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발견 백곡 간찰 탈초 및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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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10-12-05 19:05 조회2,338회 댓글0건본문
지난 11월 발견한 백곡(휘 得臣)선조님의 간찰을 <백곡 문학 연구>로 박사학위 받으신 영동대학교의 신범식 교수에게 의뢰하여 탈초하였습니다.
柏谷 書札
弟爲見久堂, 再昨到此, 明日別久堂, 再明向寒碧樓, 過二日到新堂, 行端陽祀事, 六日還歸木州, 與兄合幷, 何時可期? 七月二十日後, 或有相逢之期, 而惡可必也? 弟遭千千萬萬, 意表之變怪, 一則笑也, 一則慨也, 中庸何不肯借耶? 欲送伻借來 而當塵務之急, 一奴出送甚難 奈何? 四月卄七日, 得臣拜.
저는 久堂(朴長遠)을 보기 위해 엊그제 이곳에 도착하였고, 내일은 구당과 작별하고 모레는 寒碧樓로 향할 것입니다. 이틀 뒤에는 新堂에 도착하여 단오 제사를 거행하고, 6일에는 木州(木川)로 돌아갈 것이니, 형과의 만남은 어느 날로 약속을 잡을 수 있겠는지요? 7월 20일 이후로 혹 만날 날이 있겠으나, 어찌 기필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천 가지 만 가지로 뜻밖의 변괴한 일을 만남에 한 편으로는 우습고, 한 편으로는 탄식이 됩니다.
《중용》은 어찌 기꺼이 빌려주지 않으시겠습니까마는 하인을 보내 빌려오게 하고 싶지만 세속의 급한 일을 당하여 하인 한 명도 내보내기가 몹시 어려우니, 어찌하겠습니까?
4월 27일에 득신은 절합니다.
<주풀이>
1. 작성연대와 수신자 미상
2. 구당 : 박장원(朴長遠. 1612년(광해군 4)∼1671년(현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 자는 중구(仲久), 호는 구당(久堂)·습천(隰川). 직장(直長)을 지낸 훤(烜)의 아들이다. 백곡과 평생토록 가장 친한 죽우로 지냈다.
1627년(인조 5) 생원이 되고 1636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나, 그해에 일어난 병자호란으로 외할아버지인 심현(沈誢)을 따라 강화도에 피난하였다.
1639년 검열(檢閱)이 되고, 1640년 정언으로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653년(효종 4) 승지로 있을 때에 남인의 탄핵으로 흥해(興海)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658년 상주목사에 이어 강원도관찰사를 지내고, 1664년(현종 5) 이조판서가 되고 공조판서에 이어 이듬해 대사헌이 되고 예조판서·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한 뒤 자청하여 개성부유수에 부임, 재직 중에 죽었다.
저서로는 《구당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3. 한벽루(寒碧樓) :
충청북도 제천군 청풍면 물태리에 있는 조선 시대의 누각이다. 고려 말인 충숙왕 4년(1317)에 청풍현 출신의 승려 청공(淸恭)이 왕사(王師)가 되면서 청풍현이 청풍군으로 승격되었는데, 이때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청풍현 객사 동쪽에 이 누각을 건립하였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태조 6년(1397)에 군수 정수홍(鄭守弘)이 중수하였고, 인조 12년(1634)에 개창하였다. 그 뒤 조선 말인 고종 7년(1870)에 다시 중수되었다가, 1972년에 홍수로 파손된 것을 1975년에 복원하였으며, 1983년 청풍면 읍리에서 현 위치인 청풍문화재단지로로 이전되었다.
1971년 1월 8일 보물 제528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4칸, 측면 4칸. 1317년(고려 충숙왕 4)에 건립되었으며 석축토단(石築土壇)의 덤벙주초(柱礎) 위에 엔타시스를 사용한 층하주(層下柱)를 세우고 마루를 설치하였다. 팔작지붕으로 주심이익공(柱心二翼工) 보 머리 끝에 봉황머리를 별조(別彫)하고 중설(重舌)은 길고, 앙설(仰舌)도 길게 빼내고 연화(蓮華)를 얹었다. 누의 우측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계단형 익랑(翼廊)을 달고 익랑의 주초는 덤벙주초 위에 4각 석주를 얹고 그 위에 8각 기둥을 받쳤다.
누각에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의 편액과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淸風寒碧樓’라 명(銘)한 액자가 있고 창석(蒼石) 이준(李晙)의 중수기가 있다. 중수기에는 ‘崇禎甲戌郡守權璥刱’이라 적혀 있는데 이 해는 1634년(인조 12)에 해당한다.
1971년 1월 8일 보물 제528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4칸, 측면 4칸. 1317년(고려 충숙왕 4)에 건립되었으며 석축토단(石築土壇)의 덤벙주초(柱礎) 위에 엔타시스를 사용한 층하주(層下柱)를 세우고 마루를 설치하였다. 팔작지붕으로 주심이익공(柱心二翼工) 보 머리 끝에 봉황머리를 별조(別彫)하고 중설(重舌)은 길고, 앙설(仰舌)도 길게 빼내고 연화(蓮華)를 얹었다. 누의 우측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계단형 익랑(翼廊)을 달고 익랑의 주초는 덤벙주초 위에 4각 석주를 얹고 그 위에 8각 기둥을 받쳤다.
누각에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의 편액과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淸風寒碧樓’라 명(銘)한 액자가 있고 창석(蒼石) 이준(李晙)의 중수기가 있다. 중수기에는 ‘崇禎甲戌郡守權璥刱’이라 적혀 있는데 이 해는 1634년(인조 12)에 해당한다. 한벽루는 이보다 앞서 1397년(조선 태조 6)에도 군수 정수홍(鄭守弘)이 중수하였고, 그 후 1870년(고종 7)과 1900년(광무 4) 중수되었다.
1872년 대홍수로 도괴되었던 것을 1875년 원래대로 복원하였고, 1985년 충주댐 건설로 이 지역이 수몰되어 청풍문화재단지로 옮겨놓았다.
4. 신당(新堂) : 이곳은 아마도 백곡공께서 충북 괴산읍 능촌리에 지은 집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함. 이 당시 마을은 현 충민사가 세워져 있는 곳에 있었음.
5. 목주(木州) : 현재의 충남 천안시 목천(木川)으로 백곡공께서 거처하던 충남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백전마을을 말하는 것으로 보임.
이 외에 백곡 선조님의 간찰은 성균관대학교에 1점(아래의 것)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百鍊上
耑送奴生致問 感篆感篆 累個個不得
相見面目 幾乎相忘焉也 出他入來
則顓送邀之 必臨 況繩祝繩祝
正言出廣陵마(麻+必) 柏翁
<번역>
백련(百鍊: 鄭鎔의 字)에게 올립니다.
오로지 노복을 보내어 소생에게 문안을 물어주시니 너무나 감명됩니다. 거듭 매번 서로 모습을 보지 못한지가 얼마입니까. 얼마 있다간 서로 잊어버리겠습니다. 출타했다가 들어오면 전심으로 사람을 보내어 맞이하니 꼭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물며 계속 축하하고 계속 축하해 줌에야....
정언(正言: 司諫院의 정6품직)이 광릉(廣陵: 왕릉이 아니고 지명임)에 나아갔다는데 무슨 일입니까.
백옹(柏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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