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향기-발운산(撥雲散)과 당귀(當歸) -퇴계와 남명의 뼈있는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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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10-05-03 09:52 조회2,054회 댓글0건본문
고전의 향기 - 백 열 두 번째 이야기
발운산(撥雲散)과 당귀(當歸) 2010. 5. 3. (월)
평소 근엄한 퇴계(退溪)도 호방한 남명(南冥)의 농담에는 농담으로 응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퇴계와 남명은 동갑으로 한 시대를 살면서도 그 기질과 학문, 출처(出處)가 사뭇 달랐다. 그래서 주고받는 편지 속에도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이 숨어 있다. 그렇지만 《시경(詩經)》에 “해학을 잘하니, 지나치지 않다.[善戱謔兮 不爲虐兮]” 하지 않았던가. 이 양현(兩賢)의 뼈 있는 말을 감춘 격조 높은 농담을 들어 보자.
남명 조식의 편지
하늘의 북두성처럼 평소에 존경했건만 책 속의 사람인 양 오랜 세월 만나 뵙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정성스러운 말씀이 담긴 서찰을 보내 많은 깨우침을 주시니, 예전부터 조석으로 만났던 듯 느껴졌습니다.
우매한 제가 어찌 자신을 아낄 게 있겠습니까. 단지 허명을 얻어 세상을 속여서 성상을 그르쳤으니, 남의 물건을 훔친 자를 도둑이라 하는데 하물며 하늘의 물건을 훔침에 있어서겠습니까! 이 때문에 두려워 몸 둘 바를 모르면서 날마다 하늘의 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늘의 벌이 과연 이르러 허리와 등이 쑤시고 아프더니 달포가 지나자 갑자기 오른쪽 다리를 절어 이미 걸어 다니는 사람 축에도 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평지를 걷고자 한들 어찌 뜻대로 되겠습니까. 이에 사람들이 모두 저의 못난 점을 알았고 저도 사람들에게 저 자신의 못난 점을 숨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웃고 탄식할 일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공은 서각(犀角)을 태우는1) 것 같은 밝음이 있고 저는 동이를 뒤집어 쓴2) 것 같다는 탄식만 있을 뿐인데도 글을 통해 가르침을 받을 길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눈병마저 있어 눈이 침침해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한 지가 여러 해이니, 명공께서 어찌 발운산(撥雲散)으로 눈을 틔워 주시지 않겠습니까. 부디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멀리서 지면을 빌어 어찌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글을 올립니다.
[平生景仰。有同星斗于天。曠世難逢。長似卷中人。忽蒙賜喩勤懇。撥藥弘多。曾是朝暮之遇也。植之愚蒙。寧有所靳耶。只以構取虛名。厚誣一世。以誤聖明。盜人之物。猶謂之盜。况盜天之物乎。用是跼踖無地。日俟天誅。天譴果至。忽於去年冬。腰脊刺痛。月餘。右脚輒蹇。已不得齒行人列。雖欲蹈履平地上。寧可得耶。於是。人皆知吾之所短。而僕亦不能藏吾之短於人矣。堪可笑嘆。第念。公有燃犀之明。而植有戴盆之嘆。猶無路承敎於懿文之地。更有眸病。眯不能視物者有年。明公寧有撥雲散以開眼耶。伏惟鑑察。遙借紙面。詎能稍展蕉葉乎。謹拜。]
-《남명집》 2권〈퇴계에게 답한 편지[答退溪書]〉
퇴계가 남명에게 보낸 답서
지난 여름, 답서를 보내 자세히 말씀해 주셨기에 출처(出處)의 도리가 평소 가슴 속에 정해져 있기 때문에 밖에서 오는 명리(名利)에 마음이 걸리지 않을 수 있어 그 말에 깊은 맛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 번 벼슬이 내렸는데 벼슬을 받으러 오지 않는 이도 드문데 하물며 재차 벼슬이 내릴수록 뜻이 더욱 확고해 흔들리지 않음에 있어서야 말할 나위 있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에서는 이를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은 늘 적고 노하고 비웃는 사람은 늘 많으니, 선비가 되어서 자기 뜻을 지키고자 해도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세상 여론 아래서 두려워 우왕좌왕하는 자는 진실로 뜻을 지키는 선비가 아니니, 공의 경우를 보고서 뜻을 세운 바 없는 저 자신이 더욱 부끄러웠습니다.
발운산(撥雲散)을 달라고 하신 분부에 대해서는 감히 따르고자 힘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저도 당귀(當歸)3)를 구하고 있는데 얻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니, 어찌 공을 위해 발운산을 구해 드릴 수 있겠습니까.
공은 북쪽으로 오실 뜻이 없고, 제가 남쪽으로 갈 일은 조만간에 필시 있을 터이나 시기를 분명히 알 수 없으니, 그저 사모하는 마음만 간절할 뿐입니다. 헤아려 주십시오. 추운 날씨에 더욱 건강에 유념하십시오. 이만 줄입니다.
