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림촌 2차 답사기_03 안김 최고(最古)의 선영, 화림촌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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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식, 발용 작성일11-01-12 21:06 조회3,393회 댓글3건본문
화림촌 2차 답사기_03 안김 최고(最古)의 선영, 화림촌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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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팀 대부분이 먼동이 틀 무렵 잠깐 눈을 붙이고 07:00시경 눈을 떴다. 숙소 인근에서 해장국으로 속을 달랜 뒤 08:30분 시내에서 출발해 09:08분경 구송리 충렬공 신도비를 들른 다음 09:15분경 능골에 도착했다.
▲ 구송3거리에 서 있는 충렬공 신도비.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충렬공 신도비는 왕명으로 세운 우리 나라 최초의 신도비이다.
능골에는 세향에 참석한 종친들로 만원이었다. 이번 세향은 마침 일요일이라 다른 해보다 참예 종친들이 많았다. 여기저기서 인사를 나누는 종친들이 손을 부여잡고 안부를 묻는 모습이 정겹다.
2010년 충렬공 세향은 11:00시 정각 충렬공 묘소에서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참예 후손이 200여 명에 가까울 정도로 예년보다 대거 늘어났다.
▲ 예년보다 훨씬 많은 후손들로 묘전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였다.
▲ 초헌 창회 종친
▲ 아헌 준회 종친
▲ 종헌 광도 종친
▲ 음복례
▲ 산신제
11:40분 세향이 끝난 뒤 답사팀은 음수재 앞마당에서 국밥을 들고, 12:00시 정각에 안동시 녹전면 서삼리 말바위(馬巖洞)로 향했다. 화림촌 답사에는 일정 문제로 답사팀에 동행하지 못했던 영환 종친 내외분과 영윤 종친 내외분이 합류해 기존 9명에서 13명으로 늘어났다.
화림촌(花林村)은 말바위 위쪽의 지명(地名)이다. 우리 최초 족보인 경진보에는 충렬공의 조부 복야공(휘 敏成) 묘소가 “墓在安東府西一息花林村(묘소는 안동부 서쪽으로 일식 거리인 화림촌에 있다.)”고 적혀 있고, 충렬공 행장이나 고려사 열전(김방경전)에는 충렬공의 유언에 따라 조부 복야공 묘소 인근에 장례를 모셨다고 기록돼 있다. 이 기록에 근거해 2008년 2008년 11월 충간위에서는 안동 출장을 갔다가 ‘말바위’라는 표석을 발견하여 화림촌을 1차 답사한 바 있다.(‘아, 화림촌(花林村)_01 선조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라간 길 / 아, 화림촌(花林村)_02 산기슭에 산재한 고려 고분 10여 기’ 참조)
▲ 화림들에서 화림사 터를 바라보고. 사진 가운데 산 아래 펑퍼짐한 곳이 화림사 터이다.
당시 답사팀은 말바위에 거주하는 권헌규 씨 등 주민들에게서 고려시대 고분을 비롯해 ‘화림들’ 및 ‘화림사(花林寺)’로 추정되는 절터 위치 등을 묻고 확인작업에 들어갔었다. 이때 고려시대 고분과 ‘화림들’이라는 지명은 현지에서 확인했으나, 고려 고분을 찾느라 온산을 헤매는 통에 시간이 부족해 화림사 절터는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었다.
이번 답사에는 1차 답사에서 확인한 고려 고분을 둘러보고 산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다른 고분들과 화림사 절터를 찾기로 했다. 이 고려 고분은 1979년 도굴로 인해 훼손되었는데, 산주(山主)의 신고로 1980년 안동대에서 긴급 발굴한 바 있다.(충간위 카페 ‘화림촌 고분’ 참조)
곧바로 고려 고분으로 올라간 답사팀은 좌회 종친을 통해 좌향과 풍수지리에 관한 사항을 알게 되었다. 좌회 종친은 여러 해 동안 국내에서 손꼽히는 풍수지리 학자들과 함께 전국 명소들을 직접 탐방하면서 풍수지리를 익혔다고 한다. 좌회 종친은 품에서 수맥 탐침봉을 꺼내 고분을 살펴본 뒤 혈(穴)에 관한 내용을 비롯해 여러 가지를 상세하게 들려 주었다. 풍수지리에 문외한인 까닭에 많이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덕분에 고분에 대해 좀더 상세히 알 수 있었다.
