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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정보(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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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 작성일10-06-24 18:34 조회2,102회 댓글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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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안동김씨 [단자] 구경하기|안동(安東)
남재(南齋) 재호 | 조회 3 | 10.05.19 23:19 http://cafe.daum.net/kss6336/5RMJ/58 

청계천 황학동 고서점에서 발견한 것인데 사진 찍었습니다

참고하세요

郞廳

道光23年은 1843년입니다

 

126B4D024BF3E29987C96C

 

136B4D024BF3E29C88D655

 

166B4D024BF3E29E8999CA

 

116B4D024BF3E2A08AE9E3

 

 

 

 

 

*참고사항*

 

 뿌리 찾고 있는 있습니다.

한자 뜻과 어떤 내용이 들어가나요

 

무오식고환(戊午式考還) ==> 무오(戊午) 식년(式年)의 고환(考還)

식년(式年)에 해당하는 무오년에 결원이 생긴 군인의 수를 채우고 그 명단을 기록한 장부

 

거제(巨濟) ==> 거제도

 

*식년(式年): 자(子), 묘(卯), 오(午), 유(酉) 따위의 간지(干支)가 들어 있는 해. 3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데, 이해에 과거를 보이거나 호적을 조사하였음.

*고환(考還): 세초(歲抄)에서 군사의 결원을 채우고 6년마다 이 명단을 모아서 장부에 반영하던 일.

*세초(歲抄): 해마다 6월과 12월에 죽거나 병들거나 도망간 군인을 조사하여 보충하던 일.

 

 

 

 *낭청*

 

시대 조선(朝鮮)
대분류 관직
중분류 동반
소분류 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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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내용]

조선시대 비변사(備邊司)·선혜청(宣惠廳)·준천사(濬川司)·오군영(五軍營) 등에 두었던 실무 관직이다.

낭관(郞官)과 같은 의미로 각 관서의 당하관을 말하였으나, 1555년(명종 10)에 비변사가 상설기구로 바뀌어 12원의 낭청을 두면서부터 하나의 관직으로 자리 잡아, 뒤에 설치된 선혜청·오군영 등에도 차례로 낭청직이 설치되었다. 정규직 종육품(從六品)으로 정규 직제화 하였지만 고정되지 않은 낭청직이 많이 설치되면서 정삼품(正三品) 당하관(堂下官)부터 종구품(從九品)까지 폭넓게 겸직 충원되었다. 5개월 근무한 뒤 6품관으로 승진되었다.

선혜청낭청은 1626년(인조 4)에 통합 정비되어 각 도의 대동미·대동포를 관리하는 종육품(從六品) 4원을 두었다가, 1750년(영조 26)에 균역청을 흡수하면서 1명을 증원, 상평·진휼의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준천사낭청은 1760년에 신설되어 정칠품(正七品) 3원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한성부 참군(參軍)을 겸하였다.

오군영낭청은 모두 종육품(從六品)으로 정조 때 이후로 종사관(從事官)이라고 불렸다. 훈련도감에 문관 1인, 음관 2인, 무관 3인 등 6원의 낭청을 두었는데 뒤에 음관 2명은 없어졌다. 어영청·금위영 낭청은 문·무관 각각 1명씩 임명되었고, 수어청·경리청(후에 총융청에 흡수됨)에도 각각 1원씩 낭청을 두었다.

종부시(宗簿寺)에도 2원의 겸낭청을 두었다가 1864년 종친부(宗親府)로 통합되면서 1원이 줄었고 1865년 비변사가 의정부에 통합되면서 비변사낭청 또한 공사관(公事官)으로 바뀌었다.

[별칭]

낭관(郞官)

 

댓글목록

김영윤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영윤
작성일

  맨 마지막 사진에 전서공 후손의 계보가 보입니다
전서공(成牧)(충렬공5세)-休(휴)(6세)-익정(7세)-2子泂(8세)-富寧(9세)-龜年(10세)-4子師敏(11세)-鍍(12세)-永鼎(13세)-從革(14세)-繼福(15세)-4子彦瑞(16세)-禮元(17세)-?

김영윤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영윤
작성일

  彦瑞(16세)-1子禮元(17세)
            - 2子禮博(17세)-崙(18세)-尙連(19세)-載萬(20세)-道綱(21세)-2子宗得(22세)-學哲(23세)
            -在禹(24세)-龜會(25세)-










 













 

김영윤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영윤
작성일

  기미대동보 내용에는 위의 龜會(25세)이후의 기록이 없읍니다
수단에서 누락인지 후계가 없음인지 확인을 요합니다
혹 후손이 있어 이 글을 볼 수 있다면 위 고서가 귀중한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1. 호적단자는 1843년(도광23년. 헌종9) 7월. 강화부에 제출한 것으로 외가면 망월동에 살고 있는 호주 유학 김종득(金宗得. 충렬공 22세손, 전서공 18세손. 당시 76세)님이 작성한 것입니다. 부(道光), 조(載萬), 증조(崙), 외조(영암박씨 朴春起), 처(전의이씨, 69세), 처의 부, 조, 증조, 외조, 그리고 1자(鶴喆.40세), 며느리 밀양박씨(45세), 2자(鶴祿.21세), 등을 기록.

2. 안동김씨 세계표는 1830년(도광10. 순조30)에 만든 것으로 보이나 '道光十肆年'의 '肆'는 '四'를 대신하여 쓴 것으로 본다면 1834년(순조34)으로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좋은 자료를 보았습니다. 전서공파 강화도 출신 종친들께서 구입했으면 좋겠네요.

김효선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효선
작성일

  영윤대부님. 고령김씨 대종회 들어가서 남재 재호님이 운영하는 까페에 가입하여 글 남겼습니다
가급적이면 고서점이 어딘지 가르처 달라고 손전화.집전화 올렸습니다
조만간 연락오겠지요
좋은 정보줘서 감사합니다

김형근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형근
작성일

  간만에 종친으로부터연락받고 열람햇읍니다
좋은정보ㅇ였습니다  조만간만나서해결책을강구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