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양장계』와 『심양일기』의 사료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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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석 작성일10-07-21 17:12 조회1,779회 댓글2건본문
『심양장계』와 『심양일기』의 사료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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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일기』1639(정축)년 12월 17일
十七日 己亥 晴
世子在瀋陽舘所 宣傳官金繁 禁軍辛大吉 上來舘所 平安兵使林慶業
本 一同紬十疋果饌等物 辛大吉處順付封進 大君前亦差等入納
淸主求生薑 以一升應求
17일(기해) 맑음
세자 심양관소에 머무시다. 선전관 김번과 금군 신대길이 관소로 올라오다. 평안도병마사 임경업이 본1동과 명주[紬] 10필과 과일, 반찬 등을 신대길 편에 봉해 올리다. 대군에게도 차등이 있게 들여보내어 바치다. 청주[청태종]가 생강을 구하므로 한 되를 보내다.
『심양일기』1640(경진)년 11월 10일
初十日 丁酉 晴
世子在瀋陽舘所 宣傳官金繁 領魚酒出去 禁軍朴實龍 領靑大竹入來
10일(정유) 맑음
세자 심양관소에 머무시다. 선전관 김번이 고기와 술을 가지고 떠나다. 금군 박실룡이 푸르고 큰 대를 가지고 들어오다.
『심양장계』1640(경진, 인조 18)년 10월 5일
[장계의 원문 미확인]
10월 5일, 승정원에서 열어볼 것
‘관소의 말을 징발해가다’
---중략---,“명의 뒤를 치는데 소용되는 물자, 말, 인부, 돈, 군사 등의 요구와 수량을 계속해서 조선에 상세히 보고하는 내용임”
28일 선전관 김번(金繁)에게 말을 이끌고 가게 했더니 용장군이 ‘말을 찾을 찾을 때는 말이 없다고 하더니 이제 선전관은 무슨 일로 가는 것이며 무슨 말을 타고 가느냐’고 하고, 아문의 역관들은 문을 막고 서서 못 가게 하고 역자(驛子)들을 시켜 몰고 가게 하니 주문의 초(草)와 비국에서 보낸 공문도 맡겨 보낼 수 없었습니다. 말을 모는 사람들은 왕래한다 해도 그간의 사정을 자세히 알 수 없어 매우 답답합니다.
*용장군-龍骨大, 龍將, 英將으로 표기(조선), 英俄爾岱(청국)
*비국-비변사(備邊司)
『심양장계』1640(경진, 인조 18)년 11월 10일
[장계의 원문 미확인]
11월 10일, 승정원에서 열어볼 것
‘황제가 생선과 소주를 보내다’
왕세자의 증세는 별로 달라진 것은 없으며, 빈궁께서는 가미온담탕(加味溫膽湯) 20첩을 드신 뒤에 증세가 전보다는 덜하나 아직 완전히 쾌차하지 않았으므로 가미영신환(加味寧神丸)을 이제 막 지어 올렸으며, 대군께서는 평안하십니다.
이달 5일 용장군이 있는 곳에서 차사를 보내 황제께 달려가서 보고하고 이튿날 돌아갔습니다. 분명히 아뢰어 결정할 일이 있는 것 같았으나 이를 알아낼 길이 없으니 매우 답답합니다.
봉림대군께서 이달 11일 책문에 도착하신다는 소식이 왔으므로 맞이할 예부 관원이 나간다고 합니다. 첫째대군이 들어오신 뒤에 둘째대군을 내보낼지의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으나 돌려보내는 것을 허락할 기미가 보인다고 합니다.
9일 큰 생선 1마리, 중간치 생선 1마리, 유소 소주 2항아리를 수레에 싣고 범문정과 박씨 두 사람이 직접 와서는 황제의 명이라고 세자께 직접 전하고 말하기를,
“이 소주는 소와 양의 젖으로 빚은 것으로 그 맛이 매우 좋아서 국왕께 보내시라고 하셨습니다. 모두 보내시되 이를 맡아 가지고 갈 사람을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으므로 선전관 김번(金繁)이 맡아서 나갑니다. 김번은 이미 달이 다 찼으니 교대할 선전관을 빨리 들여보내주십시오.
절차를 갖추어 잘 아뢰어주십시오.
*대군-여기서는 봉림대군의 일시귀국으로 인해 대신 인질로 와 있던 인평(麟平-인조의 3자)대군을 말함.
『심양장계』는 『심양일기』에 비해 사건의 내용과 전개 과정을 전반적으로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는 게 특징이다. 그 내용은 먼저, 날짜를 적고 이어 (승)정원[承政院]에서 열어볼 것, 후에 소제목, 그리고 왕세자[소현]와 세자빈[강빈, 민회빈], 두 대군[봉림, 인평]의 근황을 쓴 후 청의 요구 물목이나 수량, 기일, 관련 인물과 갈등구조, 포로의 속환(贖還), 지연되고 있는 조선의 대응에 선처를 구해 일을 서둘러 달라는 내용 등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위와 같은 방법으로 작성된 장계는 선전관, 성절사, 삭찬[朔饌, 朔膳], 내관, 사은사, 인질의 교체, 신병으로 인한 일시 귀국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입국하는 이들을 통해 궐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심양장계』는 볼모기간의 마지막 1년 치가 빠져, 다소 사료적 가치에 흠결이 있으나, 다행스럽게도 『심양일기』가 온전하게 전해져 그 점을 보완할 수 있으니 양 기록을 함께 살펴보아야 하겠다. 그러나 아직, 『심양일기』는 1643년과 1644년 치 일기분은 완역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만몽총서』를 번역하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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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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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대부님의 노력으로 병란 후 심양으로 끌려간 이들의 고초를 알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이때 세자와 대군들을 모신 안주공(휘 繁)의 역할을 자세히 알 수 있어 참으로 기쁩니다. 연재를 바랍니다.
김용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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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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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상석 대부님 오래간만 입니다 더운 날씨에 잘지내고 계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