▲ 수맥 탐침봉으로 고총들을 살펴보는 좌회 종친
▲ 안동대에서 발굴한 고려 고분. 도굴로 인해 동전과 인골 일부가 발굴되었는데, 동전이 주조ㆍ사용된 시기가 상서공(휘 효인) 생몰 연대와 비슷하다.
▲ 인근의 또 다른 고총들.
이후 답사팀은 화림사 터를 찾기 위해 서북쪽으로 산줄기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오랜 세월 사람들이 다니지 않은 탓에 풀섶과 잡목으로 뒤덮여 오솔길조차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크고 작은 산줄기를 오르내리면서 인근에 상당히 많은 고총들을 찾았는데, 그 중에서도 한 줄기에 나란히 이어지는 고총들이 보였다. 좌회 종친이 일일이 탐침봉으로 실측한 뒤 두어 고총에 주목하게 되었는데, 이 고총들에 대해서는 추후 좀더 자세한 답사가 필요해 보였다. 특히 이 고총들은 우측으로 높은 산줄기가 흐르면서 주위를 품는 지세(地勢)라 문외한의 눈에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지도 참조)
▲ 이 지역에 산재한 고총 가운데 고려 고분으로 추정되는 경우에는 봉분 주위를 장방형으로 돌을 쌓았다. 이런 형태는 고려 고분의 특징인 천원지방 형태이기도 하다.
좌회 종친은 몇 해 전에 한시집 『조상의 흔적을 찾아서』을 펴내는 등 종사(宗事)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좌회 종친 저서 소개> 『조상의 흔적을 찾아서』- 아! 수원 두릉리 효행 오백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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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줄기 곳곳에 자리잡은 고총들을 살펴본 뒤 답사팀은 다시 산줄기를 타고 화림사 터를 찾기로 했다. 그러나 1차 답사 당시 권헌규 씨가 일러 준 장소를 당시에 잘못 알아들은 탓에 다른 곳을 헤매고 있었다. 이 때문에 조(組)를 나누어 화림사 터를 찾느라 답사팀이 산줄기에서 미끄러지고 구르는 등 애꿎게 고생을 하고 말았다. 또 다른 산줄기를 넘어가자 8부 능선쯤 되는 곳에 비교적 평평한 곳이 보였는데, 절터가 아니라 잘 정돈된 묘소가 나타났다. 진성 이씨 묘소였다. 묘비로 보아 꽤 오래 된 묘 같았다.
산을 다 내려와 편평한 곳까지 찾아보았으나 화림사 터로 짐작되는 곳이 나타나지 않았다. 바로 그때 재영 종친께서 태우ㆍ상석 종친 등과 함께 산을 내려오다가 ‘화림산’이라고 적힌 자그마한 산소를 봤다고 일러 주었다. 부랴부랴 그 장소로 달려갔다. ‘유인남양홍씨지묘(孺人南陽洪氏之墓)’라고 새긴 상석에 작은 글자로 ‘화림산신좌(花林山辛坐)’라고 적혀 있었다. 800년 전 선대 묘소 찾는 후손들이 애처로우셨는지 할아버지께서 불러 세우신 기분이었다.
▲ 화림사 터로 추정되는 곳 인근의 근래 무덤. 상석에 ‘화림산신좌(花林山辛坐)’라고 적혀 있다.
▲ 이곳이 ‘화림산(花林山)’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로 이번 답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었다. 1680년 이후에 쓰여진 '과헌일기' 등에서는 ‘화림촌(花林村)’이라는 지명이 발견된다.(충간위 카페 <예안파 일기류> 참조)
사진을 찍고 답사팀은 다시 화림사 터가 있음직한 곳을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산기슭에 조금 너른 곳이 아니고는 절이 자리잡을 곳이 없어 보였다. 답사팀은 이곳을 둘러보고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다음 행선지로 향하기로 했다.
