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정신과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한 사촌마을 -안동사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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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10-06-05 08:09 조회2,556회 댓글2건본문
선비정신과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한 사촌마을 | ||||||||||
일찍이 지사(地士)들이 말한 영남(嶺南) 8명기(名基)의 하나라고 하는 의성군 점곡면의 사촌(沙村)마을은 지형상 경북도 내에서도 가장 중앙이 되는 의성읍에서 북동 15km 지점에 위치한다. 의성에서 청송으로 뻗은 지방도를 따라 두 개의 고개를 넘어서 들어오는 길과 단촌면에서 동으로 훤히 트인 골을 따라 8km 가량의 포장된 군도, 안동시 길안면에서 좁은 골과 높은 재를 넘어 남서로 14km 되는 지점이다. 지세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편인데, 보현산(普賢山)과 황학산(黃鶴山)에서 발원한 물의 흐름이 급하여 넓은 하천부지를 형성하고, 토질은 사질양토로 배수가 잘 되어 과수 재배의 적지이다. 또한 이곳은 해발 160m로, 생산과 생활에 가장 적당한 지대이며, 낮과 밤의 일교차가 비교적 심하여, 여름에는 모기가 없어 무덥고 짧은 밤을 쾌적하게 숙면할 수 있다고도 한다. 점곡면이라는 지명은 중국 춘추시대 공자의 고제(高弟) 증자(曾子)의 부친인 증점(曾點)의 점(點)자를 따라 점곡(點谷)이라 불리다가 후에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면 폐합에 따라 점곡면(點谷面)으로 개칭하여 지금에 이른다. 점곡면의 소재지권이기도 하는 사촌마을의 역사는 고운 최치원의 장인 나천업 정승이 살았다고 마을의 원로들에게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신라 중엽까지 추측할 수 있다. 실제로 마을에는 나정승의 묘라는 고총이 전해진다. 사촌이라는 마을지명은 충렬공 김방경의 5세손 김자첨공이 안동 회곡에서 이곳으로 이거하면서 중국의 ‘사진촌(沙眞村)’을 본따서 ‘사촌(沙村)’이라고 한 것을 유래로 한다. 후에 안동지방의 명문들과 혼인관계를 통하여 사촌의 안동김씨는 명문가로 성장하였고, 조선조말까지 대과급제자와 소과급제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사촌마을은 과거 대촌으로 ‘와해(瓦海)’라고 불렸을 만큼 기와집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세 번의 난을 겪으면서 옛날의 모습을 상실했기 때문인데, 그 가운데 특히 항일의병운동으로 인한 피해는 마을이 모두 화재로 불타서 없어질 만큼의 큰 고난이라고 할 수 있었다. 1895년 명성황후의 시해를 계기로 1896년 병신창의(丙申倡義) 당시 의성지역의 의병운동 중심지가 바로 사촌마을이었기 때문이다. 운산 김상종(云山 金象鍾) 등의 의병장을 배출한 사촌마을은 1896년 3월 29일 일제의 마수에 의해 잿더미로 화했고, 그로인해 옛날의 ‘와해’라고 불렸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사촌마을은 고려 중흥 공신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5세손 감목공(監牧公) 김자첨(金子瞻)의 후손인 안동 김씨와 단종조 절의신 행정(杏亭) 권식(權軾)의 후손인 안동 권씨를 비롯하여 조선후기에는 조선중기의 명유(名儒) 겸암(謙菴) 류 운룡(柳雲龍)의 후손인 풍산 류씨가 입향하여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이들의 입향유래를 살펴보면 안동 권씨는 김자첨이 입향할 당시 사위로써 함께 들어왔으며, 풍산 류씨는 조선조 천사 김종덕에 이르러 병촌(屛村) 류태춘(柳泰春)이 천사의 누이동생과 혼인하여 하회에서 처향인 사촌으로 이거할 때 동생인 류민춘과 함께 들어와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또한, 면 소재지에서 동남쪽 2km인 윤이실(尹谷)에는 학행과 절의로 이름난 이계(伊溪) 남몽뢰(南夢賚)의 후손 영양 남씨가, 동쪽 2km 지점 단애(丹厓)실에는 퇴계 문하의 고제 송고(松皐) 박윤함(朴允?)의 후예 반남 박씨, 서쪽 중리(中里)에는 1문 5종반의 충절로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의 공훈이 길이 빛나는 김치중(金致中)의사의 자손인 의성 김씨가 각각 터를 잡아 세거(世居)하면서 문맥(文脈)과 통혼으로 빈번히 인연을 맺고 교류하고 있다. 사촌마을은 문향(文鄕)으로도 이름이 높다. 옛날부터 학문으로써 향리를 빛낸 어른들이 많지만 벼슬로 나간 사람은 적고 학문과 수신을 미덕으로 삼은 인사가 많았다. 그러나 대소과(生員과 進士 및 文科, 武科)에 53명이 급제하여 조선조 사회에서 일단 각자의 지적 수준과 능력을 가름해 보고자 했음인지 자격을 인정받는데는 뒤지지 않았었다.
