들이 데리고 다니던 부녀자, 의복, 말안장, 보물, 그릇 등을 수도 셀 수 없을 만큼 노획하고 임금에게 승전을
보고했다.
왕은 또 김흔을 죽전(竹田)에 보내어 나머지 적들을 추격하여 소탕하게 하고 그 공으로 판밀직사사(判密直司
事)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원나라 황제로부터는 활과 화살·안장·옥대(玉帶)․은(銀) 1정(錠) 등을 상으로 받았
다. 이어서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승직되었다가 얼마 후 다시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가 되었다
그런데 승려 일영(日英)이 합단군을 격퇴할 때 함께 공을 세웠던 한희유(韓希愈)가 모반을 꾀한다고 무고하므
로 만호 인후(印侯), 밀직 원경(元卿)과 함께 군대를 출동시켜 한희유를 붙잡아다가 좌승(左丞) 합산(哈散)에게
문초케 하였다. 합산은 왕과 함께 흥국사(興國寺)에서 닷새 동안이나 그를 국문하였으나 그는 끝내 자복하지
않았고 그를 무고했던 일영도 도망가 버렸다.
충렬왕은 이 사건이 원나라에 알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인후 등에게 부탁하였으나 인후, 김흔 등은 원나
라에 가서 이 사건을 알리게 되었다. 왕도 또한 사신을 원나라에 보내어 한희유의 죄가 무고(無辜)임을 판명케
하였다. 그리하여 자칫 곤경에 빠질 뻔하였으나 때마침 대사령(大赦令)이 내려 김흔 등도 죄를 면하게 되었고,
아버지의 상을 당하게 되어 한때 귀국하여 복상(服喪)을 마치고는 다시 원나라로 갔다.
당시 한희유는 귀국하여 재상으로 중용되었으므로 김흔은 귀국하지 않고 연경(燕京)에서 7년여를 머물러 있
었다. 한희유가 죽고 난 뒤, 찬성사자의도첨의사사(贊成事咨議都僉議司事)에 임명되고 삼중대광(三重大匡)의
작위를 더하게 되었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상락공(上洛公)으로 봉하여지자 드리어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
다. 그러나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만호(萬戶)의 관직은 사양하여 형의 아들인 김승용(金承用)에게 돌아가도록
하였다.
충선왕이 즉위하자 왕은 교서를 내려 “대덕(大德) 3년(1299)에 본국의 무뢰한 무리가 장차 난을 꾀하고자 하
거늘, 김흔이 만호 인후와 더불어 능히 먼저 이 사실을 알고 난을 진정하였으니, 그 공을 가히 상(賞)하여 특별
히 높은 관직에 등용할 것이다.”라고 하는 등 총애를 받았으나, 충선왕 원년에 59세로 죽어서 더 이상의 영화
를 누리지 못했다.
김흔은 성품이 활달하면서도 인자하였으며, 특히 친척 가운데 곤궁한 사람들을 잘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댓글목록
관리자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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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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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본 홈 <역사적 인물>란 <김흔>내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자료가 다소 적어 아쉬웠는데 귀한 자료를 잘 정리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홈에 올리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김계응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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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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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