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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열전(보유)4-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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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10-06-17 16:05 조회2,20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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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전 : 고려사 열전(보유)4. 555p--558p

 

大提學 金恂 (1258-1321)


 안동인(安東人)으로 자는 귀후(歸厚)니 도원수 충렬공 방경(都元帥 忠烈公 方慶)의 셋째 아들이며, 병부상서 한림학사 충사관 수찬관 지제고(兵部尙書 翰林學士 充史館修撰官 知制誥)를 역임하고 중서령(中書令)에 추증된 효인(孝印)의 손자요, 경순왕(경순왕) 의 넷째 아들 고려평장사 대안군 은열(高麗平章事 大安君 殷說)의 후손이다.

 그는 글씨에 능하여 비문을 많이 썼다. 젊어서부터 학문에 힘쓰고, 선대의 음덕으로 벼슬하여 장생서승(掌牲署丞)이 되고, 후에 별장(別將)이 되어 견룡행수직(牽龍行首職)을 맡아 비록 동으로 서로 갔다 왔다 하여도 그 뜻은 항상 문학에 두었으니, 그것은 부친께서 왕조 양대를 섬기면서 최고관직인 장상(將相)을 역임하였으나 오직 과거를 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음으로 아들로서 능히 조부의 업적을 다시 회복하기를 기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힘써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더니 이윽고 충렬왕5년(1279), 금방(金榜) 차장원(次壯元)으로 급제하여 그 해에 처음으로 섭랑장(攝郞將)에 임명되고, 후에 다시 국학직강(國學直講)이 되었다.

 이로부터 부친께서는 막내 아들인 그를 더욱 사랑하여 항상 신변에 두었으며, 하정사(賀正使)로 갈 때 꼭 대동하였으나 다만 일본 정벌 때는 종군(從軍)치 못하게 하였으니 이는 그를 아낌이었다.

 그러나 그는 몰래 먼저 군함에 올라 출정(出征)하여 마침내 부친을 호위하고 구원한 공이 자못 컸으니 이는 그가 오로지 충효로써 발분(發奮)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은 것이다.

 충렬완8년(1282), 전중시사(殿中侍史)로 승빈하고, 이듬해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나아가 선정을 베풀고 1년도 못되어 내직으로 불러 들여 전법좌랑(典法佐郞) ․□□통예문사(․□□通禮門事), 고공정랑(考功正郞)으로 천거되었다.

 원종 3년(1262), 남방사신(南方使臣)의 명을 받고 부친을 배행(陪行)하여 조부의 묘소를 참배하고, 충렬왕 14년*1288)에 비서소윤 지통예문사(秘書少尹 知通禮門事)를 제수(除授)하더니 그 해에 왕이 세자부 행이별감(世子傅 行李別監)을 삼고 사부(師傅)의 책임을 위촉하였다.

 충렬왕 18년(1292), 조현대부 전법 총랑 지제고(朝顯大夫 典法 摠郞 知制誥)를 거쳐 소부윤(少府尹) ․□□학(□□□學), 군부총랑(軍部摠郞), 전리총랑(典理摠郞), 조봉대부 비서윤(朝奉大夫 秘書尹), 삼사우윤(三司右尹)을 역임하였다.

 충렬왕 24년(1298) 5월에 광정대부 승지 성균좨주(光政大夫 承旨 成均祭酒)가 되었다가 7월에 다시 우승지, 성균좨주, 보문각 학사, 지민조사(知民曹事)가 되고, 충렬왕 31년(1305) 겨울에 과거에 급제한 동지들이 모두 당시의 명사로서 크게 화려한 연회를 베푸니 조야(朝野)가 가상히 여기고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 해에 조의대부(朝議大夫)로 승진하여 이듬해 세자사인(世子舍人)을 겸하고, 또 다음 해에 국학전주(國學典酒)로 승진되고, 이어 봉렬대부 밀직사 좌부승지(奉列大夫 密直司 左副承旨)로 천거되었더니 별안간 좌부승지 보문각 직학사(左副承旨 寶文閣直學士)로 승진하였다.

 그 이듬해에 우승지 지판도사사(右承旨 知版圖司事)를 가하고 이해 봄에 남방으로 사신을 갔다가 돌아와서 다시 통의대부 광정부사 승지 성균좨주(通議大夫 光政副使 承旨 成均祭酒)에 임명되고, 또 다시 정의대부 집현전학사 좌산기상시(正議大夫 集賢殿學士 左散騎常侍)를 제수하였다.

 이 해 칠월에 다시 밀직사 우승지 국학제주 보문각학사 지민조사(密直司 右承旨 國學祭酒 寶文閣學士 知民曹事)에 제수되고, 팔월에 봉익대부 삼사좌사  숭문관학사(奉翊大夫 三司左使 崇文舘學士)로 승진되고, 구월에 또 다시 정헌대부 밀직사 좌승지 판비서시사 충사관 수찬관 지제고 지군부사사(正獻大夫 密直司 左承旨 判秘書寺事 充史舘修撰官 知制誥 知軍簿司事)가 되고, 십이월에 봉익대부 밀직사부사 문한학사를(奉翊大夫 密直司副使 文翰學士)를 배명하였다.

 충렬왕 25년(1299)에 벼슬을 사퇴하고, 그 이듬해 부친이 별세하고, 충선왕4년(1312)에 다시 중대광 상락군(重大匡 上洛君)을 봉하여 선친의 작위(爵位)와 식읍(食邑)을 이어 받았으며, 충숙왕6년(1319), 선친의 묘소를 성묘할 때 왕이 계자(季子) 영후(永煦)로 하여금 배행(陪行)케 하였다. 충숙왕7년(1320) 2월, 왕이 그의 집으로 이어(移御)한 일이 있었으며, 이듬해에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삼고, 팔월에 또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 상호군(上護軍)에 임명되었으나 그 달 21일에 노환으로 별세하니 향년 64세였다. 후에 문영(文英)이라 증시(贈諡)하였다.

 여흥군 민지(驪興君 閔漬)가 공의 묘지명(墓誌銘)에 이르기를 “공의 성품이 돈후 강직하고 내유(內柔)하였으며 효제(孝悌) 충신(忠信)이 천하에 출중하였다”고 하였다.

 배위는 첨의중찬(僉議中贊) 문경공(文敬公) 허공(許珙)의 딸이요, 4남3녀를 두니 아들은 상락부원군 영돈(上洛府院君 永暾)과, 별장 영휘(별장 영휘), 자은종 대덕 사순(慈恩宗 大德 思順)과, 좌정승 상락후 영후(左政丞 上洛候  永煦)이다.

 영돈과 영휘 영후의 열전은 따로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 고려사절요, 민지 찬 문영공묘지문, 고려묘지명집성, 신증동국여지승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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