사촌마을자료전시관은 유교문화권개발사업으로 건립된 것으로 규모는 크지 않지만 이곳에는 사촌마을의 유래와 민속, 출신 인물등에 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어 마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반드시 처음에 들려야 할 장소이다. 때에 따라 의성군 문화유산해설사가 상주하고 있어 마을 소개 또는 마을에 대한 자료 등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두 번째는 사촌가로숲이다. 사촌가로숲은 안동김씨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5세손 감목공(監牧公) 김자첨(金子瞻)이 입향할 때 마을 의 서쪽이 허하여 심었다고 전하는 방풍림이다. 길이가 1.2km가량 되는 규모를 사촌가로숲은 그 역사가 600년가량 되어 마을의 숲을 연구할 때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의성군의 군조인 왜가리가 서식하고 있는 서식지여서 왜가리 서식지 연구 자료이기도 하다.
이 곳 사촌가로숲에서 조선조의 명재상 서애 류성룡이 태어났다는 전설이 전한다. 서애 류성룡의 아버이인 입암 류중영공에게 사촌마을 출신의 안동김씨부인이 시집을 갔다.
세 번째는 마을의 주요유적들로 만취당과 후산정사를 들 수 있다. 만취당은 퇴계 이황의 고제인 만취당 김사원이 지은 것으로 현존하는 건축물 가운데 사가(私家)의 목조 건축물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산정사는 안동김씨문중에서 사용하는 제실이다. 병신창의 당시 모두 불타서 근래에 다시 지은 것이다. 후산정사의 옆에는 만취당 김사원의 사당이 있다.
네 번째는 상여집이다. 상여집은 장례에 쓰이는 상여와 용구들을 보관하는 곳으로 곳집이라고도 한다.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안동 일직면에 있는 상여집이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다. 본래 마을의 바깥쪽에 보이지 않게 되어 있었으나 유교문화권 개발사업으로 외곽도로가 나면서 깊숙이 숨어있던 상여집이 드러나게 되었다. 아직 별도의 체험프로그램이나 투어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지 않지만 의성군에서 인근의 폐교된 학교를 이용해 수련원 형태의 숙박시설 건립과 고가체험프로그램을 계획 중이다. 곧 복원되는 유자정과 교육관이 건립중인 민산정 등을 활용하면 숙박과 체험이 가능하다. 그래도 지금 해야한다면 마을 이장님께 말씀드리자. 시설 좋은 마을회관과 안동김씨종택, 후산정사 등에서 숙박이 가능하다. 글, 사진 김태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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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관리자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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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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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안동김씨의 얼굴, 사촌 도평의공파의 유적과 아름다운 모습이 많은 곳에서 연이어 공개, 발표되고 있군요. 참으로 자랑스럽습니다. 그런데 사진들을 자세히 보니 전에 정중님이 찍어 본 홈에 게재되어 있는 사진들이 많이 들어 있네요.
우리 자료들이 이처럼 넓게 대량으로 유포되어 있습니다.
김태홍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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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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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 관리자님.. 여기 사진은 제가 직접 찍은 것입니다. ㅎㅎ 이렇게 좋은 문화유산들이 어디가겠습니까? 누가찍든... 다 똑같이 아름다워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