[去夏。承辱報書。披諭諄悉。有以見出處之道素定於胸中。所以能不攖外至。而言之有味也。一而不至者猶鮮。況再而愈確耶。然而世俗知貴於是者恆少。而怒且笑者恆多。爲士而欲守其志。不亦難乎。然世論之下。怵迫選者。固非守志之士。因公事而益愧鄙人之無樹立也。示索撥雲散。敢不欲勉。但僕自索當歸而不能得。何能爲公謀撥雲耶。公則無北來之志。僕之南行。 早晩必可得也。而未有指期。徒切慕用之私。惟照察。歲寒。冀加崇珍。不宣。]
-《퇴계집》 10권〈조건중에게 답하다[答曺楗仲]〉
1) 서각(犀角)을 태우는 : 서각은 물소의 뿔인데, 이를 태우면 밝은 빛이 난다고 한다. 진(晉)나라 온교(溫嶠)란 사람이 길을 가다가 무창(武昌)의 저기(渚磯)한 곳에 당도하니, 물이 아주 깊고 물속에 괴물이 산다고들 하였다. 온교가 서각에 불을 붙여서 물속을 비추니, 얼마 뒤에 물속에 있던 기이한 모습의 물고기들이 모두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晉書 卷67 溫嶠列傳》여기서는 지혜가 매우 밝음을 비유하였다.
2) 동이를 뒤집어 쓴 : 사마천(司馬遷)의〈보임안서(報任安書)〉에 나오는 말이다. 동이를 머리에 이면 하늘을 볼 수 없고 하늘을 보려면 동이를 일 수 없다는 것으로, 여기서는 아무런 식견이 없다고 겸사로 말하였다.
3) 당귀(當歸) : 약초 이름이다. 풀이하면 ‘마땅히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 된다. 즉 퇴계 자신이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가려는 뜻을 은유한 것이다.
[해설]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주고받은 편지이다. 위 남명의 편지는 명종(明宗) 계축년(1553)에 퇴계가 보내온 편지에 대한 답서이다. 이보다 앞서 남명이 성수침(成守琛), 이희안(李希顔) 등과 함께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홀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데 대해 퇴계가 출처(出處)의 도리에 맞지 않다고 지적하자 남명이 이 편지를 보내 ‘자신은 눈이 어두워 앞을 잘 보지 못하니 눈을 틔우는 안약인 발운산을 보내달라’고 뼈 있는 농담을 던진 것이다. 그러자 퇴계는 자신도 당귀를 구하지 못하고 있는 터에 어떻게 발운산을 구해 줄 수 있겠느냐는 농담으로 맞받았다. 즉 자신은 벼슬길에서 물러나 향리로 돌아가야 마땅함에도 그러지 못하고 있는 형편인데 어찌 그대의 처세(處世)에 대해 충고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함으로써 대답한 것이다. 호방한 인품의 남명다운 공격이며, 늘 겸양을 보이는 퇴계다운 응수이다.
퇴계와 남명은 동갑이요 한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이면서도 기질은 매우 달랐다. 퇴계가 후학들과 사단칠정(四端七情)과 같은 이기설(理氣說) 논쟁을 벌이는 것을 남명은 매우 못 마땅하게 여겨 “요즘 학자들은 마당에 물을 뿌리고 비질하는 일 따위의 쇄소응대(灑掃應對)와 같은 작은 예절도 모르면서 천리(天理)를 담론, 헛된 명성을 훔쳐서 세상을 속이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퇴계는 “본래 세상을 속여 명성을 훔치려 하는 자는 말할 것도 없지만 학문을 하려는 좋은 뜻을 가진 사람들에게 학문하지 못하게 막는다면 이는 하늘과 성인(聖人)의 문하에 죄를 짓는 것이니, 어느 겨를에 남이 세상을 속이고 명성을 훔치는 것을 걱정하리요.”라고 반박하였으니, 시종 겸양을 보이는 퇴계로서는 매우 강경한 어조이다. 그만큼 이 양현(兩賢)의 성향은 거의 상반된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그렇지만 성리학자라 하여 퇴계와 남명이 비슷한 학문 성향을 보였으면 어땠을까. 조선의 성리학이 외려 더 멋없고 답답해지지 않았을까.
퇴계와 남명의 학문 성향이 다른 것이야 이 자리에서 굳이 다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매우 상이한 성향을 가지고 상대에 대해 강한 비판의 칼날을 품고서도 유연한 해학으로 자기 뜻을 전달할 줄 알았던 이 양현(兩賢)의 지혜를, 걸핏하면 말을 쉽게 내뱉는 오늘날의 지식인들이 꼭 배워야 하지 않을까.
글쓴이 /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교수
* 주요저서
- 한주 이진상의 주리론 연구, 경인문화사(2007)
- 유학적 사유와 한국문화, 다운샘(2007) 등
* 주요역서
- 읍취헌유고, 월사집, 용재집,아계유고, 석주집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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