처음 산행을 시작한 곳에 세워 둔 차량으로 돌아와 영환·영윤 두 내외분께서는 더 남쪽을 향해 떠나고, 답사팀은 마을로 내려와 할머니 두 사람에게 화림사 터를 물었다. 마침 1차 답사 때 만난 권헌규 씨 부인이 마당에 앉아 있었다. 구면이라며 반가워하면서 이야기를 들려 주는데, 지난 번과 마찬가지로 화림촌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용을 모르고 있었다. 몇 해 전에 백수를 누리신 어르신이 계셨는데, 그분이 살아 계셨으면 화림사에 대해 자세한 내력을 들었을지도 모르겠다며 마을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예전에 말바위는 16가구가 살았는데, 모두들 대처로 떠나고 지금은 몇 집 남지 않았다고 한다. 이번에 확인한 화림산은 진성 이씨 소유라고 한다.
▲ (앞줄 왼쪽 서 있는 분부터, 존칭 생략) 영윤 종친 부인, 영윤, 발용, 용주, 영환, 영환 종친 부인, 태영,
(뒷줄 4분) 재영, 태우, 좌회, 민식, (맨끝)상석
이곳에서 대현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묻자 대뜸 그 고개를 일러 주면서 ‘대현리’를 ‘한골’이라고 표현한다. 광산김씨 예안파 일기류 중 하나인 과헌일기에는 광산김씨 집성촌인 오천에서 지금의 대현리 거인마을까지 오간 기록이 전해 오는데, 이곳 화림들에서 서북쪽으로 고개를 넘어가면 바로 거인마을이 된다. 훗날 다시 이곳을 찾기로 하고, 권헌규 씨 부인에게서 전화번호를 받아 두었다.
10여 분간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눈 뒤 답사팀은 충북 증평읍 남하리 서당골에 있는 생원공(휘 命龍) 묘소로 향했다. 생원공 묘비에는 휘 이청 할아버지 이하 생원공(휘 명룡) 선대가 기록돼 있는데, 휘 이청 할아버지를 비롯해 휘 의화, 휘 민성, 휘 효인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배위 할머니 성씨가 빠짐없이 기록돼 있다. 이 기록의 출처가 어딘지, 또 어떻게 전해 왔는지 등등 충렬공실기에 수록하기 위해 확인할 내용도 많고, 사진도 촬영해야 하므로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참배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서울로 올라가는 고속도로가 온통 차량으로 막혀 지체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5번 국도를 타고 풍기로 들어가 중앙고속도로를 탈 예정이었는데, 그만 풍기에서 중앙고속도로로 갈아타는 길을 놓치고, 윤식 종친의 착각 때문에 국도로 죽령을 넘어 단양IC에서 중앙고속도로로 진입했다. 자연스레 증평 남하리의 생원공 묘소 참배는 뒤로 미루게 되었다. 하지만 이 길 역시 단풍철 나들이 차량으로 길이 막혀 하는 수 없이 만종에서 영동고속도로로 갈아타지 못하고, 그대로 직진해 홍천을 거쳐 춘천고속도로로 방향을 잡아 이리저리 국도로 갈아탄 끝에 간신히 양평에 도착하니 20:00시경이었다. 막 문을 닫으려는 휴게소 식당으로 들어가 따뜻한 국밥과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이니 늘어졌던 몸이 다시 생기가 돈다.
2박 3일 내내 함께 해 주신 두릉리 재영·좌회 종친, 그리고 혼자 운전하시느라 애쓰신 발용 종친, 바쁘신 중에도 화림촌 답사에 참여해 주신 영환 종친 내외분과 영윤 종친 내외분 및 답사팀 여러분께 감사 말씀 전합니다.
-- <끝> --
댓글목록
관리자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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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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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시제 전 과정과 비밀의 숙제인 화림촌 탐방을 자세한 해설과 사진 자료로 제공해 주시어 정말로 감사합니다. 본 홈에 올리겠습니다.
김경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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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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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답사팀 종친 여러분들의 노고가 빛날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김종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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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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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흥미로운 글 입니다. 화림이라...제 고향에도 지금은 발길이 끊긴 동화골이라는 곳이 있는데...절터위에 절을 짓고 절터위가 밭이 되고 무덤위에 무덤 쓰고 무덤위가 밭이되고 또 집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공의 흔적이 한번 지나간 땅은 반드시 그 흔적을 남기데 됩니다....이런 수색 ?은 주로 겨울에 해야 합니다. 민성 할아버님 묘지를 찾는 이 추적이 성공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